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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62화 (1,062/1,277)

##  1062화

나보다 10년 넘게 앞서 활동하면서 실력과 경력을 쌓은 사람들과 국제 무대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건 정말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다.

‘결과로 보여 드리고 싶어.’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말을 조금 아꼈다.

콩쿠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절대 알 수 없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임했지만 예선에서 떨어져 일찍 돌아오게 될 수도 있다.

당시의 컨디션이나 정신적 문제, 돌발적인 트러블 등이 언제나 무대 위에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것을 망치기에 1초면 충분한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자신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다.

“…….”

단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믿을 뿐이다.

그간의 노력으로 머리에 넣고 손에 붙인 음악을 제대로 청중 앞에서 구사할 수 있음을 나 자신이 믿지 않으면 절대로 무대를 성공시킬 수 없다.

매일같이 피아노 연습을 한 것은 나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을 피아노 소리로 진정시키고 구슬리는 것이다. 이 정도 소리를 낼 수 있다면 세상 어디에서든 통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그 과정 끝에 영글어진 자부심은 매우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이 정도면 무시당하진 않아.’

그렇게 난 세 번의 무대에 올릴 프로그램들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다.

단순히 경험을 쌓기 위해 이번 콩쿠르 참가를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결선을 노리고 있기에 지금 이 드레스 캐리어를 끌고 있다.

한 달 동안 세 번의 무대에 오를 각오가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쥐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당장은 말을 아끼면서 그저 안전하게 잘 갔다 오겠다고만 말씀을 드렸지만…… 나중에 결과로 놀라게 해 드릴 작정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놀라고 기뻐해 주실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자, 나제즈다도요. 다녀올게요.”

그리고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다. 바로 지금처럼.

느닷없이 나제즈다를 끌어안자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이내 상냥하게 웃으며 날 안아 주었다.

나제즈다와 잠시 포옹하며 인사한 뒤 떨어진 나는 이어 루슬란 오빠를 바라보았다.

“…….”

오빠는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은근히 무언가 바라는 기색이었다. 내가 포옹하면 받아 줄 수 있도록 내 쪽으로 몸을 틀고 있기도 했다.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원하는 대로 해 주기 싫다. 난 빙그레 웃으며 오빠에게 다가가선 손을 내밀었다.

“다녀올게요.”

“…….”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오빠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악수를 받았다.

다른 곳에선 냉철하고 어른스럽게 잘 행동하는 사람인데 집에선 왜 이러실까 모르겠다 정말로.

그게 재미있긴 하지만.

오빠가 두어 번 손을 흔들려 할 때 난 휙 하고 손을 당기면서 안아 주었다. 기습에 당한 오빠는 그야말로 펄쩍 뛰려고 했다.

“갑자기 왜 이래!”

놀라기도 하고, 내 장난에 자존심도 상한 듯 오빠는 다짜고짜 타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게 먹힐 리 없었다.

“정말 갑자기인가요?”

작게 속삭이자 오빠가 멈칫하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한 짓은 분명 급작스러웠지만, 오빠가 그 전부터 기대 어린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단지 내가 그 대비를 살짝 무너뜨렸다가 들이받았을 뿐.

재미있다는 듯 웃자 오빠는 인상을 팍 쓰면서 날 밀어냈다. 그래도 기분 나빠 하는 손짓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후후.”

“웃지 마.”

앞으로 한 달도 넘게 못 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약간 외롭다.

하지만 계속 여기 있으면 쓸데없이 떼를 쓰게 될 것 같아서 난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주위를 또 한 번 둘러본 다음 말했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셨다. 난 캐리어를 끌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어떻게 내려가야 하나 싶었는데 바로 문 옆에서 대기 중이던 빅토르가 캐리어 두 개를 받더니 번쩍 들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 아래엔 이미 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빅토르의 뒤를 따라 차에 오르기 직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을 다 내려오지 않고 아버지와 오빠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저 위에 더 있다간 떼를 쓸 것 같단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두 분 역시 여기까지 내려오면 같이 차에 타 공항까지 배웅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일축하여 난 예스러운 묵례로 인사를 보냈다.

“…….”

내가 의젓하게 굴어야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고개를 드니 나를 향한 가족들의 눈빛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믿음이 느껴져 온다. 난 마지막으로 웃어 보이곤 차에 올랐다.

차 문을 닫자 본격적으로 일정이 시작되었다는 기분이 들면서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앞 운전석에 앉아 있는 빅토르를 보니 다시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빅토르가 같이 가 주셔서 다행이에요.”

“제가 안 가면 누가 갑니까?”

내 전속 경호원들은 이 일정에 무조건 동참이었다. 그건 아버지의 의지였고, 나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빅토르는 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호하기로 했다. 그 사실이 난 조금 미안하면서도 정말 기뻤다.

그리고 미안함은 그만한 보상을 해 주면 될 테니까……. 지금은 내 경호원들이 함께 해 준다는 것에 기뻐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럼…… 프리스넨스키에 들리지 않고 바로 셰레메티예보로 가겠습니다.”

“예.”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니 아나스타샤를 중간에 태워 가도 되겠지만, 이번엔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배웅해 주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난 출발과 동시에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에게서 잠시 후 출발한다는 답장을 받았다.

