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9화
학교까지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깝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3년간의 이야기를 전부 하기엔 너무 짧았다.
“그사이에 연주회를 한 번 더 해 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긴 해요. 올해 초쯤에요.”
“올해는 좀 아니지 않니?”
우리가 이렇게 같이 등교하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조금 더 느긋하게 하고 싶어져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게 된 것이 온전히 내 탓만은 아니니라.
아나스타샤 역시 천천히 내 걸음에 맞춰 주었다.
평소 성큼성큼 걷는 편인 그녀로선 답답할 만도 한데, 우린 이 속도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우린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맞출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올해 상반기는 콩쿠르에 투자했겠지?”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럼 사실상 이전까지의 이력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반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을 테니까.”
대화는 다른 연주자들에 대한 짧은 평가로 이어졌다.
우리 외에도 콩쿠르에 참가한 러시아 연주자들은 10명. 그 누구 하나 우리보다 어리거나 미숙한 사람이 없는 전문가들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 우리가 아는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나스타샤는 반년간의 기록이 없는 연주자라면 사실상 다른 사람으로 쳐도 상관없을 정도로 달라지기도 하니 미리 따져 봐야 무의미하다는 쪽이었고, 난 애초에 연주자 개개인의 이력 등에 대해 그리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음악을 들어 봤다면 모를까, 연주회를 가 본 적도 없고 음반을 들어 보지도 못한 상태에선 활자로 된 이력을 아무리 읽어 봐도 그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콩쿠르 무대에 서기 전에 다른 경쟁자에 대해 깊이 조사한다 한들 딱히 내 실력이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고.
“얼마 전에 방송에 나왔던 사람 봤어? 니키타라고 했던가.”
“명단에서 본 기억은 있어요. 유명한 연주자인가요?”
“그렇긴 해. 뭐……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음악가로서 평가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런 간단한 인상평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나도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아, 맞아. 카잔에서 유력한 후보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안 나왔더라.”
“쇼팽 콩쿠르에 나간 건가요?”
“아니? 거기에도 안 나가고…… 그냥 무슨 이유가 있나 봐…….”
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던 아나스타샤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아마 나와 똑같은 사람을 떠올린 것 같다.
이렇게 갑자기 생각이 날 때면 불쑥 걱정이 들곤 한다.
에르네스트와 난 각자 열심히 해서 성과를 거두기로 했으니까 평소엔 괜찮았다.
그와 한 약속은 상당히 강한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고, 난 거기에 상당 부분 기대어 있었다.
그냥 어디선가 잘하고 있으리라 믿으며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억이 잊히는 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와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불과 반년 정도밖에 안 된 기억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쇼팽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둘 다 나가려고 했다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상심했을지 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때문에 피아노 콩쿠르 대신 나간 것이 이번 작곡 콩쿠르라면 무조건 이해해 줄 수밖에 없다.
‘이해는 하는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습게도, 그리고 정말 이기적이게도 아직도 난 그에게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선 절대로 안 된다.
“…….”
대화가 살짝 끊어졌다. 아나스타샤는 내 쪽을 보지도 않았고, 나 역시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침묵 속에서 우린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태연하게 내게 맞춰 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잊으려고 해 봐야 어차피 언젠가 떠올릴 테고,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휘저어 놓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점점 침묵이 길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학교로 향하는 속도도 조금 빨라졌다.
이야기를 더 길게 하기 위해 걸음을 늦췄던 것과 반대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 중인 것이다.
아마 몇 초 지나면 아나스타샤가 화제를 돌려 버리겠지. 시간이 없음을 느낀 난 길게 생각하지도 못하고 말했다.
“아까 렌스키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연주회에서 만약 에르네스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거예요. 그렇죠?”
현재의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과거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안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지. 네가 다짜고짜 찾아가서 도와 달라고 했는데도 흔쾌히 들어줬고 말이야.”
“다, 다짜고짜는 아니었어요.”
“아니긴 뭐가 아니니?”
솔직히 할 말이 없긴 했다……. 너무 급박한 상황에 바로 도움을 구할 곳이라곤 한 곳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시선을 피해 버리자 대신 아나스타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애가 뭐 쳤었더라. 로웰 리버만의 가고일즈랑?”
“리스트의 스페인 광시곡이요.”
“그래, 스페인 광시곡.”
그를 잘 모르는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우리는 에르네스트가 어떤 곡을 어떻게 연주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만한 실력을 잃었다는 점엔 아직도 가슴이 아프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지만, 그 후에 에르네스트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끌고 나갔는지를 본 우리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실력과 강단을 믿을 수 있었다.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그런 대곡들을 준비했던 것처럼…… 아마 작곡도 놀라울 정도로 잘할 거야. 그 곡을 듣게 될 날이 기대되네.”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나 역시 그 희망찬 이야기를 이젠 조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분명 그는 작곡가로서도 대성하겠지. 그러고 나서 재활 훈련을 제대로 마치고 연주자로서의 기량도 다시 끌어 올린다면……
정말 그가 언젠가 말했듯 옛 선배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200년 전 옛 선배들처럼 연락도 닿지 않는 먼 곳에 가서 작곡 실력을 뽐낼 것까지 있나 싶긴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 응원할 수밖에.
