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6화
어쩔 수 없이 타티아나를 여기 있는 두 사람에게 미리 소개시켜 주어야만 했지만 세연은 이야기를 굉장히 아꼈다.
사실 작년 가을엔 모스크바에 가서 울고 있던 타티아나를 위로해 주기도 했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연은 더 이상의 깊은 이야기는 공유하기 싫었다.
타티아나의 개인적인 사정이 엮여 있기도 했지만, 그걸 굳이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나오는 음악 이야기는 정말 딱 좋은 주제였다.
「그뿐인 줄 아세요? 단테 소나타 치기 전에 쳤었던 곡은 고도프스키의 엘레지였어요. 한 손만으로 치는 곡이더라고요.」
「아, 그 곡 나도 알아. 사운드 만들기 정말 힘들던데.」
타티아나의 레퍼토리와 실력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을 주제로 삼으면 쉽게 감탄을 끌어내고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보다 복잡한 이야기는 할 필요 없다.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예 대놓고 친구 자랑에 나섰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눈치를 채고 난처해하던 타티아나는 결국 세연에게 부탁했다.
-{그만해 주세요……. 솔직히 지금 좀 부끄러워요.}
{아하하하, 더 해야지.}
-{세연…….}
괜히 장난스럽게 웃으며 청개구리처럼 굴자 타티아나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만 더 할까 싶었지만 이렇게 화를 내지도 않고 한숨만 쉬면 계속 이어 나가기도 애매했다.
세연은 이쯤 하기로 하고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너랑 알고 지내는 거 말하지 않고 있다가 벨기에에 가서 말할까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역시 그냥 말하길 잘한 것 같아.}
-{저도 벨기에에 가기 전에 연락 한 번 더 하려고 했어요. 타이밍이 좋았네요.}
{타이밍이 좋다고 해 줘서 고마워.}
그쪽 시간으론 새벽 6시. 절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기분 나빠 했다면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연은 약간의 부채감까지 느꼈다.
어떨 땐 정말 현실주의자 같은 시선으로 냉정한 말을 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티아나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다.
작년 기억을 살짝 떠올린 세연은 빨리 타티아나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볼 수 있다는 현실에 무척 행복해졌다.
{그럼 다음에 보는 건 벨기에에서겠네?}
-{그렇겠네요. 후후.}
{아나스타샤도 있고…… 다른 러시아 연주자들도 많던데, 그중에 친한 사람 있어?}
-{글쎄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살짝 들고 생각하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 인맥은 그리 넓지 않아서.}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그동안 계속 피아노만 치면서……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도 못 하고 살았거든요. 방에 틀어박혀서 피아노와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었죠.}
지금 타티아나가 손에 쥔 기량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많은 걸 희생하고 투자해서 만들어 낸 정수인 것이다. 피아노에 있어선 굉장히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태도가 생각난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게 많이 후회가 되네요.}
얻어야 할 걸 다 얻고 나니까 후회된다고 함은, 듣기에 조금 치사하게 들린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지금 장난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놓치고 온 것들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연의 입장에선 조금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에이, 학교에 친구들 많잖아? 내가 다 아는데.}
-{그건 그 아이들이 절 뜯어고쳐 준 거예요. 후후, 그래서 요즘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 타티아나는 세연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싫다고 딱 잘랐었다.
그전에 세연을 도와준 걸 보면 본 성격이 착한 건 맞지만 사람을 꽤 가리는 타입이었음이 분명했다.
세연이 가만히 듣고만 있자 타티아나는 낮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그러니 세연은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두 분이랑 친하게 잘 지내 주세요. 세연이 걱정되어서 와 주신 분들이잖아요?}
친구에게 하는 말치고는 약간 묘하다. 하지만 이전에도 타티아나는 종종 이렇게 언니 같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연도 한 번 하기로 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지만, 타티아나는 한술 더 떠서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연주 씨. 지금 제 말 듣고 계시죠?}
{어, 어?}
갑자기 부르자 멍하니 보고 있던 이연주가 깜짝 놀랐다.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세연을 잘 부탁드릴게요. 다 함께 벨기에에서 만나길 바라요.}
{그…… 그래요.}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세연이랑 벨기에에 오라고?」
단어로 맥락을 추측하며 양지은이 물었다.
친구를 소개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왜 그런 말까지 하는 거야?’
세연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은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것 같았다.
이연주는 당황했던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양지은에게 전했다.
「응. 벨기에에서 보자고 하네.」
「어쩌지? 음반들이라도 가지고 갈까? 사인해 달라고 하…….」
이미 오래전부터 타티아나의 팬이나 다름없었던 양지은은 그녀와 만날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추가 계획을 미처 다 마무리하기 전에 양지은이 갑자기 자기 허벅지를 때리며 말했다.
