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51화 (1,051/1,277)

##  1051화

에르네스트는 잘 때 꿈을 잘 꾸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냥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잠깐 생각의 끈을 놓으면 그냥 검은 암전 속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가끔 피곤하거나 하면 꿈을 꾸기도 하는데, 그럴 때 꿈속에 등장하는 건 거의 어김없이 옛 음악가들이었다.

직업병도 이 정도면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어느 날은 모차르트와 당구를 치기도 했고, 라흐마니노프가 드라이브를 권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리스트의 피아노 대결 요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모두 문헌과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상상의 산물이 꿈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실제 음악가들이 어땠는지에 대해 에르네스트가 알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속에 나온 거장들은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정말 가끔, 상상이 아니라 진짜이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사람이 꿈속에 등장하기도 했다.

‘정말 중증인가 봐…….’

빛바랜 금발에 아담한 키. 곧은 자세와 걸음걸이는 그림자만 보더라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종종 꿈속에 나오는 타티아나는 오래된 음악가들과 나란히 연주하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타티아나와 쇼팽이 음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광경은 정말 초현실적이었다.

물론 현실이 아닌 꿈속이니 불가능한 일이 뭐 있겠냐마는,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뇌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같은 또래 피아니스트로서 굉장한 실력과 인품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거장들과 어울릴 정도의 레벨로 둘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라흐마니노프나 쇼팽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을 떠올린다면 구세프 선생님 같은 피아니스트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종종 꿈에 나와 대가들과 어울렸고,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미쳐도 한참 미쳤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런 거 말고…….’

일반적으론 바라던 일이 꿈속에 투영되지 않던가?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던 곳에 타티아나와 데이트를 간다든가…….

그렇게 상상하기도 편하고 보다 단순한 꿈 내용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게 기이할 정도였다.

데이트 비슷한 걸 꼽자면 꿈속에서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가끔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도 같은데…… 도무지 그것 외엔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현실에 있는 타티아나의 존재감이 강렬하긴 했다.

‘…….’

잠자리가 편치 않은 탓인지 에르네스트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었다.

운 좋게도 타티아나가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는데, 에르네스트가 슬쩍 말을 걸어 보니 그녀는 웃으며 받아 주었다.

오늘따라 뭔가 굉장히 상냥한 느낌이라서 에르네스트는 작곡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같이 놀러 가자고 권했다.

그 제안에 타티아나는 깜짝 놀란 듯 토끼 눈을 하고 바라보더니 이내 무어라 말했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에르네스트가 귀를 가까이하며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할 때였다.

삐삐삐삐-

알람 시계 소리가 에르네스트를 강제로 꿈에서 끌어냈다.

“아, 씨…….”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뒤척였다.

짜증이 확 났다. 저 알람 소리만큼은 정말로 적응이 안 된다.

꿈에서 떠올렸던 중요한 악상 같은 것들도 저 싸구려 비프음을 들으면 모두 다 이상해져 버린다.

다른 걸로 바꿔 달라고 요청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오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작곡가들이 외부뿐만이 아니라 꿈에서조차 도움을 얻지 못하게 차단하려는 속셈이 있는 걸까.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에르네스트는 팔을 뻗어 알람 시계를 탕 눌러 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드니 작은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 뚫려 있는 창문에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앉아 있는 싱글 침대와 선반, 그리고 옷장 하나.

반대편에는 사일런트 시스템이 설치된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와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오선지와 필기구 등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같은 건 없다. 전자 기기라곤 알람 시계 하나와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리더기뿐이었다.

이곳에 온 것도 2주일이 넘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방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잠 좀 깰까…….”

계속 혼자 있다 보니 늘어난 건 혼잣말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면서 팔의 상황부터 체크했다. 별문제가 느껴지진 않아서 오전 재활 훈련도 할 수 있었다.

재활을 마친 에르네스트는 슬리퍼를 신고는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옛 궁전이었던 이곳의 회랑을 걷다 보면 수백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욕실로 향한 그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찬물이 머리에 닿자 정신이 확 들었다.

학교에 가지도 않고, 누가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런 아침 루틴을 절대 비틀지 않고 그대로 지켰다.

앞으로도 한참이나 더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사이 패턴을 무너뜨리지 않고 버티려면 무엇이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좋다.

씻자마자 다시 방으로 돌아온 에르네스트가 한 것은 전자책 리더기를 펼쳐 드는 것이었다.

“…….”

콩쿠르 측에서 제공한 이 전자책 리더기는 오로지 전자책을 읽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무엇을 보았는지 그 내역까지 나오기 때문에 편집증마저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 대신 이 전자책 리더기 안에 들어가 있는 책들은 각종 언어로 수만 권이나 되었다.

러시아어로 된 책들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중에서 에르네스트가 근래 읽는 것은 알베르 카뮈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들이었다.

카뮈의 소설은 이전에 본 적이 있어 흥미가 있었고, 니체는 처음이었지만 바그너와의 관계를 조금 더 깊게 분석하고 철학적인 면도 알아보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없어서 정보가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아는 건 세계적인 음악가인 바그너와 니체는 서른 살도 넘게 나이 차이가 났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정도 전 시대엔 음악가와 문학가, 철학가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흔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았고,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 증거는 지금 보고 있는 책 ‘비극의 탄생’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꽤 흥미롭게 음악가와 철학가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

그렇게 독서를 2시간쯤 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에르네스트를 담당하는 직원인 가브리엘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몇 안 되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수호천사의 이름을 한 직원이 담당으로 붙어서 기분이 조금 묘하긴 했지만, 사실 저 사람의 일은 단순히 시중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감시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식사를 가지고 와 준 건 고마운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전자책 리더기를 내려놓고 그를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가브리엘.”

