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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54화 (1,054/1,277)

##  1054화

약간 난데없이 타티아나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걸 마치 자랑처럼 이야기한 느낌이 들어서 세연은 약간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얼버무리고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만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 밝히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더 이상했다.

‘차라리 지금 말하는 게 낫지.’

어차피 벨기에에 가면 다 같이 만날 사이였다.

그때 세연은 자연스럽게 타티아나와 인사할 테고, 또 여기 있는 두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순간이 생길 것이다.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상황이 난처해진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명백해졌다.

이왕 말한 김에 제대로 타티아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물론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그녀의 명예나 평가에 영향이 가게 하면 안 되고, 되도록 깔끔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세연은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면서 혹시 실수하거나 경솔한 부분이 없었나 짚어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할 이야기들 역시 떠올려 보았다.

‘예쁘고, 실력 좋고, 집도 무시무시하게 크고…….’

당장 친구를 자랑하며 할 이야기들로 생각나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이 정도로는 타티아나라는 사람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그녀가 보이는 표정과 눈물은 세연이 이해하기에 너무나 복잡했다.

환희가 담긴 우울함. 말로 형언하자면 그런 이상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된다.

때문에 아직 세연은 타티아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작정 안아 주고 같이 있어 주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곤 했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평소엔 이렇게까지 깊게 고민하면서 대화하지 않는지라 머리가 아파 왔다.

「내가 저번에 궁금해서 찾아보니까 그 애 SNS 계정도 없던데. 완전 신비주의야.」

「신비주의라기보다…… 연주자 활동에만 집중하는 것 같던데.」

「그런가?」

세연이 고민하는 사이 양지은과 이연주는 타티아나에 대해 굉장한 호기심을 보이며 뉴스 등에서 사진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뉴스에서 그치지 않고 세연에게도 옮겨왔다.

「아무튼, 전화번호를 아는 거야? 언제 친해진 건데?」

「어, 처음 만난 건 재작년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였어요.」

일단 말을 꺼냈으니까 최고로 멋지게 이야기해 줘야지.

물론 억지로 포장하려 하지 않고 다시 떠올려 봐도 그때 타티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전 그게 살면서 처음 참가한 콩쿠르여서 진짜 고생 좀 했는데…… 그때 도움을 받았어요.」

「대박.」

「어떻게?」

두 사람은 한층 더 귀를 기울이며 세연에게 재촉했다.

그런데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리고리란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했었다는 걸 말해야만 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나중에 다시 말을 걸었을 때 갑자기 왈칵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고.

그런 이야기를 전부 하면 세연은 둘째 치고 타티아나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세연은 살짝 두루뭉술하게 말하기로 했다.

「다른 연주자들이랑 말이 안 통하니까 오해가 조금 쌓여 있었는데 타티아나가 중간에서 잘 이야기해 줬어요.」

「말 안 통하면 진짜 답답하지. 그때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지…….」

「그 마음 알아. 진짜로.」

해외 무대 경험이 많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었다.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모양이었다.

그때, 이야기에서 약간의 의문을 느꼈는지 이연주가 질문했다.

「잠깐만, 그럼 그 애랑 통화할 땐 어느 나라 말로 해?」

「영어요.」

「운이 좋았구나. 서로 맞는 언어가 있어서.」

이연주는 상황을 대충 알겠다는 듯 흐뭇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가끔은 해외에서 음악적 언어가 잘 맞아서 친해지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해서 친해지기 어려운 경우가 있거든. 뭐, 요즘은 번역기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번역기 최고야.」

「지은아 넌 아직도 1개 국어?」

「아닌데?」

그 질문에 양지은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들더니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한국어. 그리고 음악의 언어. 두 가지잖아.」

「어휴. 독일어 공부한다면서.」

「그 시간에 피아노를 한 번 더 치지.」

피아니스트로서 올바른 대답이긴 한데, 아무래도 핑계의 느낌이 없잖아 있다.

국제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려면 기본적으로 유럽 쪽 언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는 편이 좋았다.

세연은 언어의 힘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했다.

