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7화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난 길게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후…….”
잘했지? 이상하지 않았겠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도 난 한참 동안이나 몇 분 전을 돌이켜 보면서 무언가 잘못 이야기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에 세연을 잘 부탁한다고 한 건 조금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정말로 그 말이 하고 싶었다.
“…….”
이연주와 양지은 두 사람은 오래된 내 기억 속에 선배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삶에 치이면서 자연스럽게 잊어 가고 있었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 명단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 이름들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약간의 체념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피아노 연주자를 업으로 한다면 결국 어디서든 한 번쯤은 만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산이 아무리 크고 넓다고 하더라도 정상은 하나뿐이니까.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가지 않는 이상 우린 그 근처를 헤맬 수밖에 없는 부류의 인간들인 것이다.
때문에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 당황스럽거나 어찌할 줄 모를 기분이 들진 않았다.
그저 올 게 왔으니 이번엔 어떻게 얼굴을 마주해야 할까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연이 때를 앞당길 줄은 몰랐다.
‘이해는 하지만 정말…….’
모처럼 교수님이 주선해 주신 자리니 당연히 콩쿠르가 주된 주제였을 테고, 그럼 자연히 해외 참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인 내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만나서 소개할 생각이 있다면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고 해도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미리 메시지라도 하나 주었으면 했을 뿐이다.
새벽 6시에 무념무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는데 세연의 옆에 다른 연주자가 있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난 세연의 주변 음악가들과 이어진 사람들을 떠올렸다.
참가자 명단에서 미리 봐 뒀던 이연주와 양지은, 그리고 몇몇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가깝게 다가왔다.
언젠가 볼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타이밍이 이럴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가 될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웃으며 밝게 행동했다.
세연이 잠깐 전화를 끊어 준 건 내가 다시 정신을 잡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난 화상 통화까지 하면서 인사를 할 정도로 안정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지 실제로 보고 싶기도 했고.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할 정도니 물론 연주자로서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겠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에 찾아오는 안도감은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교수님을 통해 새로 사귀게 된 선배들이라면서 약간 들뜬 것 같아 보이던 세연이나, 그런 그녀를 보며 귀여워하는 시선이 가득하던 두 사람은 정말 보기 좋았다.
심지어 이연주는 내 쪽을 향해 약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세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난 그런 마음 씀씀이가 무척이나 기꺼웠고, 때문에 조금 더 많은 말을 해 주었다.
앞으로도 다시 만날 때까지 저쪽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으…….”
뒤늦게 안심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선 자세를 바로 하기가 힘들었다. 난 비실비실 일어나 안락의자에 몸을 뉘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느낀다. 세상이 정말 좁다는 것을.
중앙음악학교엔 유학생들이 정말 많다. 그중 한승우를 만나 친해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선 임세연을 만났다.
그리고 학생이나 청소년이 아닌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도전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옛 기억 속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어디에서 또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며 방어적으로 위축되면 안 된다.
차라리 정면으로 갚아 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난 그것을 세연과 마주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은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잘 대화할 수도 있었고, 내 진심이 담긴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잘 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다.
음악가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조금 강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검은 새도 잘했다고 칭찬해 줄 것 같다.
“…….”
잠시 기력을 회복한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이런저런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음악에 집중하기엔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작정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내가 그곳에서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 증명해야 하는 것들. 그 모든 건 지금 내 손과 정신력에 달려 있었다.
어느 순간에나 난 아무 문제 없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어야 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피아노로 모든 것들을 납작하게 눌러 버리려고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난 보다 많은 것들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정말로 피아노가 가득 찼을 때, 비로소 난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건반을 하나 눌러 본 나는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내 소리는 매우 강하고 정갈했다.
***
12시가 조금 지났을 때, 세연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받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듣고 싶었다. 난 즐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타티아나! 점심때지? 전화 괜찮니?}
{괜찮아요. 연습하다가 쉬는 중이었어요.}
-{아, 식사는 했고?}
{아뇨, 아직.}
-{그럼 어떡해! 보아하니 아까 새벽부터 계속 연습한 것 같은데. 잘 먹어 가면서 해야지. 연주자들은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다짜고짜 밥은 먹었냐고 묻고 걱정을 해 주니 무척 안심이 된다.
난 조용히 세연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길게 변명하거나 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
{후후, 전화하고 나면 먹을게요.}
-{그, 그럼 내가 끊어야…….}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궁금해서 체할걸요?}
-{응? 이야기?}
{오늘 만난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 주시려는 것 아닌가요?}
지금 저쪽 시간은 오후 6시경이다. 이 시간에 세연이 전화를 걸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세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한 것을 내게 다시 말해 주고 싶어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미 처음에 내게 전화를 한 시점에서 이미 연결 고리가 생기고 말았다.
난 멀리 한국에 있는 세 명과 인사를 했고, 그들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세연은 그 부분에서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간단한 추리로 세연의 심리를 짚어 내자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곧 낮게 웃으며 수긍했다.
