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67화 (1,067/1,277)

##  1067화

브뤼셀에 살면서 예술 활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티켓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직접 관람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며, 지불한 티켓값으로 예술계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음을 자랑스레 여긴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직접적인 참여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조금 더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이처럼 열정이 넘치고 적극적인 후원자들에겐 매년 가장 주목해야 할 콩쿠르가 있다. 바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다.

브뤼셀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그 콩쿠르를 관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을 집에 초대하여 머물게 하면서 콩쿠르 준비를 도울 수 있었다.

데보라 랑스는 그런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또 이 시즌이 돌아왔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매년 피아노, 첼로, 성악, 바이올린 순서로 열린다.

데보라는 종목을 가리지 않고 해마다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하고 있었다.

물론 지원한다고 해서 매번 되는 건 아니었다.

연주자로 참가하는 것만큼이나 호스트 패밀리 역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었다.

‘벌써 네 번째인가?’

그래도 데보라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아테르말부아포르에 있는 랑스가는 치안도 좋고 교통도 나쁘지 않으며 주택 간의 간격도 넓었다.

음악가들의 연습 장소로서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그 덕분인지 데보라는 10년 넘게 지원하면서 세 번이나 호스트 패밀리가 될 수 있었다.

이번으로 네 번째였다. 이쯤 되면 프로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런데 이번엔 이전과 약간 달랐다.

‘콩쿠르 측에서도 이 애를 보는 분위기가 다르던데…….’

올해 피아노 부문의 호스트 패밀리로 낙점되고 나서 데보라는 어떤 연주자를 맡게 될지 기대하고 있었다.

누가 오던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응원할 생각이었기에 그 이상의 바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콩쿠르 진행 위원회의 사람이 직접 와선 데보라에게 연주자의 프로필을 건네며 부탁했다.

이전에도 잘해 왔으니 믿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더 잘 케어해 주길 바란다는 부탁이었다.

데보라는 황당했다. 콩쿠르 측으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로필을 본 그녀는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운이 좋은 거겠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작년 말 그녀가 낸 음반은 클래식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많은 평론가와 음악가들이 모두 앞다투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나서는 탓에 데보라는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음반도 한번 들어 볼까 했지만 품절 상태라 구할 수 없었고, 인터뷰 내용 등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음악적 재능 다음으로 부각되는 건 바로 그녀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베르체노프 콘체른. 러시아의 거대한 재벌 기업이었다.

외국 기업이니 일반적으론 잘 모르는 게 정상이겠지만, 외교관으로 근무하였기에 러시아에 대해서도 잘 아는 데보라는 베르체노프가 얼마나 큰 기업인지 알고 있었다.

‘보안 시스템을 설치한다고 해서 놀라긴 했지.’

회장이 딸을 애지중지한다고 알려진 것처럼, 그녀가 타티아나의 호스트 패밀리로 확정되자마자 바로 베르체노프에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는 직원들을 보내기까지 했다. 데보라는 흔쾌히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것이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지만 베르체노프라고 하니 간신히 납득이 갔다.

그렇게 타티아나를 직접 보기 전부터 놀랄 일이 많았다. 때문에 데보라는 약간 긴장하기도 했다.

벌써 네 명째이다 보니 젊은 음악가들을 맡아 케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어떻게 봐도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타티아나를 직접 보자마자 사라졌다.

“…….”

타티아나의 첫인상은 데보라의 기대치를 한참이나 상회했다.

데보라는 인터뷰에서 본 모습이나 인터넷의 사진 등으로 타티아나가 어떤 사람일지 예상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실제로 본 타티아나는 그런 것으론 도저히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남다른 분위기가 돋보이는 소녀였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 되었을 뿐인데 여느 원숙한 프로 연주자들과 비견해도 될 법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배경이나 나이에 걸맞게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애먹게 할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되레 호스트로서 도와줄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녀가 준비해 놓은 건 피아노 한 대뿐이었다. 조율도 제대로 하긴 했지만 타티아나가 이 피아노를 마음에 들어 할진 미지수였다.

