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2화
선생님은 우리가 결과적으로 이루어 낼 무언가를 기대하고 계셨다.
각자 지금 향하고 있는 방향이 달라도 언젠가 반드시 정상에서 만나게 되리라 확신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나 역시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 위치가 정상일지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음악계에 그와 내가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얽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 얽힘에서 무언가 끌어낼 수 있을 테지.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난 더더욱 그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각자 참가하게 되는 콩쿠르가 아마 큰 계기가 되리라.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비슷한 확신을 느꼈기에 연락도 안 되는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닐까.
혼자서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 구세프 선생님을 만나 폭발했던 감정이 비로소 조금 추슬러지는 기분이 든다.
들쑥날쑥했던 기분이 차분해지며 내 목소리도 절로 안정되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겠죠?”
“아마도.”
구세프 선생님은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하고 냉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녀석이 잘하고 있다면 예정대로 다음 달까지는 아마 소식을 듣기 힘들 게다. 콩쿠르에 붙잡혀 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겠네요…….”
“하지만 모두 망쳤다면 다음 주쯤, 아마 네가 출발하기 전에 돌아오겠지.”
그제야 난 정말로 아무 소식 없음이 다행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작곡 콩쿠르에서 결선까지 가길 바라는 마음은 분명한데도, 그 전에 한 번쯤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이게 다 전화도 할 수 없는 곳에 있는 탓이다.
내가 쉽게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선생님은 심술궂게 웃더니 허리를 약간 숙이며 물어보셨다.
“만약 일찍 돌아온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다.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겠……죠……?”
여전히 내 머릿속은 조금 복잡했다.
그가 일찍 돌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콩쿠르를 응원해 달라고 하기에도 어색할 것 같다. 아니, 말도 못 걸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약간 시무룩해졌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 낯빛을 살피시더니 다시 허리를 들고는 팔짱을 꼈다.
“그 녀석의 박정한 태도에 실망한 것 같더니, 또 막상 일찍 돌아오는 건 바라지 않는 것 같군?”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내게 한 태도가 어쨌든 간에 음악가로서 난 에르네스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콩쿠르에서 초기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에르네스트라면 일찍 쫓겨나더라도 거기에서 많은 걸 배워 올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난 살짝 고민하다가 간신히 말을 골랐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었으면 하죠.”
혹시나 내가 그의 재능과 유능함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실까 싶어 약간 우려했는데, 다행히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진 않으신 것 같았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군. 적당한 성과가 없으면 아마 그 녀석은 창피해서 너나 나를 피해 다니려고 할 테니 말이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해 다니는 건 싫어요. 그건 정말 질렸어요.”
이미 아나스타샤와 어색해져 본 적이 있는 나는 다시는 그런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이미 떠나기 전에 내게 음악적 부분에 대해선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그건 그의 음악가적 신념이라고 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친구로서의 거리까지 멀어진다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뭐, 결과와 관계없이 불편하긴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구세프 선생님은 약간 묘한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올려다보자 선생님은 못 들은 걸로 하라는 듯 손을 휘젓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아까 내가 그랬지? 일찍 오면 가만둘 생각 없다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
“뭘 어떻게 해. 강제로 잡아서 레슨실에 던져 놓아야지.”
“…….”
정말 구세프 선생님다운 말씀이었다. 도망이고 뭐고 일단 물리적으로 잡아다가 감금하실 생각인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닌지 손목을 슬쩍 돌리면서 선생님은 이어 말했다.
“한 일주일은 놀리기만 할 생각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해서 가더니 왜 일찍 왔냐고 말이지.”
“……너무 그러시진 마세요.”
“하, 친구랍시고 또 감싸는군.”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나도 같이 끌려갈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린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다.
어쨌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가정이다.
그러나 사실 나나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마 그라면 원하던 결과를 손에 쥐고 돌아오겠지.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돌아오든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분이셨다.
“뭐든 간에 난 상관없다. 녀석이 잘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내 일을 할 뿐이고. 만약 잘 해낸 녀석이 의기양양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내년 졸업의 준비가 될 테니까.”
“…….”
그 준비 중엔 졸업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준비도 있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지금 10학년이라는 것이 확 와닿았다.
물론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그동안 난 후회할 겨를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다. 잘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정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들어 선생님을 바라보니 장난기 서린 눈빛이 내게 향한다.
“또 그런 눈으로 보는군.”
“…….”
“아까 솔직하게 화내던 것도 그렇고, 평소에도 이렇게 감정을 좀 드러내고 다니면 좋겠건만.”
“예……? 아.”
그제야 난 복도 한복판에서 구세프 선생님과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린다.
솔직하다는 건 대체로 미덕이지만 그게 선생님 앞이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심지어 화를 내는 것이라면…… 해선 안 될 일이고.
이미 한참 늦은 것 같다. 그래도 난 지금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선생님께 사과를 드렸다.
“죄, 죄송해요. 조금 전엔 제가 이성을 잃어서…….”
“웃기는군. 이성을 잃긴? 차분했다면서?”
“그건……. 아니,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저것 할 말은 많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학생으로서 지금 이 상황에서 해야 할 태도를 확실하게 취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탐탁지 않다는 듯 인상을 썼다.
