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4화
선글라스 삼인조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아깐 몇 걸음 못 가 사람들에게 붙잡혀선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어 줬어야 했는데, 이젠 마음대로 빵과 음료수를 살 수도 있었다.
가게 주인이 조금 이상한 눈빛으로 우릴 보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예전부터 밖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난 팬 서비스 하는 일이 그리 부담스럽진 않았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제일 중요한 건 당연히 음악을 잘 연주하는 거겠지만, 함께 향유함으로써 음악을 진정 의미 있게 하는 청중들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 까닭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이런 부분은 정말 깍듯하게 잘하는 편이라서 난 그에게 많이 배웠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선글라스를 써서 사람들을 피하려 하는 건 약간의 배신행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는 사람들을 전부 받아 주었다간, 아마 오늘 출국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렇게 응원을 많이 받았는데 중간에 탈락하면 어쩌지.’
많은 사람의 기대와 응원을 받다 보면 당연히 드는 생각이 있다. 거기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난 이제 그런 불안들을 처리하는 데에 무척 능숙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네거티브한 쪽으로 감정이 흘러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 아나스타샤가 함께 사람들을 응대해 줘서 그런지, 난 그리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내가 잘못하여 일찍 떨어진다 하더라도, 분명 아나스타샤가 나보다 훨씬 더 잘해서 주목받겠지. 내겐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있었다.
덕분에 짐을 나눠 들게 된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의 복잡한 관계들을 차치하고 본다면 정말로 이상적인 라이벌이자 동료라 할 수 있었다.
“…….”
새삼 그녀만 한 사람을 또 찾는 건 정말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아나스타샤는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었는데, 그 모습만 해도 벌써 그림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보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보이진 않아도 우리의 눈빛이 마주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웃었다.
“그나저나 선글라스 하나 썼다고 진짜로 못 알아보네.”
아나스타샤는 이 상황을 약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난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했다.
“제가 봐도 못 알아볼 것 같은걸요.”
“뭐라고? 정말?”
“그, 느낌이 그렇다고요……. 뭔가 색달라서…….”
“색이 다르긴 하지.”
키가 크고 쿨한 외모에 선글라스까지 끼니까 정말 친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내 말에 충격받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아는 아나스타샤가 맞았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지금도 지나다니는 사람 몇몇이 이쪽을 힐긋 보았다가 그냥 가는 것이 보였다. 난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저희 의도가 전해진 게 아닌가 싶어요.”
“응? 무슨 말이야?”
의도란 말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론 그녀의 의도는 내게 선글라스를 씌우는 것뿐이었겠지.
하지만 그에 앞서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썼다는 것 자체에 담긴 의미가 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죠. 저희가 길을 가는데 선글라스를 쓴 세 명이 보여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눈치가 빠른 아나스타샤는 아이스크림을 다시 할짝거리더니 말했다.
“말 걸지 말아야겠다……?”
“그렇죠?”
누구나 생각은 다 비슷비슷하다.
물론 우린 어떻게 보더라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여자애들에 불과했지만, 바로 옆엔 조금 무서워 보이는 빅토르가 있기도 했고…….
아마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낮은 가능성에 기대 말까지 걸고 싶진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알아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죄송하지만 그냥 모른 척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해요. 적어도 지금 저희가 겉으로 보이는 의도는 말이죠.”
“일리 있네.”
아나스타샤도 생각이 깊은 타입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공항에서 내게 선글라스를 씌우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터라 미처 다른 사람들까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약간 미뤄 두었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녀가 다다른 결론은 나와 비슷했다.
이것이 팬 서비스를 일부러 피하는 행위란 것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자기 자신은 몰라도 내가 그것을 신경 쓸 것이란 것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렇게 좋아하고 재미있어했으면서, 이젠 슬슬 되었다는 듯 그녀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지금이라도 벗을까?”
“후후, 아뇨.”
날 생각해 주는 그녀의 마음은 고맙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우유부단하지 않게 말할 때였다.
난 시간을 확인한 다음 허벅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곧 비행기에 탑승해야 할 시간이니…… 슬슬 움직이도록 하죠. 이대로 가면 예상 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겠죠.”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탑승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 있을 순 없었다.
그러니 선글라스를 쓰고 이동하는 것도 그렇게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움직이자 그 뒤로 아나스타샤와 빅토르도 따라왔다.
그런데 그냥 조용히 오면 될 것을, 내 시선이 닿지 않는 뒤에서 또다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끄러운 공항에선 잘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예민한 내 귀에는 전부 똑똑히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감탄조로 이야기했다.
“야무지다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잠깐 한눈팔면 뭔가 이상한 거 집어 먹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감동적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병아리 아가씨가 어느새 이렇게…….”
소로킨 어디 있어요?
빅토르가 무례한 말을 하면 발로 걷어차는 것도 마다않던 그가 그립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걸 집어 먹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가 이상한 짓을 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래도 먹는 것을 가지고 분별없이 굴었던 적은 없었다.
정작 문제가 누구에게 있는지 따져 본다면 그건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먹는 아나스타샤가 아닐까?
평소엔 그런 취향에 옳니 마니를 따지는 것이 예의 없는 일이란 걸 아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아나스타샤가 먼저 내게 모욕감을 줬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부러 휙 돌아보며 뾰족하게 물었다.
“안 가실 건가요?”
“응?”
“꼬꼬 하면서 앞장이라도 서 드릴까요?”
난 병아리란 말을 분명히 들었음을 드러내며 비꼬았다.
하지만 문제는 두 사람이 그 정도론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크게 뜨더니 되레 내게 조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반격하면 곤란해, 타티아나. 얼른 그렇게 해 달라고 하고 싶잖니.”
