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50화 (1,050/1,277)

##  1050화

에르네스트가 떠난 뒤로 난 구세프 선생님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에르네스트의 결정을 반대하고, 거기에 에르네스트가 반발하면서 두 사람이 싸우기까지 했단 말을 듣고는 찾아가서 어찌 된 일인지 대화로 풀어 보려고 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그 후론 솔직히 나와 선생님의 관계도 조금 어색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피하려고 한 건 아니다. 단지 시간이 잘 맞지 않았을 뿐이다.

난 콩쿠르 준비로 수업도 들어가지 않았고 항상 레슨실이나 연습실에만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정말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니라면 만나기 어렵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떤 생각이신지 잘 모르겠다.

“…….”

내가 쭈뼛거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 되도록 밝고 활기차게, 괜히 복잡한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어필했다.

게다가 오늘은 기쁜 소식이 있으니 웃으며 대화를 하기에도 좋았다.

“발렌티나나 바르바라는 만나 보셨나요?”

“뭐?”

구세프 선생님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두 아이를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했던 난 시작부터 난감함을 느꼈다.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복도 저편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그 애들은 내일부터 정상 등교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오후에 귀국했으니까요. 그런데 선생님들 만나 뵙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잠깐 학교에 들렀더라고요.”

“그러냐. 못 봤다.”

지도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꽤 많이 만났고, 두 사람이 학교에 온 것만으로도 꽤 이슈였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전혀 모르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좋은 화제를 이대로 마무리 짓긴 아쉬워서 살짝 덧붙였다.

“선생님도 칭찬해 주시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건 또.”

“그 애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세요?”

음악 이론 수업 등에서 보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과 선생님 사이의 접점은 거의 없겠지만, 학교에 10년 정도 다니면서 구세프 선생님의 대단함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중앙음악학교의 한 기둥이라고 해도 무방한 분이다. 그런 분에게 칭찬을 받는다면 분명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도 기뻐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 역시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좋아해 주실 것 같았고.

내가 중간 다리 역할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으니까 사교성 좋은 발렌티나를 앞세워서 잠깐 자리를 만들어 볼까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구세프 선생님이 어깨를 낮추어 날 지그시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너…… 어제 인터뷰 때문에 그러는 거냐?”

“예?”

“발렌티나가 했던 인터뷰 말이다.”

그냥 못 알아듣고 넘어갔다면 선생님도 넘어갔겠지.

하지만 이런 것만 예민하게 잘 알아듣는 내 머리는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발렌티나가 내 쇼팽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 것에 대해 내가 부담감을 느끼고 변호와 변명을 동시에 하려는 건지 묻고 계신 것이다.

난 얼른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전…….”

“하,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안다. 발렌티나도 별 뜻이 있어 말한 건 아니겠지. 너랑 같이 연습하다 보면 닮아 가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마, 맞아요. 그리고 방금 제가 드린 말은 진짜로…….”

“그래, 그것도 맞겠지. 네가 어디 허튼소리 하던가.”

선생님은 딱히 오해한 게 아니라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는 듯 어물쩍 넘어가셨다.

그런데 그 뉘앙스가 약간 묘하게 들렸다. 날 무척 믿으면서도 그것이 그저 좋지만은 않으신 듯한 느낌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며 가만히 올려다보자 선생님은 천천히 말씀하셨다.

“다른 녀석들이 그런 네게 몰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언뜻 칭찬처럼 들린다.

선생님이 말하는 다른 사람은 발렌티나 한 명만이 아니라 여러 명을 뜻했고, 내가 그만큼 영향력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또 내 예민한 면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아요. 왜일까요?”

“칭찬으로 한 말이다. 곡해해서 듣지 마라.”

“그럼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계시나요?”

선생님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 자꾸만 이상하게 나온다.

지금 이 자리에서 콩쿠르 외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척 부적절하고 뜬금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지금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생사람 잡지 말라는 듯 구세프 선생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항상 무뚝뚝한 분이시긴 하다.

하지만 난 선생님이 학생들을 칭찬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안다. 절대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가 불신하는 눈빛을 보이자 선생님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쓸데없이 붙잡고 늘어지자 약간 피곤함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결국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건 충고였다.

“넌 신경 쓰지 말고…… 이제 얼마 안 남은 네 콩쿠르에나 집중하면…….”

“선생님.”

“되…… 뭐냐?”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요…… 먼저 말씀하시니 여쭈어볼게요.”

난 바보가 아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내게 몰두하는 다른 사람이 발렌티나뿐만이 아니라 에르네스트도 포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에 대해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에게 감정이 별로 안 좋을 테고, 내가 말을 꺼내면 분명 또 화를 내실 테니까. 그래서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며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에 서린 감정은 단순한 분노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미처 짐작도 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하시는 모습과 그러면서도 날 떼어 놓으려는 말씀이 결국 날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에르네스트와 전혀 연락이 안 되시나요?”

조용히 꺼낸 내 말은 지금 두루뭉술하게 퍼져 있던 이 모든 상황을 한 번에 꿰뚫었고, 구세프 선생님은 잠시 말씀이 없으시더니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혹시 날 속이시진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연락할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날 안심시키면 그만이다. 내가 더 떼를 쓸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확인할 필요도 없이 선생님의 말은 확실했다.

