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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63화 (1,063/1,277)

##  1063화

일반적으로 항공기 탑승은 단순히 탑승 수속만 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난 여권을 들고 아나스타샤와 함께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한 발 뒤에 떨어져 서 있던 빅토르가 빠르게 따라붙어 앞장섰다.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몇 번이나 와 봤는데도 지금까진 항상 전용기를 이용했던 터라 이렇게 일반적인 과정을 통과하는 일이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라서 눈치껏 따라다니고 있는데 살짝 앞서가던 빅토르와 아나스타샤가 속닥이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는 이런 공항이 처음이시거든요.”

“진짜로요?”

“유리 님께서 루슬란 님께 가끔 일반 항공기를 타고 가라고 할 때는 있어도 아가씨는 그렇게 두지 않아서요.”

“유리 아저씨가 은근히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지 않아요?”

“은근히가 아니죠.”

아나스타샤가 실실 웃으며 한 농담을 빅토르가 받았다. 그랬더니 되레 아나스타샤가 내 쪽을 힐긋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빅토르는 킥킥거렸다.

“뭐 어떻습니까? 사실인데.”

대놓고 과보호하니 마니…… 그런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내가 아버지께 오게 된 것부터가 불행한 사고에 의해서였으니까.

조금이라도 나를 불안한 환경에 있게 두고 싶지 않으신 것이겠지.

그걸 이해하기 때문에 내 신변 문제에 대해선 그냥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 따라 주고 있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과보호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사람 취급을 당하긴 싫다.

한번 제대로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앞으로 나서려는데, 그 순간 빅토르가 이어 말했다.

“은근히가 아닌 건 저 역시 그렇고 말이죠.”

난 그제야 내가 누구에게 불평을 토로하려 했던 건지 깨달았다. 과보호에 가장 앞장서는 건 다름 아닌 그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빅토르는 일반적인 경호원들 이상으로 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 생각을 꿰뚫어 보는 건 무척 쉬운 일이겠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그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자 약간 창피하던 기분이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갑자기 더워졌다.

“두 사람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시나요? 저만 따돌리지 마세요.”

“아, 못 들으셨습니까?”

“뭐가요?”

일부러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밝게 물었다.

정말 연기라고 할 수도 없이 어색함이 흘러넘쳤지만 빅토르는 피식 웃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별것 아닙니다. 음, 그럼 출국 심사를 받으러 갈까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내가 무어라 하든 빅토르는 이곳에서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중간에 내가 길을 잃진 않을지 상당히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그가 걱정하지 않길 바라는 건 마찬가지라서 열심히 그 뒤를 따라갔다.

출국 심사대를 확인한 빅토르가 말했다.

“원래 조금 더 빨리 나가는 방법이 있긴 한데, 처음이기도 하고 줄도 짧으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 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난 일단 전용기를 타지 않기로 한 시점에서 뭐든 보통 방법을 쓰는 데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빅토르의 말이 신경 쓰였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부분이 궁금했는지 빅토르에게 물었다.

“빠른 방법이 뭐예요?”

“저 옆의 트랙을 쓰는 겁니다.”

빅토르가 가리키는 곳엔 텅 비어 있는 출국 심사대가 하나 보였다.

척 봐도 외교관이나 출입국 우대자들이 쓸 법한 곳이었지만 빅토르의 표정을 보니 정말 들어갈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이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냥 오늘은 평범하게 하고 싶었다.

난 그냥 벨기에의 콩쿠르에 참가하려고 하는 피아노 연주자일 뿐이다.

“…….”

하지만 내 바람대로 조용히 가기엔 내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올해는 쇼팽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동시에 열리는 해이다 보니 온갖 매스컴에서 두 콩쿠르의 차이점이나 참가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매스컴에서 가장 쉽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건 바로 최연소 참가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활동이 많았던 내게 유독 관심이 쏟아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꾸준히 연주회를 하기도 했고, 최근에 음반을 내서 주목을 끌기도 했으니까……. 이제 와 그것이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날 기삿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고, 난 최소한으로 그것에 응했는데도 나에 대한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외부에서 흘러나왔다.

그 때문인지 밖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건 공항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맞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러 가시는 건가요?”

앞줄에 있던 사람이 뒤쪽을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알아보았다. 내가 그렇게 알아보기 쉬운 얼굴인가?

빅토르를 돌아보니 그는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가까이 다가가서 작게 이야기했다.

“예, 맞아요.”

내가 수긍하자마자 그 여성은 완전히 몸을 돌려 날 보고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빠르게 이야기했다.

“와! 진짜로 팬이에요! 저번에 내신 음반을 들으면서 생각했죠. 이 사람이 국제 무대에 나가면 얼마나 대단할까 하고요. 그런데 그게 이제 정말 눈앞에 다가왔네요!”

“저기…… 조금만 작게 말씀해 주시면…….”

“앗, 아. 미안해요.”

다른 사람이 날 발견해서 기뻐한다면 나 역시 기쁘니 좋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주목을 끌고 싶진 않았다.

이미 이쪽으로 시선이 조금 몰린 것 같긴 했지만 난 최대한 앞을 바라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요령도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팬이라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노력이 많이 필요하지만요”

“겸손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그래도 사인을 받고 싶은데요…….”

“어…… 그럼 어디에…….”

“잠시만요, 저도 종이가 없어서.”

필기구라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만년필이 있지만 사인을 해 줄 만한 종이를 갑자기 구하기는 어려웠다.

둘 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빈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그 종이를 받으며 감사를 표하던 여성은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이내 확신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였군요?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시네요.”

