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5화
호스트 패밀리에서 마중을 나와 주겠다는 이메일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난 공항에 도착하면 유심부터 사고 다시 연락을 해 볼 생각이었다.
원래 외국에 도착해서 사람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피켓을 들고 서서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러시아어였다. 벨기에는 대부분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 정도가 공용어였고 러시아어 사용자는 드물다.
이메일로는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으니 아마 러시아어는 하지 못하실 텐데, 그럼에도 저렇게 멋진 필체로 내 이름을 쓴 걸 보니 아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신 게 아닌가 싶다.
난 얼른 그쪽으로 가 보려 했지만, 바로 옆의 피켓에도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 저기.”
“응? 어? 내 이름도 바로 옆에 있네?”
아나스타샤의 이름 피켓을 든 건 중년 남성이었다. 아마 아나스타샤의 호스트 패밀리인가 보다.
우릴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같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초청받은 연주자들은 각각의 호스트 패밀리의 집에 머물게 되어 있다.
그러니 아마 저분들은 우연히 이 공항에서 만나서 우릴 기다리게 된 게 아닌가 싶다.
“…….”
날 부르는 피켓 앞으로 가기 전에,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나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서로의 표정을 보긴 어려웠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나스타샤와 만나서 벨기에에 도착하기까지 정말 즐거웠다.
혼자였다면 콩쿠르 일로 머리가 가득 차서 복잡했을 텐데 그녀가 있어 준 덕분에 여행에 나선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이제 헤어져 각자 지정된 호스트 패밀리에게로 갈 때가 온 것이다.
다음에 만나는 건 무대 위겠지.
아나스타샤도 말이 없었다. 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기억해 놓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함께하는 건 여기까지네요.”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차피 며칠 있으면 또 만날 거잖아?”
“그래도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 않을까요?”
“왜 아니니? 우리가 달라지지만 않으면 거기가 어디든 상관없어.”
달라지지 않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난 안다, 우린 이미 달라졌고 앞으로도 계속 달라질 것이란 걸.
하지만 걱정만 드는 건 아니었다.
우린 음악의 유산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로서 변치 않는 가치들을 높게 여기지만,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분명하고 강렬하게 변화해야만 한다는 이중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러 방법을 추구해 봐도 항상 올바른 답은 한 가지였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변해야 할 것은 변할 뿐.
그것을 혼동하지만 않는다면 아마 무엇을 하든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정신을 믿었다.
희망적인 미소와 함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금 더 높은 곳이었으면 해요.”
“나도 그렇긴 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동조하고는 내 손을 맞잡았다.
오늘 만났을 때 했던 포옹과는 다른, 음악가들의 인사였다.
이렇게 손을 잡고 그 힘을 가늠해 보면 우린 서로의 컨디션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포옹만큼이나 따뜻하고 상냥한 기운을 손으로 전달받으면서, 난 모든 잡념을 떨쳐 내고 상쾌하게 그녀와 헤어질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럼 갈까요.”
“응.”
그리고 우린 각자의 이름이 적힌 피켓으로 향했다.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똑같은 방향으로 갔지만, 도중에 말을 나누는 일은 없었다.
지금부턴 한 달 넘게 머물러야 할 호스트 패밀리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
첫 만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둔 바가 많았다.
다행히 영어로 대화는 가능할 것 같으니까…… 정중하게 감사부터 표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할 생각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거의 벨기에 전체의 큰 축제처럼 여겨진다.
때문에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하는 가정들도 워낙 많아 경쟁률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세를 지는 입장인 것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자연스레 난 예전에 내가 호스트 패밀리 역할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예카테리나를 머물게 해 주었을 때였다. 내가 그녀에게 바랐던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완전한 컨디션으로 무대에 올라 실력을 남김없이 보이는 것뿐이다.
지금은 반대 입장이지만 아마 저분이 내게 바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봤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다가가자 피켓을 든 쪽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정확하게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소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난 선글라스를 벗으며 영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제 이름이 적힌 피켓을 보고 찾아왔어요.}
중년 여성은 내 인사를 듣고 환하게 웃었다. 이메일을 몇 번 주고받으면서 인사는 미리 해 두었다.
난 저분의 이름이 데보라 랑스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데보라는 피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명료한 영어는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이렇게 기다리길 잘했네요. 알아보기 편했죠?}
{예, 덕분에.}
{그래요…… 아, 내가 데보라 랑스예요. 한 달 동안 당신을 책임질 사람이죠.}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일까. 데보라 아주머니는 이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했던 만큼 매우 적극적이고 친절했다.
한 달 동안은 마음 놓고 맡겨 달라는 모습이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난 준비했던 대로 예의 바른 태도로 답했다.
{잘 부탁드려요.}
{그나저나, 원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러시아어로 말해 볼래요?}
{……예?}
{어서요.}
난데없는 요청에 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한 달 내내 그냥 영어로 소통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내 영어 실력을 기를 기회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데보라 아주머니는 지금 첫인상을 제대로 확고하게 잡고 가고 싶으신 것 같았다.