데보라는 피아노 앞에 선 타티아나를 보며 살짝 긴장했고, 이윽고 피아노를 한 바퀴 돈 타티아나가 만족한 표정으로 웃자 안도할 수 있었다.

‘혹시 한 곡 들어 볼 수 있을까.’

당연히 피아노 앞에 피아니스트가 있으니 그 정도 기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외국에 온 타티아나에게 다짜고짜 연주를 부탁하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데보라는 말을 아꼈다.

천천히 쉬게 하고 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요청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힐긋 고개를 돌려 데보라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의자에 앉아선 양손으로 건반을 짚었다.

“……!”

무어라 할 틈도 없었다.

갑자기 펼쳐진 음악은 방 안의 모든 공간을 장악하고 데보라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집주인인데도 데보라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 음악에 붙들렸다.

‘우리 집 피아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지?’

남편이 취미로 종종 연주하고, 가끔은 초청받은 사람들이 연주하기도 해서 데보라는 이 파치올리 그랜드 피아노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가 자아내는 소리는 그전에 들었던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았다.

훨씬 더 감미로우면서도 선명하다. 마치 물 흐르는 듯, 그러면서도 깊은 계곡에서 느껴질 법한 음산함을 안고 있는 아르페지오가 타티아나의 손에서 흘러나와 귀와 마음을 뒤흔들었다.

겨우 몇 초 연주했을 뿐이지만 이미 데보라는 그녀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세자르 프랑크…….’

전주곡, 코랄과 푸가. PWV 21.

벨기에 출신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관현악과 실내악으로 유명한 작곡가이기에 피아노곡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생전에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로 굉장히 명성을 떨친 음악가였다.

60세가 넘어 그 음악성의 완성도와 원숙함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이 바로 이 전주곡, 코랄과 푸가였다.

데보라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무척이나 좋아하였기에 여러 곡을 들어 보았고, 덕분에 이 곡도 어떤 음악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깊이 있고 아름다운 곡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상 연습용으로 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목에서 보여 주듯 이 곡은 전주곡으로 시작된다.

낯선 환경에서 처음 보는 피아노로 연주하는 첫 곡인 만큼 이 전주곡으로 여러 가지를 알아보는 건 좋은 방법이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확인하듯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터치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건반에서 올라온 소리들은 그저 실험용이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손을 타고 올라와 하나로 엮어져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음악의 넝쿨은 스멀거리며 데보라에게도 옮겨 왔다. 어느샌가 그녀의 양팔엔 소름이 돋아 있었다.

“…….”

전주곡이 끝난 다음엔 코랄이 이어진다. 세자르 프랑크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오르간 연주의 뉘앙스가 물씬 풍겨 온다.

넓은 아르페지오로 오르간의 울림을 재현하고, 오르간의 여러 음색은 성부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 드러낸다.

최소 세 개의 성부가 동시에 연주되었다. 거기엔 언뜻 사람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혹시 타티아나가 입을 열어 노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느긋한 속도의 찬송가는 조금씩 소리들을 더해 갔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타티아나는 건반을 짚어 가며 오르간 사운드의 핵심인 아르페지오를 구사했다.

거기에 필요한 음이 몇 개 더 붙었고, 훨씬 더 어려워졌지만 그녀의 자세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내 코랄의 부르짖음은 피아노 독주곡 형태로 변모하여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귀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화려한 선율을 동반하며 마무리되었다.

“…….”

마지막으로 이어진 것은 푸가였다.

타티아나는 세자르 프랑크가 어떤 구상으로 이 세 개의 악곡을 합쳤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청중에게도 알려 주고 있었다.

세자르 프랑크가 쓰고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푸가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남은 푸가의 에센스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을 정도로 깔끔하고 정교했다.

고전 푸가에는 없는 화려한 하이라이트가 빛을 발한다. 눈앞이 번쩍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강렬한 화음이 전신을 때린다.

타티아나는 어깨를 살짝 떨며 양손을 건반에 박아 넣었다.