“……치사하군. 이렇게 용서를 빌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내가 여기서 변명을 하고 슬그머니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학생이었다면 단박에 뒷덜미를 잡아 혼을 낼 수 있으셨을 텐데.
지금은 타이밍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결국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시더니 삐딱하게 서서 말씀하셨다.
“됐다. 네가 언젠 나한테 겁먹고 눈치 봤었나? 옛날 생각이 나는군. 아주 그냥 날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그, 그것도 죄송해요……! 제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내가 지금 사과받으려고 이 이야기를 꺼내는 줄 아나? 그냥 그땐 그랬었죠 하고 웃으면 된다, 타티아나.”
농담이란 건 알겠지만 반응하기가 참 난감했다.
그때 난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내가 과거 일들을 웃으면서 농담으로 소비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선생님께는 잘못한 일도 너무 많고, 빚진 것도 너무 많다. 그건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없어지지 않을 테지.
그리고 없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
“어허.”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선생님은 또 일부러 인상을 쓰시더니 일단 이 이야기는 이쯤 하자는 듯 손을 저었다.
“아무튼, 네가 음악에 그리 진지한 덕에 이렇게 된 것 아니겠냐. 그것만 생각해라.”
“……예, 선생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잘 집중하고. 음, 어련히 알아서 잘하니까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었나?”
“아뇨, 아니에요. 그런 게…….”
단지 난 에르네스트에게서 신경을 끄고 콩쿠르에만 집중하도록 강제로 내 시선을 돌리려는 듯 말씀하시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내 콩쿠르에 대해 신경 써 주시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더 해 주셔도 좋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오냐.”
“그 전에 한 번 미리 보여 드리고 싶은 부분도 있는데요…….”
레슨을 요청드리는 건 아니었다. 이미 내 곡들은 미하일 선생님께 레슨을 받으며 거의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심사 위원의 시선으로 내 곡을 보면 어떤 평을 내리실지 여쭙고 싶을 뿐이었다.
일전에 쇼팽 콩쿠르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공동 리허설을 했던 것처럼.
그러나 언제나 그러셨듯 구세프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거절하셨다.
“난 텔레비전으로 보도록 하지.”
완성 전의 음악은 얼마든지 레슨도 해 주시고 도움이 되려 하시지만,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선생님은 칼같이 딱 끊어 내신다.
그건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똑같았다.
그 명확한 기준에서 난 약간의 안정감을 느꼈다.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은 약간 응원의 의미를 담아 덧붙였다.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네가 잘하길 바라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게다.”
“……예?”
“내 딸도 네 팬이거든. 아마 같이 보지 않을까 싶군.”
구세프 선생님께 나와 같은 또래의 딸이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그쪽에서 날 알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따님이니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약간 고장 난 머리가 멋대로 감사 인사를 쏟아냈다.
“아…… 영광이에요.”
“영광은 뭐가 영광이냐. 내 딸이 대통령이라도 되냐?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마라.”
그 냉정한 대답에 난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내가 조금 이상한 대답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 솔직히 말해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말을 아끼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니 선생님이 무뚝뚝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번에 너에게 받은 음반을 집에 가져다 놨더니 이 녀석이 그걸 듣고는 그다음부턴 네 영상도 다 찾아보고…… 얼마 전부턴 나한테 네 사인을 받아 달라고 하는데, 아주 미칠 지경이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나도 내 위신이 있지! 아무리 딸의 부탁이라지만 제자 사인까지 받아 줘야 하나!?”
안 되나……? 선생님이 내 사인을 받는 건 약간 이상하지만, 따님에게 갈 것이라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선생님의 위신을 아무리 고려해 봐도 그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냥 서로 기쁠 것만 같은데.
어리둥절해진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아니다, 못 들은 걸로 해라. 나도 정말 늙었군.”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중앙음악학교의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도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고민하신다는 게 약간 재미있었던 까닭이다.
난 되도록 웃음기를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진심 반 장난 반으로 선생님에게 말을 붙였다.
“저, 선생님.”
“뭐냐.”
“그럼 제가 따님과 만나는 건 어떨까요……? 아,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 건 아니고요……. 사실 저도 선생님 따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넌 뭐라도 된 게 맞지. 그런데 내 딸을 네가 왜 궁금해하지?”
그 와중에도 이렇게 날 고평가해 주시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나는 바보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궁금하니까요?”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갑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거의 반 윽박지르듯 말씀하셨다.
“절대 안 된다.”
“예?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내 명예가 달린 일이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멍하니 바라보니 선생님은 말실수였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헛기침을 하더니 바쁜 일이 있다며 휙 가 버리셨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난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간 구세프 선생님을 오래 봐 왔고, 이제 1년 정도 더 보면 졸업인 만큼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난 선생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건 미하일 선생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적인 부분은 아직도 잘 모른다.
내가 학생이라는 신분에 얽매여 선생님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졸업하고 나면 그 학생이라는 기준에선 조금 자유로워지리라.
그럼 난 선생님들과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다가오는 졸업이 마냥 싫은 것도 아니었다.
“…….”
이것저것 쏟아 내고 나니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다.
무거운 감정들을 조금 내려놓으니 앞으로 겪을 일들에 대한 흥미로움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졸업은 아직 먼 이야기다.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것도 그저 시간 속에 날 던져 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가능한 모든 노력과 의지를 불태워서 해야 할 일들이.
난 고개를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