유럽인들은 다중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영어나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 하나만 해도 그럭저럭 말이 통한다.

클래식 강국인 독일의 언어를 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고.

물론 세연이 영어에 이어 세 번째 언어로 공부 중인 건 러시아어였다.

이유라면 러시아 역시 클래식 강국이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사실 마음속 제대로 된 하나뿐인 이유는 타티아나와 조금 더 잘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나 진짜로 그 애 좋아하네…….’

타티아나가 행하는 영향력은 세연의 피아니즘뿐만이 아니라 공부의 방향을 정해 줄 정도로 막강했다.

세연도 모르지 않았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 세연은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뮤지션이나 배우 등에게 영향을 받는 건 평범한 일이었다.

세연은 이것 역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세연은 타티아나를 그저 우상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따라잡아 나란히 볼 친구로 여긴다는 점이었다.

「…….」

지금도 둘 사이의 격차는 뚜렷하다.

하지만 세연은 타티아나에게 이어져 있는 빛나는 선이 길게 늘어져 자신의 발치까지 와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무척이나 길고 구불구불하지만, 결국 이 선을 따라가면 타티아나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그건 처음 타티아나의 눈빛을 보자마자 느꼈던 것이었다. 세연은 이 아이를 뒤쫓아 붙잡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게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지는 잘 안다.

세상엔 강한 피아니스트들이 굉장히 많고,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두 사람만 하더라도 세연보다 훨씬 더 뛰어난 프로들이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이 빛나는 선이 보이지 않겠지. 세연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튼.」

세연이 잠깐 생각하는 사이, 다중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떠드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세연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연주의 시선엔 강렬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세연이는 타티아나랑 같은 나이라서 친해졌나 보네.」

「그렇긴 한데…… 아마 나이 차이가 났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을 거예요.」

「그래? 하긴 외국 애들은 열 살 차이는 차이로도 안 치니까.」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말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이 두 사람 앞에서 음악적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금 부끄러웠다.

그렇게 세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양지은이 기지개를 쭉 켜며 웃었다.

「진짜로 부럽네……! 그 애랑 친구라니. 나도 벨기에 가서 그 애 만나면 친해질 수 있으려나.」

「러시아어도, 영어도 못 하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에겐 번역기가 있는데.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1번을 대체 어떻게 연습한 건지 꼭 물어보고 싶어.」

양지은은 단기간에 급부상한 신예 피아니스트에 대한 흥미도 느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들었던 대단한 음악에 대한 확인을 더 우선시하는 것 같았다.

세연은 그 기분이 어떤지 안다. 세연 역시 타티아나의 음반을 듣고는 충격을 금치 못했으니까.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묻고 싶은 게 있으시면 통역도 해 드릴 수 있어요.」

「우와, 진짜로?」

「저도 잘 못 하긴 하지만요…….」

불안하게 어물거려도 양지은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웃었다.

이미 그녀의 눈빛은 거의 불타오르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타티아나를 만나기 전에 그녀의 음반을 반복해 들으면서 미리 예습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세연은 여기에서 멈추는 게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관심은 세연이 아니라 타티아나에게 모두 쏠려 있다. 이참에 아예 제대로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 타티아나에게 전화해 볼까요?」

「어? 괜찮아?」

「저도 물어볼 게 있어서요.」

길게 통화할 생각은 없다. 그냥 목소리만 잠깐 들려주고 할 이야기가 있다면 짧게 통역만 해 줄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이 두 사람도 타티아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하겠지.

세연은 자신이 아는 그녀의 더 깊은 부분에 대해선 감추며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모습만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

세연은 스마트폰을 들고 타티아나의 개인 전화번호를 화면 위로 띄웠다.

순간 손가락이 멈칫했다.

세연은 자신이 뭔가 실수하고 있나 생각해 봤으나 다시 생각해 봐도 차라리 지금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낫다는 판단만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세연은 살짝 목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자 살짝 불안해졌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가끔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서 창피를 겪는 일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세연은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조금 기다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 일이세요? 세연.}

평소와 달리 살짝 빠른 어조였다. 곧장 용건부터 묻는 그 말에 세연은 살짝 당황했다.