그녀는 나만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도 바로 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서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제 이름도 아세요?”

“당연하죠. 두 분이 함께 최연소 참가자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아나스타샤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항상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기준에선 아나스타샤만큼 스타성 넘치고 멋진 사람이 없었다.

외모와 스타일 감각은 두말할 것도 없고, 피아노에 대한 재능과 실력도 압도적으로 출중하다.

반드시 세상이 그녀를 알아보고 잔뜩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때가 서서히 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마 퀸 엘리자베스에서 아나스타샤가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한층 더 빨라지겠지.

왠지 내가 주목받는 것보다 더 즐거워져서, 난 아나스타샤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기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그 기대에 부응해 보일게요.”

“저도 두 분 응원할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래에서 난 사인을 해 주었다.

종이를 받아 든 그녀는 정말 기뻐하면서도 이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면서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아까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아 하던 내 입장을 고려해 준 것 같았다.

약간 뜻밖이긴 했지만 그래도 출국 심사를 받기 전에 내 팬을 자칭하는 사람을 만나 이렇게 응원을 받으니 조금 더 의욕이 생겼다.

슬쩍 보니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린 미소로 마주하며 무언의 기쁨을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줄이 줄어들면서 곧 우리가 출국 심사를 받을 때가 왔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아, 누군지 알겠네요. 피아니스트이시죠?”

설마하니 심사관도 날 알아볼 줄은 몰랐다.

내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여권과 비자를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로 도장을 찍어 주었다.

앞선 사람들은 잠시 머무르며 문답을 조금 주고받았는데, 무슨 몇 초 만에 출국 심사가 이렇게 끝나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심사관은 놀랄 것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벨기에에서의 행운을 빕니다.”

내 길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전해져 왔다. 난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웃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다음 분 오시죠.”

평범한 방법으로 공항을 통과해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거의 5초 만에 심사를 마치고 나온 나처럼 뒤이어 아나스타샤 역시 길게 걸리지 않았다.

“원래 일반 심사를 거쳐도 오래 걸리진 않긴 하는데. 이번엔 정말 빠르네.”

“그렇죠? 다행이에요.”

되레 빅토르가 조금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내 경호를 위해 따라간다고 하니 심사관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와 정말로 연관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빅토르가 뒷목을 긁적이며 나왔다.

“질문이 많더군요.”

“괜찮아요.”

“흠…… 그럼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출국하면서 면세점에 들릴 일도 없고, 식사를 하기에도 애매했다. 어차피 비행기 내에서 기내식이 나온다고 하니까.

그래도 벨기에 브뤼셀까지 5시간 동안 비행해야 하니 간단한 간식이라도 좀 먹을까 싶어 돌아다녔다.

“저기요!”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우릴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번에도 팬 서비스를 하고 나서 다시 몇 분. 이번엔 외국인들이 우릴 알아보고는 온갖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

간신히 국적 불명의 사람들과 사진까지 찍고 나서 풀려난 우리는 자연스레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떠나기도 전에 많은 사람에게 응원을 받는 건 상당히 기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멍하니 길목에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상황을 살피던 아나스타샤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제안했다.

“우리 선글라스라도 쓸래?”

“…….”

그건 정말로 연예인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요?

차마 말로 묻진 못했지만 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팬 서비스를 하면서 즐거워했었는데, 나 때문에 일부러 사람들을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 빅토르가 찬성 의견을 냈다.

“검색대를 거친 후라 경호엔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개방된 공간에선 되도록 신분을 감추어 주시는 것이 저도 편하긴 합니다.”

지금도 계속 일하는 중인 빅토르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난 아나스타샤를 따라 근처 매장으로 향했다. 고급 브랜드 제품들을 파는 면세점이었는데, 그중엔 선글라스도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이 그렇게 부담되는 건 아니라서 하나쯤 사서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것 써 봐, 타티아나.”

“예? 그, 잠시만요.”

“음…… 아닌가? 다른 걸로 해 볼까?”

그런데 내가 무언가 고를 틈도 없이 아나스타샤가 먼저 신이 나서는 이것저것 선글라스를 골라선 내 얼굴에 씌우며 놀기 시작했다.

“얼굴선이 갸름하시니 이런 제품도 추천드려요.”

“아, 이거 좋네요!”

거기에 직원까지 합세해서 아나스타샤를 부추기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얌전히 몇 개나 되는 선글라스를 바꿔 쓰면서 그녀들이 말하는 대로 해 줘야 했다.

한참 시달린 후에야 난 간신히 최종적으로 한 제품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사자마자 아나스타샤는 빨리 쓰라면서 재촉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자니 뭔가 조금 어색하다. 나 혼자 이렇게 다닐 순 없었다. 그래서 난 아나스타샤에게도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빨리 하나 구매하세요.”

“응? 난 안 살 건데.”

“예?”

난데없는 말에 황당해하며 되묻자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자기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썼다.

“난 미리 가져왔지롱.”

어이없어하며 옆을 보니 빅토르도 이미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일할 때도 자주 선글라스를 쓰곤 하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었겠지만…… 아나스타샤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선글라스를 꺼내는 걸 보며 난 이 상황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냥 제게 선글라스를 씌우고 싶으셨던 거죠?”

“응. 그런데?”

“…….”

이렇게 깔끔하게 인정해 버리면 할 말이 없다. 난 결국 어깨를 늘어뜨리고 신나게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까 전보다 이쪽을 보는 시선들이 더 많아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선글라스를 쓴 세 명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저기…… 아나스타샤.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은데요.”

“뭐 어떠니?”

킥킥거리는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난 확신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처럼,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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