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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60화 (1,060/1,277)

##  1060화

아델리나의 공방에선 패션쇼가 펼쳐졌다. 런웨이에 오른 건 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이었다. 관중은 아델리나와 발렌티나였고.

“포즈 부탁할게.”

“그, 어떻게요?”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처럼 하면 돼.”

“어…….”

그간 카메라 앞에 서 본 경험은 많았다. 마음의 준비만 단단히 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지 날 촬영한 사람들은 피사체인 내가 자연스러운 연주자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없이 두 눈으로 날 똑바로 직시하면서 포즈를 요구하는 아델리나를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연주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의상을 걸친 모델이 되어야 할 것 같단 기분이 들어서일까,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생각과 몸이 각각 분리되어 따로 노는 것 같을 지경이었다.

옆을 슬쩍 보니 아나스타샤가 살짝 어깨를 틀어 각도를 만들자 갑자기 아델리나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완벽해. 완벽.”

정말 감동이 섞인 목소리였다.

뭔가 역동적인 포즈 같은 걸 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서 있는 자세가 살짝 다를 뿐인데 아나스타샤에게선 무언가 아우라가 느껴지는 듯했다.

난 약간의 도전 의식을 느끼고 그녀를 따라 해 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델리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음, 평소 자세를 보면 타고난 게 분명한데…… 왜 더 어색해졌지?”

아델리나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평소에 자세를 바로 하는 건 전부 내 몸을 일종의 도구로서 예리하게 정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목적은 피아노를 향해 있었다.

덕분에 이제 피아노를 연주할 땐 최고의 퍼포먼스가 나오지만, 그게 아닌 다른 것에 도전할 때는 생각처럼 몸이 잘 움직여 주지 않았다.

운동 신경의 부재를 느끼는 게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난 별로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델리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지 결국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만…… 이렇게 해 볼까?”

그러고는 아예 내 목과 어깨, 허리를 잡고는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 피사체가 아니라 인형이 되는 건 처음이었다.

가만히 아델리나가 하려는 대로 따라 주었다. 작품 활동을 마친 그녀는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날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데…….”

“…….”

수치스럽다는 감정이 이런 걸까.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델리나의 입장에선 열심히 만든 드레스의 모델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 주문 사항이 많은 것도 당연했다.

그녀의 의도와 의욕을 이해할 수 있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발렌티나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그냥 웃으세요, 발렌티나. 참다가 병나요.”

“큽…….”

이 상황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발렌티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하하하. 아니…… 있잖아, 네가 몸치인 건 알고 있었지만 가끔 이럴 때 보면 너무 웃겨서…….”

그 말을 듣자 아델리나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뭐? 타티아나가? 그럴 리가 있나. 피아니스트인데?”

“상상도 못 하실 만하죠. 저 애가 피아노를 다루는 걸 보면 거의 초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 그런데 피아노만 그래요. 다른 건 완전 꽝.”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델리나가 날 바라보았다. 솔직히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을 할 순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다.

다른 건 꽝이라니. 칼과 불을 쓰는 요리도 그럭저럭 하는데.

억울함에 발렌티나를 흘겨보았다. 이따가 다 끝나고 두고 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타티아나, 거기 가만히 서 봐. 이참에 사진도 한 장 찍어 놓게. 너무 예쁘다.”

“싫어요!”

내가 소리쳐도 발렌티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괜히 반항하다가 더 이상하게 찍힐 것 같아서 난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아델리나가 내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피아니스트라…… 여기에 피아노는 없지만 대신 의자에 앉아 볼까? 무대에서 어떻게 보일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예.”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서 우리의 런웨이엔 의자에 앉았다가 가는 코스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총 세 벌의 드레스를 갈아입고 확인하자 진이 빠졌다. 물론 전부 흡족할 정도로 잘 만들어져서 기분은 좋았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눈을 빛내며 아델리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해요. 아델리나가 만드신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를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별말씀을. 나야말로 기대되는걸?”

이어서 나도 감사를 전하고, 우린 아델리나가 준비해 준 드레스 캐리어에 각각의 드레스를 담아서 밖으로 나왔다.

단지 옷 세 벌이 들어 있을 뿐인데도 생각보다 꽤 무겁게 느껴졌다.

“그것도 가져가고…… 한 달 동안 쓸 것들 챙기려면 가는 길이 힘들겠네.”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다 가지고 가진 말고 그냥 필요한 게 있으면 현지에서 사. 그게 제일 편해.”

팔짱을 끼고 문 옆에 기대어 선 아델리나는 우리가 걱정이 되는지 그런 조언을 건넸다.

아나스타샤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고 동시에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너희 둘 다 야무지니까 걱정은 안 드네.”

아델리나는 빙그레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럼 방송으로 응원할게. 두 사람 다.”

“고마워요, 아델리나.”

“발렌티나도 잘 가고. 가을에 또 보자.”

“가을? 헉! 본선 의상 부탁드려도 돼요!?”

“그럼.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쇼팽 콩쿠르 본선에서도 아델리나가 의상을 만들어 준다는 말에 발렌티나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정말 기뻐했다.