지금 에르네스트는 지도 선생님과도 연락이 안 되는 완벽한 고립된 상태에 놓여 있다.

정말로 철저하게 통제된 콩쿠르에 참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게 중요한 도전이란 건 잘 안다. 한참 전부터 난 그의 의사를 존중해 왔다.

그러나 마치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한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숨기고 있던 한마디가 나오고 말았다.

“왜 끝까지 막지 못하셨나요?”

“내가 막아야 하나?”

“싸우기까지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녀석이 직접 말했군.”

구세프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물론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난 되도록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차라리 선생님이 화를 내시고 그런 녀석은 꼴도 보기 싫다고 하셨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냐.”

“사실 저도 약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하하. 나도 비슷할걸.”

낮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역시 지금 나와 구세프 선생님의 생각이 비슷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화가 나신 것처럼 보이진 않아요.”

“…….”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독단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대놓고 그렇게 말해 버리니 할 말이 없었지만,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났었다. 그러나 그건 감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선생님은 피식 웃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음악 선생으로선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거든.”

“이해하셨나요?”

“그래.”

“그걸 저에게도 조금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약간 화가 났지만 결국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와 같지만, 결정적으로 구세프 선생님은 나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으신 것 같았다.

나도 이야기를 듣는다면 조금 더 잘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것 같구나.”

어쩐지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오가는 모든 상황을 미리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만큼 예민해진 적이 없었는데, 구세프 선생님을 보니 참고 있던 것이 한 번에 터져 버린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따지듯 말하고 있었다.

“팔도 성치 않은데, 저에게 몰두한 나머지 급하게 결과를 내려고 전파도 닿지 않는 해외에 나가 있는 것을 제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시나요?”

난 나 자신에게 약간 충동적인 면이 있다는 걸 안다.

때문에 의식적으로 말하기 전에 생각을 깊게 하려 애쓰는데 이번엔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말을 해 놓고 1초도 지나지 않아 후회됐다. 이렇게 오만하고 무신경한 말이 있을까.

그러나 구세프 선생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

“이미 그건 이해한 것 같은데?”

“싸우면서까지 말리려 하셨다는 걸 듣고는 제가 이해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되네요. 저도 가만있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 말하는 족족 후회가 드는데도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전부터 계속 느껴 오던 후회를 지금 털어놓고 싶어졌다.

다시 이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덧붙이려는 찰나 선생님이 내 눈앞에 손가락을 딱 튕기셨다.

거의 총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바짝 얼어붙어 있자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타티아나. 진정 좀 하자.”

“……저 지금 굉장히 차분한데요.”

“그런 녀석이 왜 쓸데없이 날 자극하려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지?”

선생님은 내가 신경질적이라는 걸 안다. 다 아시면서 받아 주고 계셨던 것이다.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깨를 움츠리고 있자 선생님이 천천히 말씀하셨다.

“넌 지금 내 눈을 멀게 하려고 하고 있어.”

“예……?”

“내가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네 말에 따르도록 말이다. 넌 머리가 좋은 데다가 교묘하게 논리적인 척도 잘하니까 사람을 부추기는 데에 능하지.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라 대화할 때도 그래.”

“……예? 제가요?”

난데없는 평가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은 것이 무색하게 난 바보처럼 맹한 소리만 냈다. 그런 내가 웃겼는지 선생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 봤자 소용없다, 타티아나.”

복잡하게 뒤틀려 있던 선생님의 감정이 하나로 정돈됨을 느낀다. 그것은 따뜻함을 가지고 온전히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네가 어쨌든 에르네스트 녀석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테고, 난 그걸 잘 안다. 그러니 내 입을 빌어 책임감을 느끼려 하지 마라.”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뭐든 간에 마찬가지로 그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들었었지. 하지만 난 그런 식으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고집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힘없이 웃더니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듣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에르네스트에게 선생님이 느끼는 분노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염려가 차지한다.

“걱정이야 되지. 어떻게 안 되겠냐? 그 녀석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아직 어린애인데.”

아직은 까불 생각 말라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피식 웃으셨다.

“너도 마찬가지로 어린애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나중에 그 녀석이 결과물을 들고 나타났을 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나 생각해 둬라.”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떠올린 건 하나뿐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잘 해낸다면 가지고 올 결과물은 상패와 작품 두 개가 될 것이다. 그중 상패는 축하해 주면 될 일이고…….

사실 내 관심은 작품 쪽에 향해 있었다. 초연은 내게 맡겨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보았는지 구세프 선생님은 낮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켰다.

“기대하고 있군.”

“그…….”

“그래, 나도 기대하고 있다.”

난 그제야 선생님이 왜 복잡한 표정을 하고 계셨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나와 에르네스트를 각각 볼 땐 걱정을, 우리를 한데 묶어 볼 때는 기대를 하고 계셨다.

기묘한 괴리가 존재하는 시선이지만 어쩐지 난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 기대가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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