「잠깐만, 아니지.」
어차피 한국어로 말하고 있으니 타티아나가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양지은은 자신이 연주자로서의 무장을 너무 허술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날카롭게 눈을 떴다.
「초면에 기선 제압을 너무 당한 것 같네. 어쨌든 경쟁자인데 말이야.」
「그걸 이제야 떠올렸니?」
「이제라도 알았으면 된 거 아니야?」
관심 있던 피아니스트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기쁜 일이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이 너무 커지면 그것이 기량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걸 양지은은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좋아하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그녀는 고압적인 태도로 턱을 치켜들었다.
「저 애한테 전해 줘. 깜짝 놀랄 만한 연주를 보여 주겠다고.」
「다짜고짜 선전 포고하려고?」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니냐며 이연주가 말리고, 양지은은 얼른 전해 달라며 떼를 썼다.
두 사람을 보던 세연은 쓰게 웃으며 타티아나에게 적당히 이야기했다.
{선배들이 널 만나면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는데?}
-{후후, 기대할게요.}
카메라로 봐도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그녀는 약간 재미있어하기까지 했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진심으로 콩쿠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안다. 아마 참가자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녀는 기뻐하겠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강인한 그 마인드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며 세연은 웃었다.
{어쨌든…… 고마워. 시간 너무 많이 뺏었지? 이만 끊을게.}
-{다음에 또 연락해요, 세연.}
{응. 다음엔 시차 실수 안 할게.}
-{아하핫.}
아직도 신경 쓰고 있냐는 투로 타티아나는 가볍게 웃었고, 곧 화면 너머로 손을 몇 번 흔들어 보이고는 통화를 종료시켰다.
까맣게 된 화면을 잠시 보다가 세연은 스마트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 잠깐 지나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모임의 분위기는 한결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열정적이고, 조금 더 끈끈해졌다.
그건 이연주와 양지은도 느끼는 듯했다. 양지은은 픽 웃더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오늘은 연주가 같이 가자고 해서 온 것뿐인데 운이 좋았네.」
「그럼 이따 밥은 네가 사.」
「뭔 소리야? 커피도 내가 샀는데.」
불러서 나와 줬더니 커피도 사고 밥도 사는 건 좀 아니지 않냐며 양지은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연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녀에게 정말 모든 걸 덮어씌우려 했다. 단지 재미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사이좋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세연은 문득 자신 역시 타티아나와 사이는 좋지만 너무 일방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타티아나는 대부분 세연이 말하면 잘 들어 주는 편이었으니까.
세연이 가만히 있자 약간 걱정스러운 어투로 양지은이 물었다.
「왜 그래? 넌 오늘 얻어먹기만 하면 돼, 세연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단어를 고른 세연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살짝 보였다.
「오늘 타티아나를 자랑거리처럼 소개한 게 아닌가 싶어져서요……. 제가 잘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건 타티아나인데…….」
말로 하고 나니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오늘 이런 식으로 소개하면 안 되었던 것 아닐까.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연주는 한참을 웃더니 받아쳤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교수님이 네 자랑을 한 덕분인데?」
「예?」
「그럼 교수님이 그냥 냉정하게 부탁했다고 생각하니? 안 그런 척하시면서 은근히 자랑하시는 거 받아 드리느라 힘들었어.」
박 교수가 정말 기뻐했다는 건 종혁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연주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티를 내셨다는 건 미처 몰랐다.
사실 사람에 따라서 안 좋게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연주나 양지은이 조금 까칠한 사람이었다면 어디 실력 한번 보자며 팔짱을 끼고 세연을 시험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연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적어도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는 피아니스트로서 동등하게 봐 주려고 노력했다.
이연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네가 타티아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 덕분에 우리가 그 애와 이야기도 할 수 있었지. 이건 서로에게 엄청 이득인 거 아니야?」
마치 운이 좋았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세연은 지금 운이 좋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괜한 말을 더 할 필요는 없었다. 세연은 감사를 담아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네요.」
「응.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그런 어른스러운 모습은 정말 닮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세연은 부담감을 내려놓고 싱글벙글 웃으며 이연주와 마주했다.
그때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호출 벨이 울렸고, 양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받아 올게.」
「응.」
그렇게 양지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이연주는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세연아.」
「네.」
「타티아나도 널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더라.」
「……설마요?」
세연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되물었다.
하지만 이연주는 농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마치 세연에게 무언가 확인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눈빛만 봐도 알겠던데?」
「그, 그런가요?」
「교수님이나 타티아나나 널 정말 아끼고 있는 것 같아. 부러워.」
그 말을 들으니 예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팔에 찰과상을 입은 것만으로도 교수와 타티아나는 대경실색하며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그 정도로 당황해하고 화를 내는 걸 본 건.
세연은 그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도 교수님과 타티아나를 정말 좋아해요.」
이연주는 물끄러미 세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