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66화 (1,066/1,277)

##  1066화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한 분의 이름은 제라르.

데보라 아주머니의 남편과 친구분으로, 평소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공연도 자주 보러 다니고 호스트 패밀리 신청도 자주 하였는데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이렇게 손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건 몇 년 만이라면서 굉장히 기뻐하셨다.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면서 우린 여러 사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저 피켓에 이름을 써 준 것도 나예요. 제라르는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거든. 대신 저 집 아이가 러시아어를 조금 해요. 그러니까 조금 답답해도 참아요.”

“괜찮아요. 전 영어 잘하거든요.”

아나스타샤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곳에 가도 상관없어할 사람이긴 했다.

아무튼 상황이 꽤 좋았다. 네 사람이었지만 서로 인사를 하고 친해지는 데에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대화도 잘 통하고 일단 서로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첫인상이 나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호스트 패밀리는 자신이 맡은 참가자를 응원한다고 한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벌써 여기 계신 두 분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이야기하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네요. 이동할까요?”

데보라 아주머니가 먼저 제안했다.

같이 이야기하는 건 좋았지만 공항은 대화를 나누기에 너무 시끄러운 곳이었다. 때문에 우린 일단 차로 가기로 했다.

“올 때 한차로 왔죠. 갈 때도 그렇게 하려고요. 제라르와 아나스타샤는 중간에서 내려 주면 되니까.”

“그러면 되겠네요.”

“걱정 마요. SUV라서 차는 크거든. 여기 모두가 타도 충분히 자리가 남아요.”

캐리어가 네 개에 가방이 두 개. 거기에 빅토르까지 있어서 어떻게 되려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데 계속 가만히 있으면서 데보라 아주머니께서 무언가를 물어볼 때만 고개를 끄덕이던 빅토르가 처음으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운전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랑스 씨.”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마중까지 나와 주셨으니 가는 길은 제가 서비스하죠.”

정중한 그 목소리는 상당히 멋졌다. 빅토르만 한 사람을 운전기사로 고용할 수 있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잠시 빅토르를 지켜보더니 이내 쿨하게 키를 넘겨주었다.

“잘 부탁해요.”

“걱정 마십시오.”

빅토르는 고개를 까딱이며 답했다.

난 지금 빅토르가 운전하기로 한 것이 단순한 서비스나 호의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내가 타고 갈 차량의 운전대는 반드시 자신이 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어느 때나 변함없이 날 우선 생각해 주는 그가 무척 고맙다.

“갑시다.”

그렇게 데보라 아주머니가 앞장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오니 4월의 햇살이 쨍쨍했다. 모스크바보다 더 따뜻한 느낌이었다. 주위를 보니 이미 봄이 완연해서 초록색이 많이 보였다.

주차장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데보라 아주머니는 우릴 커다란 차 앞으로 안내했다.

미리 말했던 것처럼 다섯 명이 타도 충분할 정도로 큰 SUV였다.

캐리어들을 올리고, 빅토르가 운전석에 탔다.

처음 보는 차량일 텐데도 그는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쉽게 시동을 걸며 사이드 미러 등을 조정했다.

“이렇게 편하게 갈 줄은 몰랐네요. 기분 좋네, 뭔가.”

뒷좌석에 탄 데보라 아주머니는 싱글벙글 웃었다.

곧 모두가 올라타자 빅토르가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운전 실력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다.

조용하고 흔들리지 않게 빅토르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그의 운전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운전에 신경을 쓸 일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그녀의 관심은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가까이 있는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것 같았다.

“타티아나에 대해선 미리 많이 알아봤어요. 그런데 아나스타샤에 대해선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네요. 두 사람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뭐…… 대신 제라르가 공부했을 테니까. 그렇죠, 제라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우리가 러시아어로만 대화하자 제라르는 짤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본래 조금 과묵하신 분 같기도 했고, 여자 세 명이 이야기하는 데 끼어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어진 이야기는 거의 러시아어였고 나와 아나스타샤에 대해서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우리 두 사람이 친한 친구이지만 이제 경쟁자라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선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데보라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만큼 나 역시 아주머니께 궁금한 것이 꽤 많았다.

“혹시 이런 질문 해도 괜찮을까요?”

“무엇이든 하세요.”

“저기…… 러시아어는 어떻게 배우신 건가요? 굉장히 능숙하신데. 혹시 유학이라도 하셨나요?”

잠시 이야기하면서 느낀 바로는 데보라 아주머니가 구사하는 러시아어는 그냥 취미로 익혀 회화만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당히 어려운 단어들도 정확한 발음으로 말할 정도로 수준 높은 실력을 지니신 걸 보니 아마 중요한 곳에서 러시아어를 쓸 일이 많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유학은 아니고, 내가 원래 외교관이었거든요. 또 여기가 브뤼셀이다 보니까 여러 언어를 할 필요가 있어서.”

“대단하시네요.”

“지금은 아니니까 대단할 건 없고요.”

아직 젊으신데 왜 외교관 일을 그만두셨는지는 몰라도, 난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공용어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그리고 외국어로 영어와 러시아어까지 하시는 거네요?”

“거기에 스페인어와 아랍어도 조금 하죠.”

“그게 어떻게 안 대단한가요?”

다중 언어를 하는 사람들은 많다.