-{맞아. 방금 언니들…… 아니, 선배들이랑 헤어졌거든.}
{많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그…… 대화하다 보니까.}
{살갑게 부르시는 것 같아서 좋아요.}
-{조, 좋아? 그렇게 느낄 것까지는…….}
모처럼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사람들이니 호칭이 편해진 건 좋은 징조였다.
세연은 물론이고 이연주와 양지은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오래도록 잘 지냈으면 한다.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전해졌는지 세연은 약간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허둥지둥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대화 끝나자마자 너한테 다시 한번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게 이렇게 늦어졌네.}
{무슨 대화를 나누셨나요?}
친해지기만 하면 다른 건 상관없다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화 내용이 궁금했다.
물론 세연의 대답은 예상에서 전혀 빗나가지 않은 평범한 내용이었다.
-{콩쿠르가 제일 중요했지. 거기에 가서 지내는 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드레스나 곡 준비는 또 어떻게 했는지…….}
하나하나 꼽듯 말을 이어 나가던 세연은 문득 이런 걸 세세하게 이야기해 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난 솔직히 언니들이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 줄 거라고 기대했었어. 아마 박 교수님도 그래서 나랑 만나게 해 주신 것 같았고.}
아마 그렇겠지.
교수님은 세연을 굉장히 아끼신다. 그리고 지도하는 분으로서 세연에게 해 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일단 레슨은 기본적인 것이고, 그다음은 콩쿠르에 대한 긴장 완화다.
세연은 해외 경험이 많긴 하지만 퀸 엘리자베스 같은 큰 콩쿠르는 처음이다. 당연히 긴장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실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교수님은 그 긴장을 최소화하는 데에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는 제자들을 활용하는 편이 낫다는 걸 아시는 분이다.
아홉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동성 선배들이 도와준다면 제일 좋다.
세연이 의지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경쟁심을 느끼기에도 좋았다. 난 교수님의 선택이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요?}
-{막상 이야기를 해 보니 언니들도 다들 어려워하더라고.}
그런데 아홉 살로는 모자랐나 보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듣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세연이 그 설마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퀸 엘리자베스는 너무 특별한 콩쿠르니까…… 공통 지정곡 연습도 너무 어렵고, 버려야 할 곡들도 있다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골치가 아프다고. 아하하, 그 이성적인 것 같던 연주 언니도 욕을 하더라니까?}
{오…… 그래요? 세연은요?}
-{당연히 나도 덩달아 합세하……. 아니, 갑자기 뭘 물어보는 거야!?}
내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세연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묻지 마! 그런 건.}
{궁금한걸요.}
-{상스럽잖아!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 아무튼! 다 같이 콩쿠르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친해졌다는 거야.}
{후후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 악명에 걸맞게 어려운 콩쿠르였다. 그 어려움을 알면서 도전했기에 아무 불평도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힘든 건 힘든 거니까. 때문에 세 사람은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겪은 고난과 역경을 이야기하며 푸념 콘테스트를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웃겼다.
이연주와 양지은이 어른스럽게 굴었을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하지만 나도 그 자리에 끼지 못해서 조금 아쉽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세연은 약간 부끄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교수님은 아마 이런 걸 바라지 않으셨을 거야……. 언니들의 경험담을 듣고 내가 자신감을 얻길 바라셨을 텐데…… 다 같이 힘든 이야기만 나눈 것 같네.}
{6시간 동안이나요.}
-{윽…….}
신음을 흘린 세연은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난 사실대로 순수하게 이야기해 준 세연이 고마웠다. 그녀를 놀리거나 가르치려 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야기했다.
{하지만 전 그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응?}
{참가자로서 힘든 건 모두 마찬가지라는 걸 확인하셨잖아요?}
오래된 음악을 되살리는 연주자들의 기량을 뽐내는 클래식 콩쿠르 특성상 나이와 경험이 많고 노련한 연주자들이 조금 유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이 제한인 30세에 다다른다 하더라도 참가자인 한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심리적으로도 같은 위치에 서게 된 거예요.}
내 말을 듣고도 세연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마음의 변화가 있는 듯했다.
난 그녀가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느끼며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세연은 앞선 대화를 떠올리는지 중얼거리며 말했다.
-{설마…… 나 때문에 연주 언니가 일부러 더 힘들다고 말한 건가?}
{아뇨, 아마 힘든 건 진심이겠죠.}
-{어?}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난 나지막이 웃으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세연은 뭔가 아리송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말에서 조금 용기를 얻은 듯했다.
약간 주저하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너도 준비하는 거 힘들었지? 타티아나.}
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나요? 당연하죠. 제가 오늘 새벽부터 연습하는 것 보셨잖아요?}
-{아, 그렇지.}
{전 정말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있어요.}
자격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난 할 수 있다면 망망대해에서 세연을 이끄는 작은 부표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 역할이 있기에 난 심해로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 수 있기도 했다.
세연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