언어에 따라서 말투는 물론이고 성격도 조금 바뀐다는 건 널리 통용되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영어로 말할 땐 변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가면을 쓰고 무언가를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한 달 동안 맡을 사람을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영어를 잠시 멈춰 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요구였다.
난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데보라 아주머니가 그냥 무작정 날 맡은 게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굉장히 노련한 분이라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런데 온통 영어 인사말만 준비해 뒀다가 갑자기 러시아어를 하려니 머릿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아무 말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네요.”
“다행이네요. 감사합…… 어라?”
무심결에 대답하던 난 위화감을 느꼈다. 이어져선 안 될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 말 이해하시나요?”
“그럼요.”
“어, 어떻게요?”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언어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호스트 패밀리 집주인 아주머니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러시아어가 나오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재미있는 모습을 봤다는 듯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프하하, 내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이야기 안 했던가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호스트 패밀리로 낙점된 데에도 내 러시아어 실력이 꽤 중요했었는데.”
“이메일로는 저희 영어로 대화했었잖아요?”
“그거야 내 컴퓨터로는 러시아어 자판을 쓸 수가 없어서 그랬죠.”
그제야 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흔한 상황은 아니다. 난 국제 콩쿠르가 어떻게 진행되고 호스트 패밀리가 어떤 시스템인지 안다.
절대로 연주자 개개인의 국가나 성격 등을 맞춤 형식으로 짝지어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작위인 것이다.
때문에 운이 안 좋으면 콩쿠르가 진행되는 내내 호스트 패밀리와 말 한마디 못 섞고 손짓 발짓으로만 대화하는 일도 빈번했다.
단지 먹고 자는 일과 피아노 연습만 도움받는 것이다.
그런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러한 언어 문제도 가급적 해결하려고 한 것 같았다.
한 달이나 진행되는 장기 콩쿠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콩쿠르 운영 위원회에서 날 신경 쓴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되었다면 내게 나쁠 건 없었다.
오래 봐야 할 분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안심마저 된다.
안도하는 내 모습을 본 데보라 아주머니는 싱긋 웃더니 내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쨌든, 뒤에 계신 분은 전담 경호원?”
“예, 맞아요.”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온 사람들도 지금 잘 있어요.”
“죄송해요. 혹시 실례가 되진 않았나요?”
미리 앞서 이메일로 대화를 주고받은 건 콩쿠르를 준비하는 일정 등을 합의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내 경호 문제로 사람들이 벨기에로 먼저 넘어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과 소로킨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내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호스트 패밀리의 상황을 점검하고 보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데보라 아주머니는 흔쾌히 승낙해 주셨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보안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서 집에 손을 댄다는 건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정말 기우였던 것 같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실례라뇨? 전혀. 우리 집에 보안 시스템을 설치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요? 그렇지 않아도 CCTV를 달고 싶었는데 아주 잘해 주더라고요.”
“아하하, 그랬나요?”
다행히 딱히 문제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이다. 소로킨이 알아서 잘해 준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도를 지나친 부분이 있는 건 아닌지 나중에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데보라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다행이었다.
아주머니와의 첫인상은 굉장히 좋았다. 아주머니도 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고.
다만 공항에서 기다리는 사람과 승객들이 뒤섞이지 않도록 쳐져 있는 밧줄이 아직 가운데에 있어서 조금 거슬렸다.
데보라 아주머니 역시 웃더니 옆쪽으로 손짓했다.
“이렇게 서서 하기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으니까, 슬슬 친구랑 같이 넘어와요. 저쪽 끝에서 보죠.”
“아나스타샤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요? 같이 가야죠.”
모르는 나라에 왔으니 놀랄 일이 많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예상하지 못한 일로 놀라게 되니 당혹스러웠다.
같이 간다니? 어딜? 옆을 힐긋 보니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호스트 패밀리 집주인인 남성과 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아나스타샤는 저분이랑 같이 가야지. 왜 우리랑 같이 간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데보라 아주머니는 그제야 내가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곤 웃으며 말했다.
“아, 설마 내가 혼자 온 것 같았나요?”
“예?”
“하하하하, 옆에 이 사람, 남편 친구인데 같은 동네에 살아요.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예!?”
그렇다면…… 집은 따로 있지만 가까이 있다는 건가?
참가자들이 칠십삼 명이나 되면 브뤼셀에 골고루 퍼뜨린다 하더라도 당연히 겹치는 동네가 나온다.
그런데 나와 같은 동네에 온 것이 아나스타샤일 줄은 몰랐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짧게 덧붙였다.
“친구랑 자주 볼 수 있겠네요.”
“아…….”
물론 놀러 온 것이 아니니까 자주 보러 다니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 다음으로 찾아온 감정은 바로 창피함이었다. 조금 전에 멋지게 작별 인사까지 했는데…… 다시 같이 가야 한다고?
“…….”
다시 아나스타샤 쪽을 돌아보자 그녀도 마침 같은 설명을 들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선글라스 없이 눈을 마주친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폭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