나만 하더라도 세 개 언어를 할 수 있었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섯 개나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한다 하더라도 기초적인 회화일 가능성이 높고.

내가 눈을 빛내며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언어를 익혔는지 궁금하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기분이 좋으신지 자신이 공부한 방법과 언어들을 구분 지어 사용하는 법 등의 노하우를 말해 주셨다.

물론 내가 지금 듣는다고 해서 당장 도움이 될 만한 노하우는 아니었지만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는 사이 차량은 서서히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네로 들어섰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브뤼셀 남동부였다.

“거의 다 왔어요. 저기 표지판 보이죠?”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우아테르말부아포르watermael-boitsfort. 프랑스어니까 아마 읽기 어렵겠네요.”

한 번 듣고는 따라 하기 어려운 발음이었다. 프랑스는 예전에 가 본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난 프랑스어는 봉쥬르 외엔 할 줄 모른다.

주택들이 늘어선 정경과 낯선 단어들. 확실히 아까 공항에서보다 더 외국이란 느낌이 들었다.

동네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우린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라르 아저씨와 아나스타샤가 내리면서 인사했다.

{먼저 갑니다.}

“진짜로 다음에 봐, 타티아나.”

마음 같아선 두 사람을 붙잡고 근처 카페라도 가서 차 한잔 하면 어떻겠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내 멋대로 그러면 민폐가 될지도 모르고, 지금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아까 헤어지기로 결정까지 했는데도 자꾸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어리광 역시 늘어난 까닭이었다.

난 적당한 시점에서 내 약해진 마음을 다잡는 일이 필요함을 알았다. 때문에 지금은 그냥 보내 주기로 했다.

“…….”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에야 다시 차가 출발했다.

그러자 데보라 아주머니가 살짝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근처에서 차라도 한잔할 걸 그랬나…….”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생각보다 단호한 면이 있네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아주머니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면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이 먼 거리를 와서 다른 나라 대회에 참가한다면 거두어야 할 결실은 단 하나뿐이라고.”

“…….”

“꼭 그 결실을 입에 넣는 게 타티아나이길 바랄게요.”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제 세 명이 남은 차 안에서 잠시 환담이 오가길 10분 남짓,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금방 내가 머물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이곳을 쭉 지나오면서 느낀 건데, 아마 브뤼셀에서도 상당히 집값이 높은 지역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주택들의 크기가 큰 것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좋았다.

내가 정말 운이 좋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차에서 내려 데보라 아주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자, 잘 왔어요. 환영해요.”

“신세 지겠습니다.”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도 좋아요. 그럼 일단 집 소개부터 간단하게 해 줄까요?”

“예, 부탁드릴게요.”

난 아주머니에게 간단한 안내를 받기 시작했다.

거실과 주방, 화장실, 서재…… 그리고 2층엔 안방과 손님방, 발코니 등이 있었다. 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내게 손님방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계단을 내려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1층 끝에 있는 방이었다.

“아무래도 피아노가 필요하다 보니까, 원래는 거실에 있었던 건데 아들이 옮겨 줬거든요? 그런데 2층으로 올리긴 너무 힘들어서.”

“제가 연습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건가요?”

“당연하죠. 호스트 패밀리를 선정할 때 참가자의 연습 시간을 보장할 수 있는지 여부도 중요하게 보니까요. 확실히 해 줘야죠. 당연히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 할 일이고.”

그래도 거실에 있던 피아노를 일부러 옮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괜히 죄송스러웠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는 다른 착각을 하셨는지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아들은 대학생인데 지금 학기 중이라 여긴 없으니까.”

“아, 그런 걱정은 아니었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호스트 패밀리의 가족이 많다 하더라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게 난 제공받은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한 눈에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창문으로 햇빛도 잘 들어오고, 침대와 침구류도 굉장히 깨끗했다.

내가 앉아서 무언가 할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도 하나씩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창가 쪽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였다.

방금 전에 아주머니가 말했듯 호스트 패밀리에겐 참가자들의 연습을 보장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랜드 피아노가 아니라 업라이트 피아노를 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엔 정말 곤란하다.

왜냐하면 피아노 연주자들은 그 차이를 매우 민감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물론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습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으로 섬세하게 자기 음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악기의 차이는 굉장히 큰 차이를 가지고 온다.

‘콘서트용 풀 사이즈는 아니지만…… 이거면 충분해.’

파치올리의 그랜드 피아노. 한눈에 봐도 조금 짧아 보이는 작은 그랜드 피아노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에 난 감사했다.

“피아노를 만져 봐도 될까요?”

어쩔 수 없는 연주자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까 콩쿠르의 결실에 대해 이야기했듯, 아주머니는 내가 피아노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난 본래 피아노에 조금 미쳐 있는 사람이다.

바로 뛰어가서 피아노를 만지지 않고 허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참을성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한 지금, 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바로 피아노 앞으로 향한 뒤에 우선 피아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이 공간과 피아노의 크기를 제대로 체감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건반 앞에 서선 덮개를 들어 올렸다.

난 선 채로 건반을 하나 눌렀다.

“…….”

딩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소리의 부피와 질감 그리고 깊이감을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잠시 느낌으로써 이 피아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내 뒤편엔 연주를 기대하는 청중이 한 명 서 있다.

당장 가장 가까운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큰 무대에 서지 못하겠지.

난 가볍게 웃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 제대로 양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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