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3화
한적한 4월의 주말 오전.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한다.
세연은 벤치에 앉아선 계속 주위를 살폈다. 사람 관찰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약속 시간이 슬슬 다가오니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지금쯤이면 곧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긴장되네.”
세연은 일부러 말로 자신의 상태를 되짚었다. 별것 아니었지만 이 또한 하나의 기술이었다.
약간 위에서 보는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자각하며 상황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긴장은 하되 그 긴장마저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한다. 그렇게 세연은 어디에서나 주눅 들지 않고 버텨 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혹시 그사이 얼굴에 대한 기억이 흐려졌나 싶어 세연은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찾아보았다.
미리 사진을 받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홈페이지에서 참가자 목록을 찾으면 바로 보인다.
두 명의 여성 피아니스트 사진은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프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사진들을 재차 확인한 세연은 이 사람들을 지금 만난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교수님도 참…….’
전 세계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비디오 예선에 신청서를 낸 피아니스트는 약 300여 명. 그중 벨기에의 본 무대에 초청받은 건 73명이다.
세연은 자신이 그 73명의 참가자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뻐했으나, 거기서 한국인만 14명이란 사실엔 깜짝 놀랐다. 엄청난 참가율이었다.
그리고 세연을 제외하고도 그 13명 중엔 박 교수와 친분이 있는 피아니스트들이 있었고, 박 교수는 그중 몇 명에게 연락을 하여 벨기에까지 가는 여정을 함께하도록 종용했다.
세연이 아직 너무 어리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이유는 조금 이상했다. 왜냐하면 세연은 혼자서 해외에 간 경험이 많기 때문이었다.
벨기에는 처음이었지만 어차피 호스트 패밀리가 마중을 나온다고 했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종혁에게서 박 교수가 은근히 기뻐하면서 연락을 했었다는 걸 들은 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 자랑이 하고 싶으셨으면 그냥 하시지.’
자상하시지만 가끔은 우울한 그림자를 보이는 교수님이 자신의 작은 성과에 기뻐하신다는 것에 세연은 뿌듯해졌다.
약간 무리하긴 했으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타티아나를 따라간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세연은 이번 콩쿠르에서 무엇이라도 건져 올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웃다가 진지했다가 하는 와중에도 세연은 주변 탐색을 멈추지 않았고, 곧 사진으로 봤던 두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
한 명은 키가 크고 모델 아우라가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인상이 강했는데 실물을 보니까 더더욱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한눈에 봐도 음악가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살짝 처진 어깨와 목을 보니 어쩐지 방금 전까지 피아노를 치다가 나온 사람 같았다.
멀찍이에서 이렇게 한 번에 찾을 줄은 몰랐다.
세연은 조금 더 긴장하면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런데 세연이 먼저 알은척을 하기 전에 그쪽에서 먼저 세연과 눈을 마주하더니 웃으며 다가왔다.
‘날 알아본 건가?’
세연은 자신 쪽에서 어떻게든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세연은 아직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세연은 이미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당황하며 벤치에서 일어나 어수선하게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앞에 다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박성재 교수님 제자분?”
세연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묻는 물음이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하하, 맞아요. 그…… 임세연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양지은이에요.”
“전 이연주.”
교수님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니 어떻게 보면 선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나이 차이가 한참 나기도 하니 만나자마자 반말을 들을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정중한 인사를 받은 세연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물론 정중한 건 인사까지만이었다.
키가 크고 친화력이 좋아 보이는 양지은이 먼저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열일곱 살이었죠?”
“네. 아, 그러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때다 싶어 세연은 냅다 그 말을 붙잡았다.
그런데 음악가 포스가 넘치는 이연주는 만나자마자 나이부터 묻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같은 콩쿠르 참가자인데 그런 걸 따질 게 아니라 존중하…….”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그냥 편하게 해 주세요.”
여기서 두루뭉술하게 서로 존대하는 걸로 넘어가 버리면 앞으로 친해지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세연은 재빠르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러자 이연주는 물끄러미 세연을 보더니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도 이젠 불편하다는 말을 들을 나이네.”
“진짜 큰일 났다니까? 퀸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한 번 넣어 본 거고…….”
두 사람은 스물여섯 살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피아니스트들이었다.
결코 그 나이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젊은 인재를 발굴하는 목적이 큰 콩쿠르에 참가하기엔 슬슬 나이 제한이 다가오고 있긴 했다.
아홉 살 많은 선배들의 푸념 섞인 대화에 세연은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
난감한 시선으로 눈치를 살피자 양지은이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크게 웃더니 가볍게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럼 편하게 하자. 앞으로 얼마나 볼지는 몰라도.”
말을 놓은 건 좋은데 그 내용이 조금 섬뜩했다.
세연이 깜짝 놀라자 이연주가 인상을 쓰며 타박했다.
“애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진짜 미쳤나 봐.”
“우리가 먼저 떨어질 수도 있잖아?”
“그 소리였어?”
여기 있는 세 사람 중에 자신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세연은 당치도 않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연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지은도 이연주도 피아니스트로서 여러 무대에 올라 본 사람들이다.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누가 남고 누가 떨어지는가에 대해선 결국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걸.
“…….”
뭔가 진짜 피아니스트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알 수 있었다. 느낌이 달랐다. 이 두 사람은 승리도 패배도 수없이 겪어 단단한 정신력을 갖추게 된 베테랑들이었다.