“…….”

차는 모스크바 중심부로 갈 일 없이 외곽 도로를 따라 돌았다.

이곳에 산 지도 오래되어서 이젠 바깥 풍경이나 도로에 차들이 얼마나 있는지만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막히는 일 없이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난 멍하니 창밖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다.

***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탑승 수속을 하고 캐리어부터 위탁했다.

내가 할 일은 여권과 비자를 챙겨 들고 빅토르를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다.

전용기에 탈 땐 전혀 없었던 과정들이 있어서 약간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힘들진 않았다.

준비를 마치고 출국장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아나스타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디니? 타티아나.]

그녀도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다.

[출국장 앞이에요. 탑승 수속 마치고 오세요.]

내 메시지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모티콘으로 답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아나스타샤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왔다.

아나스타샤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얼마 안 되었어요.”

고개를 젓고 난 바로 이어서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아젤라이다 아주머니.”

“오랜만이야! 어머나, 얘는 어쩜 이리 볼 때마다 예뻐지니?”

아젤라이다 아주머니야 말로 뵐 때마다 젊어지시는 것 같다. 난 그녀의 품에 안겨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날 놓아준 아주머니는 너무나 행복한 미소로 날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같이 콩쿠르 나간다는 말 듣고…… 언젠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어. 친구란 건 그렇잖니?”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특기가 있는 친구라고 하더라도 같은 콩쿠르에 나가야 할 필요는 없다. 되레 피하면 더 피했지.

그러나 아주머니는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시는 듯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불안이나 안타까움보다는 기뻐하시는 것 같았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보다 높은 곳에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시는 것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젤라이다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해외에서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응원할게, 타티아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아나스타샤가 어머니와 함께 온다는 말에 어쩌면 나도 응원해 주실지 모르겠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해 주실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응원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난 아나스타샤와 제대로 마주해야만 하겠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자 갑자기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불평했다.

“잠깐만, 엄마. 그 애를 응원하면 어떻게 해? 엄마는 날 응원해 줘야지.”

“뭐 어떠니?”

“엄마는 우리 둘 중 누가 이겼으면 하는데?”

출국장 바로 앞이고, 지금 떠나면 한 달은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스타샤의 질문은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젤라이다 아주머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셨다.

“잘하는 쪽이 이기지 않겠어?”

“…….”

본래 쿨한 면이 있으신 분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객관적이신 것 아닌가 싶다.

아나스타샤 역시 평소엔 어머니가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진짜로 삐쳤는지 너무한다는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가만있어 보렴.”

“왜? 싫은데. 엄마는 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잔뜩 토라진 아나스타샤는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억지로 계속 날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출국장 앞에서 모녀가 다투기라도 할까 봐 난 약간 안절부절못하며 진정시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을 수습한 건 아주머니였다.

“상관이 없으면 이건 왜 가져왔겠니?”

“……어?”

무심결에 돌아본 아나스타샤의 눈앞에 아주머니가 무언가 꺼내 내밀었다. 돈이었다.

심지어 루블화가 아니라 유로화. 오늘 아나스타샤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바꿔 놓으신 것이 분명했다.

우뚝 멈춰 선 아나스타샤에게 아주머니가 말했다.

“용돈 필요 없니? 필요 없으면 말고.”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콩쿠르 측에서 제공 받긴 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쓸 돈이 하나도 없으면 곤란하다.

아나스타샤는 작년에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청소년 콩쿠르 상금은 짠 편이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남아 있는 것도 그리 큰 액수는 아닐 것이다. 용돈을 주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급히 누그러진 태도로 내 손을 놓았다.

“당연히 필요하지…….”

“그럼 가져가렴.”

아주머니는 짧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손을 내밀자 용돈을 뒤로 빼며 딱 부러지는 태도로 물었다.

“그냥 가져가게?”

아주머니가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지막에 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했던 아나스타샤의 말이 아주머니에게도 마음 상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난 이 대치 상황에서 혹시나 아나스타샤가 나도 돈 있다며 바락 대들고 가 버릴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잘못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평소엔 정말 자존심이 강하지만 그걸 굳이 가족들에게 내세우지 않는 점이 정말 훌륭했다.

어른스럽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아나스타샤가 사과하자 아주머니 역시 길게 말씀하시지 않고 웃으며 그녀에게 용돈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씀하셨다.

“이제 얼른 가렴. 시간 늦지 않게.”

“감사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갔다 올게.”

우린 출국장 쪽으로 움직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빅토르가 마지막으로 아주머니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잘 부탁한다는 종류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빅토르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난 그걸 잠깐 보다가 웃으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잘했어요, 아나스타샤.”

“뭘?”

“어머님께 사과드린 거요. 정말 어른스러웠다고 생각해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칭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절대 아니라는 듯 부정했다.

“아닌데? 돈 때문에 그런 건데?”

“에이.”

“진짜라니까?”

그녀는 절대로 자신이 토라져서 말실수를 하고 말았던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너무 놀리면 아나스타샤가 또 삐뚤어질 것 같아서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우리는 출국장 앞에 섰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거쳐야 할 일이 아직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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