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8화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경호원들은 평소처럼 날 학교까지 데려다주었지만 난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어지간해선 혼자서 학교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그러고 싶었다.
멀리 갈 것까진 없다. 학교 뒤편의 길을 따라 나와선 오른쪽으로 돌아 쭉 내려오면 금방이었다.
큰 도로가 보이는 이 삼거리는 아르바츠카야역에서 학교로 오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만약 역에서 오는 아이를 만나고 싶다면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사람들이 많네.’
삼거리 옆엔 작은 벤치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몇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신문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도 앉아서 기다릴까 싶었지만 건물과 나무가 벤치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햇살을 느끼고 싶었던 나는 일부러 약간 도롯가로 나와 가로등 근처에 섰다.
불 꺼진 가로등 대신 화사한 햇살이 가득하다. 4월도 벌써 중순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쌀쌀했던 날씨는 하루가 지날수록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등이 따뜻해지니 노곤하게 잠이 오려고 한다. 길
거리에 서서 꾸벅꾸벅 졸았다간 어디선가 보고 있을 빅토르에게 혼이 날 테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
가로등을 기준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균등하게 전신에 햇빛을 받았다.
걷고 있으니 잠도 안 오고, 마치 레이더처럼 이 부근 전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인간 레이더가 된 지 몇 분쯤 지났을까.
슬슬 레이더가 아니라 햄스터 같다는 기분을 느낄 즈음, 난 눈에 익은 여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
손을 흔들며 부르자 무표정하게 걸어오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깜짝 놀란 것 같다.
그 표정만 봐도 이렇게 나온 의미가 있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깜짝이야……. 왜 여기 나와 있니?”
그러면서 그녀는 주위를 슬쩍 살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약간 의식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누군가 날 알아보고 말을 걸고 싶다면 걸겠지.
그럼 잠시 이야기하면 된다. 그걸 피하고 싶어서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난 오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같이 가고 싶어서요.”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차는 학교 주차장에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도로까지 걸어 나올 이유가…….”
“길게 묻지 말아 주세요.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요.”
“?”
내가 이유 없인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아는 아나스타샤는 의문을 표했으나 정말로 오늘은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녀가 일찍 보고 싶었을 뿐이다. 세연이 다른 사람들과 콩쿠르를 준비하는 것처럼 나는 아나스타샤와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여기 서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듯 학교 쪽으로 손짓했고, 난 그녀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주말엔 어땠나요?”
“계속 피아노 붙잡고 있었지. 스마트폰도 꺼 놨었어 아예. 방해될 것 같아서.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니?”
집중해서 연습하고 싶을 때 스마트폰을 끄는 것을 루틴으로 삼는 연주자들이 많다.
나도 그런 편이고.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아예 온종일 꺼 놓을 때도 있었다.
그건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주말에 다른 연주자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세연이 조금 부러웠을 뿐이다.
일단 난 그녀가 흥미 있어 할 만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럼 연락 못 받으셨겠네요?”
“응?”
“아델리나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저희 드레스가 다 완성되었다고요.”
“정말!?”
아나스타샤가 휙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언제 보러 가면 된대?”
“가급적 빠르면 좋다고…….”
“그럼 오늘 오후에 가자!”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어요.”
우리가 드레스를 부탁한 건 한 달도 더 전이었지만 그건 우리 입장이지, 아델리나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촉박한 일정이었다.
출발 전에만 받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며칠 여유를 둔 것을 보니 최선을 다해 힘써 준 모양이다.
아델리나에게도 정말 감사를 표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나스타샤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델리나가 보여 주었던 의상들에 대한 감상을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 같았다.
나 역시 기분이 좋은 건 마찬가지라 그녀와 말을 맞춰 주다가 물었다.
“나중에 호스트 패밀리 주소로 보내 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직접 가지고 가는 게 낫겠죠?”
“그렇지. 아무래도…… 불안하잖아? 시간 내에 안 오면 큰일인데.”
“짐이 많아질 거예요. 드레스 세 벌을 제대로 가져가려면.”
“어쩔 수 없지.”
갑자기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오니 살짝 고민거리들이 생겨난다. 난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내가 뭘 쓸 수 있는지 안다. 마음만 먹으면 난 아무것도 고민할 것 없이 모든 것들을 훨씬 편하게 만들 수 있다.
당연히 거기엔 아나스타샤의 편의 역시 포함되고. 하지만 그녀는 의문이나 불만 등은 전혀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말할 뿐이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다 우리처럼 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어떤 생각으로 임하고 있는지 잘 알겠다는 듯 말해 주는 것이 무척이나 고맙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녀와 마주했다.
이참에 세연에 대한 이야기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른 참가자들이라고 하니 생각나서 말인데요…….”
“어……?”
“주말에 세연과 통화했었어요.”
“세연?”
“왜 그러시나요? 아시잖아요?”
내가 의아해하자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대답했다.
“아, 알지. 세연 임. 참가자 목록에 있었잖아. 그전부터 그 애는 참가한다고 말해 왔었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아나스타샤는 이내 재미있겠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작년에 미국 텍사스에서 세연과 같은 콩쿠르에 나갔던 적도 있다.
그러니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녀와 나란히 평가받는 두 번째 자리였다.
“거기 가면 보게 되겠네?”
“예. 그래서 세연이 콩쿠르로 알게 된 다른 연주자들을 미리 인사시켜 주고 싶었는지 전화를 해 왔었어요.”
