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8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호스트 패밀리에 묵을 때 지켜 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집주인이 좋은 사람이라서 답례를 하고 싶다 할지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호의와 도움을 받으면 갚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도 그것을 금지한 이유는, 만약 답례를 하는 문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정착되어 버리면 호스트 패밀리도 연주자도 순수하게 서로를 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콩쿠르 측에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콩쿠르가 그 명맥과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외적인 부분도 빈틈없이 보수한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지만 친절하게 날 맞이해 주신 아주머니께 무언가 답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피아노를 보자마자 내가 한 것은 한 명의 청중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 머리는 순식간에 이 상황에 맞는 선곡을 떠올렸다.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을 먼저 펼치고 찬송가인 코랄, 맺음이 확실한 푸가로 끝나는 이 곡은 벨기에에 처음 온 내가 벨기에 사람에게 들려주기에 가장 적당한 음악이었다.
물론 세자르 프랑크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공부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에서 활동했고, 그 음악성은 굳이 따지자면 독일의 풍미가 강하지만……
아무튼, 데보라 아주머니는 내 답례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다.
“나 정말 감동이에요. 이런 선물을 받을 줄은 몰라서……. 피아노 연주라니…….”
“어차피 연습은 계속할 텐데요.”
“콩쿠르에서 칠 곡이 아니라면서요.”
“그건 그렇지만요.”
역시 그냥 실력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따로 선곡을 하길 잘한 것 같다.
어디서 무얼 하든 난 첫 단추를 항상 중요하게 여긴다.
고루한 클래식 연주자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오해나 편견이 생겨 버리면 과정은 물론 끝 역시 깔끔하진 못할 것이란 고정 관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뻐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난 이곳에서의 첫 단추를 제대로 채운 기분을 느꼈다.
‘이런 문화라면 생겨도 좋을 것 같아.’
호스트 패밀리의 도움을 받는 모든 연주자가 그들을 위한 연주회를 한다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이미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하게 하고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지만 말이다.
우리 같은 연주자들은 청중을 옆에 두면 손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난 방긋 웃으며 벨기에에서의 첫 번째 청중에게 정중한 묵례를 보냈다.
“즐겁게 들어 주셔서, 그리고 이렇게 좋은 피아노를 준비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요, 타티아나.”
데보라 아주머니는 약간 쑥스러워하시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색하지 않게 내 인사를 받아 주셨다.
분위기도 좋으니 오늘은 연습에 집중하기보다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까 싶다.
그동안 몇 번이나 연주자들을 도와주셨는지, 그리고 혹시 집에서 지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지. 여쭤볼 것이 많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방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빅토르가 소로킨과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양손에 내 캐리어들을 들고 있었다.
내가 데보라 아주머니에게 안내를 받는 동안 빅토르는 이곳에 먼저 와 있던 소로킨과 다른 직원들을 만나러 간 참이었다.
그런데 연주를 하는 사이 볼일을 다 보고 내 짐을 가져온 모양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자 빅토르는 굳이 시시한 건 묻지 말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아가씨 짐은 여기에 두면 되겠습니까?”
“예, 그쪽에 둬 주세요. 이따가 제가 정리할게요.”
“정리 도와드릴까요?”
“그래 주실래요? 다만 그 안에서 제 옷이 뭐가 튀어나올지는 몰라요.”
“……혼자서 하시죠. 이제 그러실 나이잖습니까?”
황당하게도 빅토르는 자기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가 받아치니 뜬금없이 훈계를 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를 흘겨보았다.
옆에 있던 소로킨 역시 빅토르를 노려보았다. 만약 나나 데보라 아주머니가 없었다면 참지 않았을 것 같다.
듬직한 그의 모습이 반가워서 인사했다.
“소로킨. 며칠 만이네요.”
“오시는 데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없었어요. 그보다 소로킨은요? 그간 잘 지냈나요?”
“물론입니다.”
소로킨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날 안심시키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고 나니까 잠깐 밀어 두었던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 내겐 확실한 명분과 정당성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소로킨.”
“무엇입니까?”
“빅토르가 문제예요.”
“…….”