그 동작은 간결했으나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성인 남성이 힘자랑을 하듯 호쾌하게 연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압도적이었다.

숨도 못 쉬고 지켜보는 사이 다시 음악은 전주곡의 선율을 반복하며 이번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이 음악이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데보라는 피아니스트가 아닌데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곡이면…… 첫 라운드는 무조건 통과하지 않을까…….’

데보라는 콩쿠르 참가자들의 음악을 듣고 자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 역시 좋아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음악은 그녀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처럼 느껴졌다.

고전적인 견고함과 낭만의 화려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연구하고 받치는 현대의 피아니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이 정도로 수준 높은 곡을 이 어린 피아니스트가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경쾌한 속도로 피날레를 향해 다다른 음악은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타티아나의 손에서 끝났다.

“세상에, 타티아나. 이럴 수가.”

“갑자기 죄송해요. 생각나는 벨기에 작곡가의 곡이 이것뿐이어서.”

감탄에 말을 잇지 못하는 데보라에게 타티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대체 뭐가 죄송하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데보라는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세자르 프랑크의 피아노곡을 들어 본 건 처음이에요.”

“아, 역시 알아보셨네요?”

“타티아나야말로. 보통 세자르 프랑크는 대부분 프랑스인으로 알던데.”

세자르 프랑크는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태어나 피아노를 배웠으나 파리 음악원으로 유학을 간 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본격적인 음악가로 활동하게 된다.

때문에 그의 출신은 조금 가려진 부분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전 알아야 하니까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고 있으니 공부를 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보라가 타티아나에게 느끼는 호감은 무척 높았다.

정말 좋은 음악을 들었고, 또 이렇게 자신의 집에 와 준 타티아나가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서 기뻤다.

데보라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콩쿠르 무대에서 이 곡을 칠 예정인 거죠? 굳이 벨기에 출신 작곡가를 고를 필요는 없지만 이 정도 실력이라면 심사 위원들을 완전히 타티아나 편으로 구워삶는 건 식은 죽 먹기겠어요.”

사실 다국적 심사 위원들 앞에서 벨기에 출신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되레 더 까다롭게 보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 까다로운 심사를 일부러 끌어내 정면으로 돌파해 버리면 그보다 완벽할 수가 없다.

데보라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콩쿠르 프로그램 곡은 아니에요.”

“예?”

“그냥 들려드리고 싶어서요.”

“예……?”

데보라가 아연실색하며 되물었다.

단순히 호스트 패밀리의 집주인이 기대하는 시선을 조금 보냈다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간 연습해 온 곡이 아니라 일부러 벨기에 작곡가의 곡을 골랐다는 것을 데보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신경을 써 준 것도 기막힌 일이고, 심지어 타티아나가 이번 콩쿠르를 위해 준비해야 할 곡이 열 곡도 넘는데 그 와중에 이 정도로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남아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거의 기적 같은 일을 겪은 기분이라 멍하니 타티아나를 보던 그녀는 약간 창피한 듯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냥 연습하던 곡을 연주해 볼 걸 그랬어요. 방금 전 곡은 길이도 길고…….”

“아뇨! 최고로 좋았어요!”

콩쿠르 프로그램에도 없는 곡을 일부러 자신을 위해 연주해 주었다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단지 너무 호사스러워서 당황했을 뿐이다.

“그, 그럼 다행이고요.”

타티아나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이제야 다른 사람의 집에서 처음 만지는 피아노였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데보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피아노를 보곤 눈빛이 달라지더니 곧장 엄청난 연주를 선보였으면서, 연주를 마치고 나니까 이젠 으레 그 나이대의 소녀로 보인다.

호스트 패밀리는 기본적으로 콩쿠르에서의 성과 외엔 게스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데보라는 타티아나에게 너무 과한 걸 받아 버리고 말았다.

한 달 동안 그녀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으론 도저히 셈이 맞지 않는다.

타티아나에게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또 얼마나 기대를 걸어야 할지 가늠하면서 데보라는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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