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5화
박 교수님도 너무하신 것 아닌가?
제자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시키게 되었으니 적어도 같이 갈 수 있는 곳까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연주가 단적으로 느낀 생각은 슬픔과 안쓰러움 등이었다.
퀸 엘리자베스라면 세계의 수많은 국제 콩쿠르 사이에서도 요구하는 수준과 까다로움이 최고로 높아서 어지간한 경험이 있는 피아니스트들도 픽픽 떨어져 나가는 콩쿠르였다.
이연주는 그런 곳에 이제 겨우 열일곱 살 된 아이를 내보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박 교수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리고 큰 걸 바란 건 아니겠지.
그냥 간만에 큰 콩쿠르가 두 개나 겹치는 해이니까 하나쯤 참가해서 경험을 쌓고 오라는 것이 목표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퀸 엘리자베스는 너무 특별한 콩쿠르였다. 절대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다.
이연주는 세연이 너무 무시무시한 콩쿠르와 마주해서 꺾여 버리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해 본 자신조차도 퀸 엘리자베스는 무서울 지경이었으니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만나긴 했는데…….’
세연의 연주 영상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콩쿠르 수상 경력 등의 커리어를 보고 걱정이 든 이연주는 친구인 양지은을 데리고 세연을 만나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세연은 딱 그 나이대로 보이는 귀여운 고등학생이었다. 심지어 학교도 일반고라고 했다.
올려다보는 눈빛엔 선망이 가득했고, 이따금 불편한지 꼬물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이긴 했지만 곧 퀸 엘리자베스의 무대에 이 아이가 올라간다는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연주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연에게 실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진짜…….’
사이를 따져 보자면 박성재 교수에게 사사한 적이 있는 이연주의 먼 후배쯤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만 놓고 본다면 세연은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는 라이벌 피아니스트였다.
선배로서 생각해도 어려웠다. 세연을 그냥 귀여운 후배로 봐야 할지, 오롯한 피아니스트로 봐야 할지.
물론 정답은 피아니스트로 대하는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세연은 이미 이연주와 양지은을 베테랑이라고 생각하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세연이 더 불안해질 테니까. 적어도 세연 앞에선 산전수전 다 겪은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연주는 골머리를 앓았다.
‘스물여섯 살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이연주는 자신이 그렇게 어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렵고.
‘그래도 지은이를 데려오길 잘했어.’
다행히 양지은이 즐겁게 대화를 이끌었고, 세연도 붙임성 있는 성격이라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세연은 두 사람을 칭할 때도 선배라 하며 잘 따라 주었다. 그냥 귀여운 후배 포지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태도가 일순 변화한 건 바로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나오고부터였다.
‘의식하는 아이가 있는 건 중요하지…….’
세연은 아무 생각 없이 교수님이 시켜서 선배들 따라 콩쿠르에 참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곳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주제로 나오자 어쩔 수 없이 세연은 그녀와 친분이 있음을 밝히긴 했지만, 속내는 이렇게 가볍게 드러내기 싫어하고 있다는 걸 이연주는 눈치챘다.
아까와 달리 지금 세연이 보이는 눈빛은 조금 더 무겁고 진지했다.
만약 물어보더라도 그건 절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이연주는 피식 웃었다.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모여드는 콩쿠르에서 1등만을 노려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를 목표로 하는 편이 조금 더 확실한 동기가 된다.
세연의 라이벌 의식이 확실하게 살아 불타고 있는 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조건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분명 끝까지 견뎌 내고 무대에 설 것이다.
‘약간 특이한 경우긴 하네.’
세연과 타티아나의 상황을 이해는 했지만 그러고 나니 더욱 흥미가 생겼다.
일반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대상은 가까이 있는 친구가 된다. 같은 나라, 같은 학교가 그 울타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연은 멀리 있는 러시아에 있는 아이를 택했다.
심지어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타티아나는 세연과 물리적 거리뿐만이 아니라 음악계에서의 거리도 상당히 멀다.
물론 그런 거리는 목표를 멀리 두면 되는 일이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연의 경우가 무척 특이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왜 타티아나를 그렇게 의식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물어봐야 잘 물어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이연주는 일단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먼저 세연이 타티아나와 통화해 보겠다고 나섰다.
양지은은 대놓고 관심을 보였고, 이연주 역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단 타티아나와 대화를 해 본다면 어떤 사람인지 조금쯤 알 수 있으리라. 세연을 어떻게 대하는지 확인할 수도 있을 테고.
여러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이연주는 세연이 잡고 있는 스마트폰에 집중했다.
그러나 탐색을 목적으로 했던 전화 통화는 거꾸로 이연주와 양지은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아니…… 보통은 불편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새벽 6시에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난데없이 멀리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타티아나는 사정을 전해 듣고는 인사를 하고 싶다며 먼저 화상 통화를 걸기까지 했다.
그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세연이 일방적으로 타티아나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타티아나 쪽에서도 이쪽을 탐색하는 듯한 분위기가 보인다.
늘 뉴스나 영상 등에서 본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바라보는 시선만 기억하는 이연주는 그 시선을 직시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타티아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세연에게 맞춰 사려 깊게 행동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연주와 양지은의 입장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모습과 묘하게 안도하는 눈빛. 그 모든 것이 이연주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저기…….}
하지만 계속 침묵하면서 서로를 탐색할 순 없었다. 일단 먼저 전화를 해서 실수를 한 건 이쪽이니까 사과가 우선되어야 했다.