그래도 당장 바쁘다고 내치는 느낌은 아니라서 세연은 조심스레 말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다름이 아니라…… 나 지금 같이 콩쿠르 나갈 피아니스트 선배들 만나고 있는데 네 이야기가 나와서.}

-{아, 그런가요?}

{음반 수록곡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게 있으시다는데…… 물어봐도 될까?}

그렇게 이유를 대자 갑자기 저편에서 후 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난데없이 음악 이야기를 물어서 화라도 난 걸까? 타티아나 정도 되면 이런 전화를 수없이 받았을 테니 질렸을지도 모른다.

그냥 없던 일로 할까 싶어 세연이 수습하려던 찰나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와 달리 차분하고 상냥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아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 깜짝 놀랐네요.}

{어? 무슨 큰일?}

-{세연은 항상 시차를 생각해서 전화를 거시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급한 것 같아서…….}

{엑.}

그 말에 세연은 헛숨을 들이켰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상한 소리를 뱉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니 양지은과 이연주는 무슨 일이냐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 전화가 문제가 아니었다.

{잠깐만…… 타티아나, 거기 지금 몇 시야?}

잠시 웃음소리가 흐르더니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곧 6시네요.}

{아침?}

-{예. 좋은 아침이에요.}

그 인사에서 비꼬는 의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연은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에 누가 새벽 6시부터 전화를 한단 말인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세연은 바람처럼 빠르게 말했다.

{응, 좋은 아침이야! 그럼 이만 끊을게!}

그리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는 두 사람도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았다.

영어를 잘 못 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건 회화가 안 될 뿐이지 단어 정도는 알아듣는다.

「아, 시차가 있지…….」

이연주가 중얼거렸고 세연은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피아니스트 선배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만 시차도 고려하지 않고 전화한 건 실수였지만, 당황해서 다짜고짜 전화를 끊어 버린 건 굉장한 실례였다.

‘어쩌지…….’

다시 전화해서 사과하는 것도 정말 우습다.

그렇다고 이대로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세 사람 다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세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누가 걸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연은 사형 선고를 받는 기분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타티아나가 버럭 화를 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걸려 온 건 화상 통화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혼날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세연은 각오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

타티아나가 화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다가 전화에 깼다면 부스스한 모습이어야 할 텐데, 생각과 달리 그녀는 단정한 모습에 크림색 숄을 걸치고 있었다.

가만히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그 표정은 어쩐지 현실의 사람 같지 않게 느껴져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긴장하고 있는 사이 타티아나가 냉랭하게 한마디 했다.

-{갑자기 끊지 마세요.}

{미안해…….}

-{놀랐잖아요.}

할 말이 없어서 세연은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화를 낼 땐 제대로 내더라도 결코 길게 끌고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저 연습 중이었거든요.}

{연습 중? 진짜로?}

-{여기 보세요. 피아노잖아요.}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을 조금 더 멀리 떨어뜨려 주변을 보여 주었다. 정말로 그녀의 앞에 피아노가 있었다.

일전에 타티아나의 집에 가 본 적이 있는 세연은 저곳이 별관의 연습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별관으로 뛰어가더라도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정말로 그녀는 이 시간에 연습실에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이연주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 애 연습 중이었다고?」

목소리가 들렸는지 이번엔 반대로 타티아나가 관심을 보였다.

-{아, 그리고 다른 분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셨죠? 저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도 했고…… 잠깐 인사해도 될까요?}

{그, 그럴래?}

타티아나도 지금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먼저 나서 줄 줄은 몰랐다.

아마 단번에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신의 상황을 고려해 주는 듯했다.

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끼며 세연은 스마트폰을 옆으로 놓아 맞은편 테이블도 보이게 했다.

두 사람을 확인한 타티아나는 잠시 멈칫했다.

상황을 바꿔 만약 타티아나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러시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지……. 세연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곧 차분하게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세연의 친구예요.}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 정중한 인사에 양지은과 이연주는 간신히 답했다. 아까 전만 해도 흥미로워하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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