“별말씀을. 저야말로 에르네스트에게 고마운걸요.”

“저한테요? 왜요?”

“다른 분들은 이 시간이 되도록 안 일어나기도 하거든요.”

가브리엘은 곤란하다는 듯 낮게 웃으며 옆 테이블에 빵과 스프 등을 내려놓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작곡가들은 모든 통신 기기 등을 빼앗기고 외부의 일도 볼 수 없게 되는 대신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허락받는다.

밤낮을 바꾸어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면 힘든 건 담당 직원들이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아침 식사가 세팅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릇은 이따가 제가 가져다 놓도록 하죠.”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빵을 조금 찢고 스프에 찍어 입에 넣었다. 여기 와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맛있는 빵 때문에 용서가 되는 부분도 많았다.

가브리엘은 눈인사만 보내고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

“예.”

“일은 요즘 어떻습니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그거겠지.

에르네스트는 먹던 빵을 다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좋아요.”

“혹시…… 완성된 곡은 있습니까?”

“아뇨, 아직. 두 곡을 동시에 작곡하고 있어서.”

이곳에서 요구하는 곡은 세 곡.

그중 한 곡은 외부에서 작곡한 것을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가지고 오고, 두 곡은 따로 콩쿠르 측에서 제시하는 주제와 제한 사항 등에 맞추어 작곡해야만 했다.

일반적인 작곡가들은 한 곡을 완성하고 나서 다음 곡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제때 일어나서 책 보고 밥 먹고 일하는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역시 특이한 사람인가 하는 시선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건 별로 특이한 축에 속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뭔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 손을 들어 올려 보였고,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그렇게 보고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불편한 점이라도?”

“제발 알람 시계 좀 바꿔 주세요.”

“그건 공인된…….”

“공인이고 뭐고, 저 소리 들을 바에 내일부턴 시계 버리고 안 쓸 겁니다. 그럼 저도 이 시간이 되도록 자겠죠?”

시계 하나 가지고 이렇게 깐깐하게 굴면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 되어 줄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럼 피곤해지는 게 누군지는 명확했다.

가브리엘은 협박을 당하면서도 낮게 웃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다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가브리엘이 나가고, 에르네스트는 남은 식사를 다 마쳤다.

그릇들을 챙겨 들고 에르네스트는 방을 나섰다.

식당 입구까지 가서 식기들을 반납하고 나니 해가 조금 더 높게 떠올라 주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잠시 그 따사로움을 즐기며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회랑을 걸으며 산책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반대편 회랑에 있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에르네스트도 그냥 무시할 순 없어서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보냈다.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도 산발을 한 남자였다. 그냥 보면 무슨 노숙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저 남자가 그와 경쟁하고 있는 작곡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옆 사람은 아마 담당 직원일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긴 하지만 아직 에르네스트는 저들과 인사는커녕 말도 나눠 보지 못했다.

이곳에선 작곡가들끼리 대화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짧게 흥얼거리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아예 원천적으로 만나는 걸 차단한다고 하는데…… 대체 얼마나 공정하게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뺏는 것까진 이해해도 말도 못 섞게 감시하는 건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이곳의 규칙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가급적 그 규칙을 따라 줄 생각이었다. 알람 시계만 빼고.

‘담배 피우러 나왔나 보네…….’

그렇게 멀찌감치에서 인사를 나누고 슬슬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그쪽에서 이쪽을 좀 봐 달라는 듯 손짓을 했다.

뭔가 싶어 봤더니 남자는 담배를 고쳐 물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팔랑거렸다.

이곳에서 작곡가가 들고 흔들 만한 종이라면 악보밖에 없었다.

간밤에 쓴 걸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여기선 보이지도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종이를 담뱃불에 대더니 불을 붙였다.

옆에 있던 담당 직원이 깜짝 놀라며 무어라 소리쳤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붙은 종이를 든 채 에르네스트를 보고 있었다.

“…….”

약간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에르네스트는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손을 펴 보였다.

뭔가 기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게 통할 정도면 이런 곳에 오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해 웃기지도 않는다.

태연하게 반응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그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묘한 손동작으로 불붙은 종이를 가렸다. 그리고 가렸던 손을 치우자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곡가가 아니라 마술사인가? 그냥 불붙은 종이가 다 타서 없어졌다기엔 너무 빠른 시간이라서 조금 신기했다.

에르네스트는 재미있는 마술을 보여 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박수를 두어 번 쳤고, 남자는 과장된 태도로 있지도 않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보냈다.

‘진짜 미친 사람이었네.’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이곳의 규칙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하…….”

이곳 생활은 그렇게 불편하진 않다. 수백 년 전 작곡가들도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 없이 살면서 작곡에 집중했을 테니까.

그런 환경을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짧은 시간 동안 협주곡을 두 곡이나 작곡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일정은 시시각각 그를 몰아간다.

러시아어가 통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에르네스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

하지만 결국 에르네스트가 생각해야 하는 건 이 오선지를 어떻게 채우냐 하는 것뿐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꿈속에 나왔던 타티아나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진 그녀의 피아노 소리가 자꾸 떠올랐지만, 이젠 그것도 잘 떠오르지 않고 얼굴이나 목소리 등만 기억난다.

그런 기억은 여전히 무심결에 에르네스트의 음악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펜을 들었다.

나중에 타티아나에게 이 곡을 보여 주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바보처럼 분별력 없이 여기에 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이 오선지 위에 제대로 그의 생각을 옮겨 쓸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 방 안에선 종이에 음악을 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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