아델리나에게 의상을 받은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대금을 주고 산 것이긴 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론 절대로 이 정도 돈으로 그녀의 의상을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우린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 안에 애써 준 아델리나에게 보답할 길은 우리가 그녀의 의상을 입고 큰 무대에 서는 것이겠지.

인사를 마친 우리는 빅토르의 에스코트에 따라 차에 올랐다. 드레스 캐리어는 트렁크에 넣었다.

“파이널까진 무조건 가야겠어.”

나와 눈이 마주친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기껏 드레스 세 벌을 준비했다가 첫 무대 만에 떨어져 버리는 참가자들도 많다.

그러면 나머지 두 벌은 입어 보지도 못 하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절대로 그렇게 만들진 않겠다는 듯 강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일찍 떨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벨기에로 출발하기 하루 전.

학교에선 오늘 하루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난 그 제안을 물리치고 학교로 향했다.

학생이기 때문에 간다는 그런 수동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떠나기 전에 친구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오전 비행기면 정말 바쁘겠다.”

“컨디션엔 문제없는 거지?”

“거기 가서도 먹는 건 항상 신경 써.”

교실에선 나와 아나스타샤를 둘러싼 친구들이 걱정과 응원이 담긴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지금까지 정말 많이 들었던 말들이지만 여전히 내겐 깊은 의미로 남는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잘하고 올게요.”

난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면 그 어떤 힘든 상황에서든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바르바라가 찍어 준 사진까지. 난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완벽하게 무장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뵈어야 할 분이 또 있었다.

교실에서 인사를 마치고 난 후엔 미하일 선생님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들어오려무나.”

조용히 들어서자 선생님은 책상 앞 의자에 날 손짓해 앉히고는 일어나 차를 끓이기 시작하셨다.

찻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난 이 분위기를 정말 좋아했다.

마치 이대로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그대로 레슨실로 향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난 오늘만큼은 레슨이 없을 것이란 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내 앞에 캐모마일 차를 한 잔 내려놓으셨다.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이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쉬지 그랬니. 그렇게 하라고 했을 텐데.”

“후후, 제가 어떻게 그래요.”

이런저런 이유를 댈 필요도 없었다. 선생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 역시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

선생님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모처럼 이렇게 와 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말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솔직히 너에겐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하하.”

이미 선생님에겐 그간 레슨과 콩쿠르 준비 등으로 정말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이젠 응원만 한 마디 해 주셔도 충분하다.

“그간 많이 해 주신 덕분 아닐까요?”

“많이 한 것도 아니지. 너만큼 손 안 가는 학생도 드문데.”

그러나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해 준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다른 학생 같았으면 정말 마지막까지 내가 다 불안했을 거란다……. 예전엔 국제 콩쿠르에 나가는 학생에게 출발 전에 아예 캐리어를 가지고 와서 검사받고 가라고 한 적도 있었지.”

“……저도 가지고 올까요?”

“뭐, 네가 자신이 없으면 가지고 와도 좋고.”

선생님과 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이렇게 따뜻한 차를 마시며 웃는 것도 이제 6월까진 할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부터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준비는 완벽해요.”

“캐리어도…… 음악도 말이지?”

“물론이죠.”

마지막으로 레슨을 한 이틀 전과 오늘의 난 다른 연주자나 다름없었다. 매 순간마다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쥔 음악의 형태엔 상당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젠 그것을 제대로 구사하기만 하면 된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약속드릴게요.”

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가만히 날 바라보시더니 다리를 꼬며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내 머리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가 콩쿠르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는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막 돌아왔을 때였지.”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이런 식의 커리어 쌓기는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을 때였다.

그때 미하일 선생님이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신 덕분에 내가 연주자로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하일 선생님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그땐 딱히 그런 무대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의욕적인 것 같아서 나도 기쁘구나. 그동안 우리가 같이해 온 것들이 잘못되진 않았던 것 같아.”

나에겐 잘해야 할 이유가 이미 너무 많았다.

세상에 있는 다른 천재들과 높은 곳에서 겨루어 보기도 해야 하고, 아나스타샤와의 위치도 확인해 봐야 한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에게 보여 줄 만한 성과도 필요하고…… 임세연이 어엿한 연주자가 되어 날 추월할 수 있도록 내 모든 저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날 도와준 여러 사람의 기대에도 부응해야만 했다.

친구들의 응원이 무의미하지 않게 하고, 미하일 선생님의 명예를 드높이고 싶다는 욕심은 물론이고 아델리나를 위해 드레스 세 벌을 모두 입고 무대에 서고 싶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거기에 나쁜 방향의 의욕을 더해서 렌스키보다는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단 생각까지 있었다.

“…….”

처음으로 교내 위클리 무대에 섰을 때가 생각난다.

그땐 내게 이유랄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음악을 계속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 없이 방황하다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잔뜩 혼이 나고, 일단 가장 기초적인 음악만 간신히 연습해서 무대에서 확인했을 뿐이다.

그때 연주했던 슈만의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난 계속 음악을 이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로 3년이 흘렀다.

많은 무대에 설 때마다 난 여러 이유를 얻을 수 있었고, 지금은 처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라는 것이 많았다.

이렇게 욕심을 부려도 되는 걸까. 가끔은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불안해져서 억지로 내 감정을 외면하고 고개를 들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 속마음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어도 차분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놀랍기도 하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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