표면적인 이유는 내 음반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당연히 그게 본래 목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양지은과 이연주를 일부러 마주하고 인사했던 건 내가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세연을 배려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한 아나스타샤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세연의 친구들이랑도 인사한 거야?”
“친구보단 선배이지만요.”
“그래?”
아나스타샤가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콩쿠르 참가자들의 명단을 보면서 73명의 전력을 미리 파악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감탄과 경계가 섞인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참가자들 보니까 한국인 정말 많더라. 10명도 넘던데?”
“예, 맞아요.”
73명 중 한국인만 14명이다. 굳이 정확하게 짚어 주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는 팔짱을 끼고 걸으며 이어 말했다.
“우리 학교에도 유학생 많잖아? 한승우처럼 대단한 녀석도 있고……. 가끔 다른 콩쿠르나 연주회에서도 정말 많이 보이더라고. 은근히 클래식에 강한 나라야.”
클래식 음악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 국가들이 독식할 수 있는 문화는 아니었다.
문화적 토양은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피아노에 대표적으로 강한 나라는 독일과 러시아 정도다. 하지만 최근 한국 같은 동양 국가의 약진이 굉장히 돋보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에 대해서 깔끔하게 인정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인정한다는 말은 즉, 그보다 강하고 단단한 자부심이 그녀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였다.
난 그녀가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느끼며 살짝 떠보았다.
“우리 참가자들도 그 정도는 되죠?”
“응, 그랬었지.”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올려다보니 그녀가 약간 주저하며 물었다.
“타티아나, 그중에 말이야…… 렌스키 로마노비치 있었던 것 기억해?”
존중하는 경어가 아니라 지극히 거리를 두는 어투였다.
당연히 기억한다.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 카즈호프 인터내셔널의 후원을 받는 유명 피아노 연주자다.
작년에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가 주최한 연주회에서 같은 무대에 설 뻔했지만, 결국 불화가 생겨서 그가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난 그에게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 하지만 참가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본 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명단에 있었죠.”
“아무 연락 없었지?”
“연락이요?”
나도 모르게 약간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가 내게 연락을 할 것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했어야 했다. 지금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자니 한 가지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아나스타샤에겐 했어요?”
“어……. 어제 연습 끝나고 저녁에. 스마트폰 켰더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약간 놀랍긴 했다. 내 개인 번호를 모르니 아나스타샤의 번호를 찾아 연락을 한 모양이다.
“이제 와 전화를 왜? 그럴 이유가 있나요?”
사실 나보다는 아나스타샤야말로 그에게 감정이 무척 안 좋을 사람이었다.
콩쿠르 진행에 대해 회의를 하다가 다툼이 생겼을 때 결국 화가 난 아나스타샤가 피아노로 승부를 짓자고 제안했고, 렌스키는 그것을 날름 받아들이고는 일부러 져서 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렌스키에게 말려든 아나스타샤가 실수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명예롭지 못한 짓을 당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 점으로 인해 아나스타샤가 다신 그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쿨하게 말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그냥 예전 일에 대해 사과할 테니 거기 가선 서로 잘하자. 그런 이야기였으니까.”
“렌스키 로마노비치도 의욕이 좀 생겼나 보네요?”
“그렇지 않아도 네 말 그대로 했었어. 그런데 음…….”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의 말을 옮겼다.
“그때 우리 무대를 보면서 엄청 후회 많이 했다고 하더라.”
연주회가 끝난 뒤 난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발레리 르포비치에게 보고 전화를 받았었다.
그는 렌스키가 모스크바를 잠시 떠나 있기로 결정했다고 했었다.
아마 생각이 꽤 많지 않았을까 싶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이렇게 늦게나마 연락을 한 게 대단하긴 하다.
아나스타샤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지하게 사과하길래 나도 그냥 좋게 이야기했어.”
“잘하셨어요, 아나스타샤.”
“네가 용서를 원할 것 같기도 했고.”
용서라 하면 잘 모르겠다. 그가 우리 무대를 봐 주길 바랐던 것도 사실 복수의 의도가 더 강했으니까.
하지만 그 복수는 확실하게 성공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 아나스타샤만 괜찮다면 나 역시 괜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바로 친하게 지내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글쎄요. 저도 예전 일을 길게 가져가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이번 콩쿠르에서 렌스키 로마노비치가 올라가고 저희가 떨어진다면 정말 분할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창피해서 죽을지도 몰라.”
국제 콩쿠르에서 강한 피아니스트들과 한자리에 모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굉장한 고양감을 느낀다.
그러나 꼭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있다거나, 꼭 이기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상당히 큰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보다는 좋은 이야기만 했으면 좋겠다. 난 메세나 협회 주최 연주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
“응?”
“우리 그때 말이에요. 듀오로 연주했던 것 기억해요?”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카르멘 아리아 했었잖아. 아바네라.”
“그때 정말 재미있었죠? 후후.”
그녀 역시 동감한다는 듯 즐거운 미소를 짓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네. 어디 듀오 경연 같은 건 안 하나? 그럼 우리가 실력 좀 보여 줄 수 있는데.”
“듀오 부문이 있는 콩쿠르도 있는 걸로 알아요.”
“와, 정말? 한번 알아봐야겠네.”
“일단은 퀸 엘리자베스부터요.”
“그건 당연하고.”
그렇게 학교로 향하는 얼마 안 되는 길을 거닐며 우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