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1화
미하일 선생님과의 대화는 차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끝났다.
“이만 가 보려무나. 내일…… 도착하면 전화 한 통만 해 주고.”
“그렇게 할게요.”
“그럼 힘내렴.”
선생님은 조용히 서서 날 배웅했다. 난 사무실을 나가다 말고 잠시 돌아보고는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살짝 눈인사를 보낸 뒤 복도로 나왔다.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제 곧 수업 시간이라 선생님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내일 벨기에에 도착해서는 물론이고, 매일 연락을 드리면 되겠지.’
난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 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답답한지 잘 안다. 미하일 선생님이 그런 기분을 느끼시게끔 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 티타임의 분위기와 대화를 기억 속에 간직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고, 난 다음으로 만나 뵈어야 할 분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내 지도 선생님은 두 분이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타티아나입니다, 선생님.”
“뭐냐.”
무뚝뚝한 목소리. 하지만 난 그것을 들어오란 말로 인식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계시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시더니 쓰고 계시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셨다.
잠깐만, 안경?
“선생님…… 안경 쓰세요?”
놀란 내 목소리에 선생님은 인상을 살짝 쓰시더니 짧게 대꾸하셨다.
“그래.”
“원래 안 쓰셨잖아요?”
“그렇게 됐다.”
“언제부터요?”
“지난 주말에 맞췄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놀란 나머지 계속 캐묻게 되었다.
원래 시력이 안 좋으셨던 미하일 선생님과 달리 구세프 선생님에게선 한 번도 시력에 대한 의구심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어떠셨는지는 잘 몰라도, 그간 한 번도 선생님은 무언가 놓치거나 잘못 보시는 일이 없었다.
밝고 예리한 눈과 귀는 학생들로 하여금 선생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게 만드는 무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이 안경이란 걸 쓰고 계신 걸 봤더니 갑자기 비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설마 벌써 노안이 오셨나? 이제 마흔 중반이신데?
실례 반 걱정 반인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자 선생님은 그런 내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씀하셨다.
“설마하니 이제 이 노땅이 늙어서 안경이 없으면 글도 못 읽는구나 하고 생각하진 마라.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니까.”
“그,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한 적 없기는.”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냥 약간 눈이 안 좋아지신 것 같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난 벨기에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여유롭게 인사를 드릴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 버벅거리고 있자 선생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뭐냐?”
“예?”
“3분 후에 수업 가야 하는데.”
“아, 수업이요…….”
선생님은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라는 듯 날 바라보셨다.
그런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내 머리는 선생님의 수업이란 단어에 쓸데없이 초점을 맞추었다.
“어느 반 수업이신가요?”
“너희 반인데?
“아.”
계속 콩쿠르로 혼자 연습을 하더니 급기야 자기 반 수업이 뭔지도 모르고……. 물론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선생님 앞에서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굉장히 곤란했다.
어색한 이야기만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나갔다가 점심에 다시 올까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전에만 학교에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내 계획이 틀어진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하고 있자 선생님이 처음으로 픽 하고 웃으셨다.
“그러니까 오늘 학교 오지 말라고 해 뒀더니 굳이 와서 말이야…….”
“오면 올 수 있는데 안 올 필요는 없잖아요. 2시간 연습보단 친구들과 선생님께 인사하는 게 더 중요했어요.”
“오호…… 말하는 걸 보니 자신 있나 보군? 2시간 연습은 아무것도 아니다?”
날카롭게 묻는 선생님의 말씀에 난 숨을 멈추었다. 너무 교만했나?
안경과 수업에 이어 세 번째 실수였다. 처음에 워낙 당황해서 그런지 입을 열면 열수록 실수만 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콩쿠르도 제대로 하겠나 싶다. 갑자기 급격하게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러나 구세프 선생님은 이런 내 상태도 그대로 꿰뚫어 보셨다.
잠시 돌아서서 책상 위를 정리하며 진정할 시간을 준 뒤, 내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자 선생님은 갑자기 반대로 내 편이 되어 주셨다.
“네 말도 틀리진 않지. 그 먼 나라에서 의지할 사람도 없이 무대에 섰을 때……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 내가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기복 없이 강한 연주자로 이름이 높은 선생님도 힘들고 지칠 때가 있으신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선생님은 짧게 말을 마쳤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건 다름 아닌 마지막까지 나를 응원하던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더군.”
결국 선생님이 해 주고 싶으신 말씀은 하나였다. 음악도 좋지만 사람이 없는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음악에 워낙 진지하셔서 이런 말은 하시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난 선생님께서 종종 음악보다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가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몇 년 전에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당대의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찬사를 받은 최고의 비르투오조였지만, 피아노를 떠난 삶은 비참했었다.
그러니 내가 그렇게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실 피아노에 거의 미쳐 있던 그때 당시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 아델리나가 했던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결국 예술가들의 진리는 한곳으로 모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
약간 긴장이 풀린다.
선생님은 내가 제대로 된 연주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보장까지 해 주시니 난 더더욱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면서 약간 농담을 할 여유도 생겼다. 난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도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무슨 로봇인 줄 아나? 무대에서 긴장도 안 하고 눈도 안 나빠지는?”
“아뇨, 후후.”
고개를 저으며 웃자 선생님은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보셨다. 그래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난 다시금 이곳에 있는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괜히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만나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 바를 선생님에게 전했다.
“그럼 선생님도 제 힘이 되어 주시겠어요?”
“……너도 많이 변했구나.”
칭찬의 의미라는 걸 알기에 난 웃기만 했다.