“사람들의 심리를 잘 읽으시는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라는 듯 중얼거리는 빅토르를 보니 이것저것 따진 나만 바보 같아졌다. 결국 참지 못한 난 작게 소리치고 말았다.
“돼, 됐으니까 그만하세요!”
빅토르는 실실 웃기만 했다.
저 미소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 지금 소로킨과 자하르는 미리 벨기에 현지에 가 있었다.
도착해서 만나면 바로 빅토르의 만행을 소로킨에게 일러바칠 생각이다.
***
유럽의 머리가 어디인가 묻는다면 거기엔 여러 대답이 나올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현대 독일이 대표될 테고.
역사적으로는 아마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꼽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러나 행정적인 머리가 어딘지에 대해선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여러 국가가 모여 있는 유럽에 행정 중심이랄 게 어디 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 중심은 존재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도착한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네요.”
“생각보다 기네. 5시간은.”
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다시 태블릿 컴퓨터로 이 나라와 도시에 대한 정보들을 복습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사이에 있는 나라다.
그 위치 덕분인지 힘의 균형점을 맡고 있기도 해서 이곳엔 여러 범국가적 단체들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될 만한 것은 당연히 EU, 즉 유럽 연합이다.
브뤼셀 중심을 기준으로 동부엔 유럽 연합 지구가 있었고, 그곳엔 유럽 연합의 실질적인 본부라 할 수 있는 정상 회의 기구, 이사회, 의회, 집행 위원회까지 모든 핵심 행정 기관이 터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 연합이 각 국가의 정치부터 경제까지 다양한 부분을 아우르고 있다면 군사적인 동맹을 상징하는 기구인 나토NATO가 있는데, 그 나토의 본부 역시 이곳 브뤼셀 북부에 위치했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원판의 손가락 위에 올릴 수 있다면 그 지점은 바로 여기일지도…….’
난 벨기에에 대해 공부하기 전엔 따로 지식이 없었기에 이곳이 유럽에서 이렇게 중요한 국가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벨기에는 유럽 한가운데에서 남네덜란드로 불리다가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거쳐 벨기에로 독립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였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만큼 주변국들과의 관계 역시 깊었고, 때문에 지금은 지리적인 요인과 역사적 근간을 기본으로 해서 유럽의 행정 수도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
그러나 다사다난한 역사를 겪어 왔기에 벨기에엔 갈등 역시 많았다.
북부에서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란데런과 남부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의 갈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문제였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10년 전엔 아예 의회가 해산되어 무정부 상태로 1년 넘게 혼란스러웠을 정도였다.
그때 벨기에라는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왕가가 존재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벨기에는 아직까지 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 나라였다.
물론 현대에 와서 그런 권위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래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이토록 주목받고 벨기에 전체의 축제가 된 것은 이 콩쿠르가 과거 벨기에의 왕비의 이름을 딴 콩쿠르이기 때문이었다.
“감동적이지 않나요? 이렇게 오래된 콩쿠르가 유지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게.”
난 벨기에에 대해 공부한 것을 가지고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처음엔 조금 흥미 있어 하더니 나중엔 결국 한마디 하기도 했다.
“누가 학년 수석 아니랄까 봐…….”
“그건 관계없잖아요?”
“아니, 지금 보니까 관계있는 것 같아. 아주 근본적인 관계가……. 일단 공부부터 하고 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처음 이 나라에 왔으니 공부를 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관광지라든가, 볼거리 같은 걸 공부하지 너처럼 역사를 파고들진 않아.”
“…….”
할 말이 없어진 난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가 오늘따라 정말 너무한 것 같다.
삐친 내가 가만히 있자 그제야 아나스타샤는 날 달래려는 듯 뒤늦게 이야기를 받아 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흥이 식어 버린 후였다.
아나스타샤는 내 관심을 끌어 보려는 듯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아, 이런 일도 있었네?”
“……?”
“몇 년 전에 이 공항에서…….”
중얼거리며 화면을 읽어 나가던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조용해졌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았다. 2016년에 있었던 브뤼셀 공항 테러 사건일 것이다.
알아본 대로 브뤼셀은 유럽의 행정 수도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갈등도 많고 여러 사람이 섞여 있는지라 사실 치안이 그리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선 특히 아버지와 빅토르도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경호원들이 모두 따라오게 된 것이다.
사실 콩쿠르에 초청받아 온 내게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당연히 무턱대고 돌아다니거나 하진 않을 생각이다.
“자, 내리자.”
“예.”
비행기가 멈춰 섰고, 곧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 시작했다.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빅토르도 기내에 가지고 온 짐들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
비행기에서 내려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사뭇 다른 풍경이 보였다.
물론 공항이라는 곳이 대부분 다 평지라서 비슷비슷하겠지만, 하늘만 보더라도 모스크바의 하늘과는 약간 느낌이 달랐다.
우리가 내린 곳은 B 터미널이었다. 조금 걸으니 출입국 관리소가 보였다.
입국 심사는 출국했을 때만큼이나 간단했다.
심사관이 우릴 알아보진 않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 □□ □□□.』
“감사합니다.”
심사관의 프랑스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난 러시아어로 그냥 대답했고, 심사관과 나는 서로 웃었다.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혼용되어 쓰인다. 특히 수도인 브뤼셀은 거의 이중 언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중 내가 할 줄 아는 언어는 없었다.
영어는 어느 정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와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살짝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캐리어는 제가 하나씩 들어 드리죠.”
그래도 빅토르와 아나스타샤가 있어 다행이었다.
수화물 찾는 곳에서 캐리어도 찾은 우리는 게이트 밖으로 나와서 길을 따라 걸었다.
저쪽 너머엔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막 도착한 친구나 가족 혹은 관계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저편에서 익숙한 문자를 발견했다.
“어……?”
“저거 네 이름이네.”
한 중년 여성이 든 피켓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