이야기를 꺼낸 건 세연이었지만 이연주는 책임을 떠넘길 생각이 없었다.
{일단 제대로 소개를 하자면 전 이연주고, 여기 이 친구는 양지은이에요.}
-{……반갑습니다.}
{이른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우리끼리 이야기하다가 흥분한 나머지 시차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괜찮아요.}
화면 너머 타티아나는 숄을 여미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고, 먼저 소개를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있어 보니 그녀도 마냥 편하기만 한 건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눈을 마주하자 타티아나가 옅게 웃어 보였다.
아까와 달리 이연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통한 아이 콘택트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연주는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양지은 역시 비슷한 관심을 느끼는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아침부터 연습하는 거 대단하다고 전해 줘.」
「직접 말하면 되잖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간단한 영어인데도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진짜로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약간 어색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녀의 말은 세연이 대신 통역해 주었다.
{아침에 연주하는 거 대단하대.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6시면 너무 이르지 않아?}
-{주말이라 그런지 잠이 일찍 깨서요.}
{보통은 주말에 더 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타티아나는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자신이 조금 특별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는 투였다. 이연주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아연해졌다.
정말 열일곱 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했다. 세연이 타티아나의 무엇을 보고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이연주는 이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건 아쉽다는 생각에 양지은을 재촉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며. 빨리.」
「아, 라흐마니노프? 그런데 지금 물어봐야 하나?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데.」
모처럼 분위기가 좋으니 음악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고 지금은 타티아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양지은은 그녀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라흐마니노프란 이름을 알아들은 타티아나는 그것을 그냥 넘겨듣지 않았다.
-{아까 듣기로 제 음반 수록곡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다고…….}
{응, 맞아. 지금 괜찮아?}
-{물론이죠. 어떤 곡인가요?}
세연이 묻자 양지은의 눈빛이 일변했다.
타티아나는 단순히 세연의 친구가 아니라 두 장의 음반으로 클래식 음악계에 격변을 일으킨 혜성 같은 신예였다.
그런 피아니스트와 음악 이야기를 하기 싫을 리 없었다.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1번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듣고 싶어서. 정말 인상적이었거든.」
그대로 전하자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변했다.
-{연구를 많이 했어요. 앞선 두 곡과 달리 제가 수록하고 싶어서 준비한 곡이었거든요. 연습에 매달리고 레슨을 많이 받기보다는 다양한 레퍼런스를 접하려 애썼죠.}
연습과 레슨에만 집중해도 완성하기 힘든 곡인데. 타티아나가 지닌 피아니스트로서의 기량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양지은은 레퍼런스라는 말을 듣고 그것이 음반이냐고 물었고,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원작도 다시 연구하고……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과 구노의 파우스트 오페라도 들어 봤어요. 같은 작품을 두고 여러 음악가가 어떤 시각으로 재해석했는지 파악하면서 제가 해야 할 음악을 찾아낼 수 있었죠.}
이연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타티아나의 음반을 들으면서 대체 어디서 이런 피아니스트가 튀어나왔나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뒤에 있는 선생과 프로듀서가 그 음반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력 자체는 물론 타티아나의 것이겠지만, 레퍼런스가 되어 준 건 다른 누군가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연구한 건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뿐만이 아니었다.
괴테는 물론이고 리스트와 구노의 이름까지 나오는 걸 보며 이연주는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타티아나는 정말 수준 높은 연구를 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다.
앞서간 선배들의 자취를 쫓아가 제대로 짚어 보고 자신의 노트에 쓸 줄 안다.
음악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능력도 갖춰져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 했다. 그건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정말 귀중한 재능이었다.
그저 다른 연주를 듣고 따라 연주하다가 자기 스타일에 더 어울리는 연주를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는 타티아나처럼 깊고 철저하게 연구하는 연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대단하네.」
양지은도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감탄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난 건데…… 예원학교에서 유명한 후배 중에 윤이상 콩쿠르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치고 1위 한 후배가 있는데, 그 아이가 요즘 단테의 신곡을 그렇게 읽는다고 하더라고.」
「신곡? 단테 소나타라도 치나?」
「그렇다던데?」
예원학교라면 중학생인데…… 신곡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치하고, 음악 연구에 원전을 가지고 온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정말 세상엔 천재들이 많구나.」
그런데 그때, 그냥 넘어갈 순 없다는 듯 세연이 끼어들어 보탰다.
「단테 소나타라면 타티아나도 친 적 있어요.」
「……뭐? 진짜?」
「네. 작년에 모스크바 가을 연주회에서.」
파우스트 소나타에 단테 소나타……. 저 나이에 한 곡만 치더라도 대단한데 그 난곡들을 어떻게 다 익혔는지 모르겠다.
이연주는 어이없어하며 화면 너머의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세연이 딱히 말을 전해 주진 않았지만 지금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상황 판단이 가능한지 타티아나는 약간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연이 무작정 친구 자랑을 하는 데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연주는 처음으로 타티아나의 인간적인 표정을 본 것 같아서 조금 즐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