굳이 어느 한 부분을 짚기도 어려울 정도로 난 많이 변했다.
선생님 역시 많이 변하셨고……. 눈이 안 좋아지신 건 유감이지만 시간의 흐름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바뀌지 않는 불변의 정신 또한 존재했다.
내게 있는 피아노에 대한 열망이 그럴 테고, 선생님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또 그럴 터였다.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시던 선생님은 이내 호탕하게 웃더니 거칠게 말씀하셨다.
“그래, 가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실력을 보여 주고 와라. 파이널리스트가 되면 소원이라도 하나 들어줄 테니까.”
“헉, 정말요?”
하지만 내가 눈을 빛내며 대답하자 갑자기 선생님의 표정에 낭패한 기색이 서렸다.
“아니, 실언이었다. 못 들은 걸로…….”
“그런 게 어디 있나요? 분명히 들었어요!”
보통은 그냥 열심히 하란 취지의 응원으로 이해하겠지만, 내가 농담으로 듣지 않겠다고 치사하게 굴면 선생님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다.
“마음대로 해라…….”
세상에 정말 변하지 않는 건 없는 모양이다. 학생들이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호랑이 선생님이 이렇게 한숨을 내쉬다니.
내가 싱글벙글 웃고 있자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타티아나.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마.”
“예, 선생님.”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해 줄 말이 별로 없다며 강력한 믿음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구세프 선생님은 아무래도 내가 약간 불안한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시던 선생님이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예?”
“그런 곳에 가면 힘든 일도 많을 게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더라도 반드시 무대에서 음악으로 말하겠다는 의지로 서라.”
“…….”
“알겠나?”
제가 포기할 사람처럼 보이시냐고 당차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란 걸 안다.
아마 그런데도 힘들어할 일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며 걱정하시는 것이겠지.
때문에 난 쓸데없는 말들을 붙이는 것보다 짧고 명료하게 대답하는 편을 택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럼 됐다.”
구세프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곤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뒤돌아 나가면서 난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말했다.
“도착하면 전화 드릴게요.”
“……그래.”
선생님은 농담으로라도 필요 없다거나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에르네스트가 없는 동안 내가 조금이나마 선생님께 안심할 수 있는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그저 그뿐이었다.
***
아침부터 난 분주하게 움직였다.
중요한 짐들은 어제 다 싸 놓았기 때문에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괜히 한 번이라도 더 준비해 놓은 것들을 확인하게 된다.
“…….”
완성된 짐은 캐리어 두 개와 가방 하나였다.
짐이 조금 많긴 하지만 한 달 동안 해외에서 지내야 하는 데다가 드레스를 세 벌이나 가지고 가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캐리어가 중간 사이즈라 다행이었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이걸 끌고 이곳저곳 다닐 것도 아니었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호스트 패밀리에서 마중을 오기로 했다.
그 덕분에 난 캐리어를 두 개나 가지고 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방 안에서 캐리어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있자 옆에서 나제즈다가 걱정된다는 듯 바라보다가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이 정도야 뭐…….”
나제즈다는 중요한 짐들을 나중에 따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난 필수적인 것들만 제외하고는 되도록 콩쿠르 측에서 제공하는 것에 따라 움직이고 싶었다.
물론 내게 따라붙는 필수적인 옵션엔 경호 인력들이 포함되니까 이미 거기서부터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것까지 제외하는 건 아버지와 오빠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나제즈다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기 위해 캐리어 두 개를 끄는 걸 보여 준 다음 이렇게 직접 가지고 다닐 일도 별로 없을 것이라 전했다.
그래도 나제즈다는 집 안에선 도와주겠다며 내 캐리어를 하나 가져갔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짐들을 가지고 방 밖으로 나왔다.
응접실엔 아버지와 오빠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캐리어를 끄는 소리를 듣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오빠가 대뜸 말했다.
“바닥 망가진다, 타티아나.”
“…….”
지금 먼 길 가는 동생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오빠는 킥킥 웃기만 했다.
그리고 보통 이럴 때면 아버지가 한마디 해 주시곤 하는데, 오늘은 약간 심란하신지 아무 말씀 없이 날 바라보고 계셨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다.
난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출발하려고 해요, 아버지.”
“……그래. 계획엔 변함이 없고?”
일반 항공기와 호스트 패밀리를 이용하려고 하는 내 계획에 아버지는 반대 입장을 보이셨다.
하지만 내가 몇 번 설득하자 결국 들어주신 것이다.
아버지 입장에선 잘 이해가 안 가시겠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때만 하더라도 호텔에 그냥 묵었었고, 오빠를 데리고 가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그때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난 아나스타샤나 임세연과 같은 참가자였고, 그 부분을 보다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굳은 의지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납득해 주셨다. 그런데 오빠가 불쑥 끼어들더니 한마디 했다.
“걱정 마세요. 이참에 고생도 한번 해 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울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다음부턴 아버지 말씀 잘 듣죠.”
“울긴 누가 울어요? 그럴 일 없어요.”
“과연 그럴까?”
황당해하며 받아쳐도 오빠는 능청스럽게 농담으로만 응수했다.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약이 오른다. 난 몇 번 오빠와 말을 섞어 보고는 그냥 빨리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캐리어를 끌고 아버지 앞에 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날 내려다보셨다. 난 길게 말할 것 없이 아버지와 포옹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몸조심하거라.”
아버지는 내게 잘하라든가, 좋은 결과를 내라든가 하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국제 콩쿠르에 도전하는 내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계시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번에 확실하게 내 각오와 의지를 내보이고 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