세연은 그간 피아노를 전공하면서도 피아니스트를 만나 본 일이 적었다. 경력도 짧고 일반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러시아에 있는 친구들이 있고, 타티아나나 에르네스트는 정말 같은 또래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실력을 차치하고 마인드나 멘털리티가 피아니스트로서 완성된 사람들을 보는 건 조금 신비로운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커피나 한 잔 마실까?”
먼저 제안한 건 양지은이었다. 세연은 그 옆에 따라붙으며 두 사람의 이력을 떠올렸다.
노르딕, 제네바, 맨해튼, 파데레프스키, 리즈…… 굵직한 콩쿠르들만 해도 이 정도였다.
게다가 콘서트를 했던 장소를 따지자면 더더욱 대단했다.
예술의 전당, 패서디나 컨벤션 센터, 게반트 하우스, 위그모어 홀 같이 어느 한 곳에만 서도 소원이 없을 것 같은 곳들뿐이었다.
양지은과 이연주는 자기들은 열일곱 살 때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서로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세연은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저 정도 커리어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커리어를 보자마자 정말 긴장되었지만 그래도 잘 견뎌 보려고 했었다. 박 교수의 소개이기도 하고, 분명 좋은 사람들일 테니까.
하지만 양지은과 이연주는 그저 좋은 선후배로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몇 주 후면 한 콩쿠르에서 경쟁자로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세연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대등한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축되고 만다.
그리고 움츠러든 연주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등하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험도, 커리어도, 실력도 모든 것이 모자랄 것이 뻔했다.
이전까진 청소년 콩쿠르에만 출전했었기 때문에 느껴 보지 못했던 위압감이었다.
진짜 성인 피아니스트들과 공정하게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약간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직접 신청서를 넣었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연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 마실래?”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2,500원…….”
“얘 좀 봐? 감히 지갑을 꺼내? 그거 빨리 안 집어넣으면 혼난다!”
“그, 죄송합니다…….”
깜짝 놀란 세연이 허둥지둥 지갑을 집어넣자 양지은은 자기 카드로 한 번에 커피 세 잔을 계산했다.
그러고는 호출 벨을 받아 들고 빈 테이블을 찾아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전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지만 세 명이 앉을 만한 테이블은 꽤 있었다.
“…….”
자리에 앉고 나니 급격히 어색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 자리가 어색한 건 비단 세연뿐만이 아니었다.
쾌활하게 나서서 말도 놓고 커피도 사 주고 있긴 하지만 지금 양지은은 어떻게 하면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느라 열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세 사람 사이에 있는 연결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박 교수님은 어떠셔? 못 뵌 지 한참 되었는데. 잘 지내시지?”
“예, 잘 지내세요.”
“그래, 다행이다. 그것도 다 네 덕분이겠지.”
약간 아련한 목소리였다. 그 묘한 어투를 세연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받는 것만 하더라도 벅찼다. 세연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보다는 종혁 오빠 덕분인 것 같아요. 자주 보니까…….”
“종혁? 혹시 김종혁 말이니?”
“예? 아, 맞아요.”
“어라, 걔 피아노 아직 쳐?”
양지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세연 역시 놀랐지만 곧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그래서 세연은 고개를 저으며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
“아뇨……. 다른 일 하시는데 그래도 자주 오는…… 아, 그래도 피아노 가끔 치긴 해요! 제 레슨을 봐주기도 하고요.”
“뭐라고?”
진짜로 놀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세연이 무슨 말을 해도 양지은은 리액션이 좋았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뭔가 공감대를 쌓고 친해지자는 분위기였는데 무슨 근황을 전하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라는 바람에 대화를 이어 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때 가만히 있던 이연주가 살짝 분위기를 전환하며 다시 세연에게 말을 걸었다.
“박 교수님은 이런 제자가 들어와서 얼마나 기쁘실까? 열일곱에 퀸 엘리자베스라니.”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통과했데? 진짜 천재인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요……! 73명이나 되는데…….”
“그중 네 또래는 다섯 명도 안 되는 거 알아?”
다시 두 사람은 호들갑스럽게 세연을 칭찬했다. 그건 확실히 세연도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일이었다.
대부분이 20대인 콩쿠르에서 참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나이가 적다는 게 심사에 영향을 끼치진 않을 테니 결국 유리할 건 하나도 없다.
기분이 위아래로 요동을 치는 가운데 양지은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했다.
“세연이 또래라고 하니 생각나는 애들이 있긴 하네.”
“아, 그 러시아 애들?”
“응.”
“걔들은…… 그치, 10대 같지가 않더라. 뭘 먹고 어떻게 연습하길래 그러지?”
이연주 역시 똑같은 아이들을 생각했는지 어이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특히 타티아나라는 애가 음반 낸 거 들어 봤어?”
“당연하지. 난리였잖아.”
세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도 정말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이 타티아나 쪽으로 흘러갔다.
경쟁자를 분석하자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가질 수 있는 순수한 감탄만이 있었다.
요즘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타티아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세연은 입을 열었다.
“저 그 애랑 얼마 전에 통화했었는데요…….”
“뭐!?”
“진짜!?”
그 반응을 보고 나서야 세연은 타티아나와의 친분을 굳이 알린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세간의 평가에도 덤덤하고 자신의 음악에 몰두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세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애를 따라가겠다는 마음으로 지금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언제쯤 그 어른스러움까지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