갑자기 그를 생각하니 조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아나스타샤 역시 무던하게 풀어진 웃음을 보였다. 조금 빨라졌던 우리의 속도는 다시 차분해질 수 있었다.
교실로 들어가니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 주었다.
“어서 와. 오늘은 같이 왔네?”
“좋은 아침이에요.”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물론 나와 아나스타샤는 아침에만 잠시 앉아 있다가 수업이 시작하면 연습실로 향한다.
때문에 지금 가방에 있는 것도 전부 교과서가 아니라 악보들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안 남았지?”
“예. 조금 일찍 가 있을 예정이라서요.”
“그래, 그래. 그게 낫지.”
모두가 마치 자기 일처럼 콩쿠르를 생각해 주었다.
같은 연주자로서 상황을 조금만 바꾸어 이입해 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이 아이들이 착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아침 시간뿐이긴 하지만 이렇게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처럼 이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발렌티나가 슬쩍 다가오더니 물었다.
“준비는 어때? 잘되어 가는 거지?”
“예, 덕분에.”
“차라리 쇼팽만 하는 게 낫지……. 퀸 엘리자베스 준비는 정말 어려워 보이더라.”
이미 앞서 어려운 콩쿠르 예선전을 멋지게 해낸 발렌티나는 한결 여유가 생긴 모습이었다.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도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주말 내내 바빴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전혀 그런 이야기 없이 그녀는 내 콩쿠르에만 집중했다.
“뭐, 어차피 너라면 문제없겠지만.”
“고마워요.”
발렌티나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난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날 따라 웃더니 양손을 뒤로 넘겨 기지개를 켜면서 물었다.
“곡 말고 다른 건?
“비자도 전부 준비했고…….”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드레스나 그런 것 말이야.”
비자 같은 건 알아서 하라는 듯 발렌티나는 눈을 흘기며 다시 물었다. 그녀가 관심 있어 하는 건 내 의상 쪽이었다.
“다 되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오늘 가 보려고 해요.”
“아, 정말? 아델리나가 오래?”
“예.”
내 대답을 듣고 발렌티나는 마침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럼 갈 때 나도 갈이 가. 인사하고 싶었거든.”
의상에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녀에게도 도움을 주었던 아델리나에게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은 듯했다.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후에 연습을 마치고 나면 다 같이 아델리나를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
미리 전화를 하고 아델리나를 찾아갔다. 오늘도 그녀의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이 정말로 문을 닫은 게 아니라 우리에게 집중하기 위해 그렇게 해 놓은 것이란 걸 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델리나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도.”
약간 어두운 가게 안에서도 광채를 발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우리를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잠시 후, 전등이 켜지며 눈앞이 밝아졌다.
어느새 우리 앞에 선 아델리나는 눈웃음을 보내더니 제일 먼저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발렌티나. 예선전에서의 모습 다 봤어. 정말 아름답더라.”
“아, 그…… 예…… 감사합니다.”
발렌티나는 양손에 선물을 든 채 바보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나가 이 정도로 찬사를 아끼지 않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발렌티나가 이곳에 온 건 아델리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적당한 멘트 한둘쯤은 미리 생각해 둔 것들이 있었다. 발렌티나는 간신히 그중 하나를 꺼냈다.
“드레스가 예뻤던 덕분이죠.”
“아하하, 그래 봤자 옷가지일 뿐. 중요한 건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돋보이느냐거든.”
아델리나는 그녀의 말을 간단하게 받아쳤다.
난 깜짝 놀랐다. 아델리나는 디자이너로서 명성도 높고 프라이드도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옷가지라고 표현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자신의 심미안과 믿음, 그리고 그 결과였다.
“애초에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값비싼 드레스를 맞추더라도 의미가 없지. 그런 뜻에서…… 난 발렌티나를 정말 제대로 본 것 같아.”
난 예술가로서의 아델리나의 가치관이 굉장히 넓고 깊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안목은 옷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향해 있었다.
아델리나의 그런 태도는 내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떤 예술이든 실체하는 형태 등에 집착하면 아이러니하게도 금방 무너져 버리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예술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일 테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깨달음과 감동을 느끼며 난 조용히 지켜보았다.
한참이나 어쩔 줄 몰라 하던 발렌티나는 이윽고 한숨을 내뱉더니 솔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 칭찬해 주실 줄은 몰라서……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칭찬만 받아도 되는데?”
아델리나는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한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렇게 발렌티나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델리나는 이어서 나와 아나스타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한참이나 말없이 조용히 우릴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10초가 더 지나서야 한마디 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진 않은 것 같네.”
확고한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은 우리에게도 옮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