그 말을 하자마자 소로킨은 뭔지 알 것 같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빅토르는 뜨끔한 모습으로 소로킨으로부터 반걸음 정도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그만하라는 듯 내게 사인을 보냈다.
내가 이렇게까지 뒤끝 있고 집요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난 한번 시작한 일을 잘 멈추지 않는 편이다.
“그가 공항에서 저에게 무어라 했는지 아시나요? 병아리 같다고 했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나스타샤 아가씨가 아가씨께 야무지다고 하시길래 동조하면서 예전엔 그랬었다고 했을 뿐이죠.”
빅토르가 곧장 항변했다.
난 그게 그거 아니냐고 다시 따지고 들었고, 빅토르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다시 되받아쳤다.
물론 이 말다툼에서 내가 꼭 이길 필요는 없었다. 곧 소로킨의 천벌이 빅토르에게 닥칠 테니까.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그런데 심판이 내려지기 직전, 갑자기 등 뒤에서 빵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흐흡, 아하하핫.”
“?”
당황해서 돌아보니 데보라 아주머니가 그야말로 배꼽을 잡으며 웃고 있었다.
그제야 난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목을 내가 졸랐구나.’
저 멀리 있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귀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그걸 반격이라고 한 거니? 타티아나.’
시간을 돌리고 싶다. 아니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거나.
일시적 실어증에 걸린 난 뻣뻣한 자세로 데보라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웃던 아주머니는 눈가를 닦기까지 하더니 이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병아리…… 정말로 그렇게 불렸다고요?”
“피아니스트로서는 거의 공룡이나 다름없으시긴 하지만, 그거랑 일상생활은 별개잖습니까.”
“세상에, 세상에나.”
데보라 아주머니는 무척 흥미로워하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난 빅토르의 비유가 또 마음에 안 들었다. 공룡이라니? 대체 왜?
내 불만스러운 눈빛은 빅토르를 향하다가 곧 소로킨에게 돌아갔다.
천벌이 내려지길 바라는 건 이미 틀린 것 같은 분위기고, 그럼 빅토르를 끌고 나가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
그러나 믿었던 소로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난 날카로운 시선으로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애 같은 게 무엇인지 보여 주고 말아야겠다는 오기마저 생겼다.
‘그러니까…….’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집으로 갈 수도 없고, 찾지 말아 달라고 떠날 수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다들 나가 달라고 한 다음 첫날부터 피아노 연습이나 하는 것뿐이었다.
콩쿠르 참가자가 연습에 몰두하는 게 무어 이상하겠냐마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건 내 생각 이상으로 너무 유치한 것 같았다.
잔뜩 토라져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한창 빅토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데보라 아주머니가 뒤늦게 내게 신경을 돌렸다.
“타티아나?”
“예.”
짧게 대답하니 내 기분이 어떤지 전해진 듯하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옅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냥…… 갑자기 반가워서 그랬어요. 기분 나빠 하진 말아요.”
“반갑다니요?”
“대체로 남의 집에 온 연주자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어색해하거나 눈치를 보기 마련이거든요. 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늘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고요.”
일반적으로는 그럴 터였다.
사전에 이메일이나 전화 등으로 연락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말이 안 통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오랜 기간 신세를 져야 할 상황인데 보답할 방법이 없다면 부채감을 느낄 테니까.
그렇게 되면 한동안 정말 어색한 상황이 이어진다.
난 단지 그걸 일찌감치 깨닫고는 약간이나마 해소하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내 연주뿐만 아니라 내가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놀라신 것 같았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오자마자 연주를 해 주었죠. 너무 프로다운 모습이라서…… 열일곱 살의 타티아나를 맞이할 준비를 하던 전 그만 혼란스러워졌어요. 평범하게 대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죠.”
내가 한 연주가 되레 아주머니에게 부담을 준 듯하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내가 특별한 대우를 원했다면 전용기와 호텔을 포기하지 않았을 터였다.
호스트 패밀리에 온 것은 이 국제 콩쿠르에 다른 참가자들과 같은 조건으로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내 주변이 그리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안다. 지금 여기만 해도 경호원이 둘이나 같이 있으니까.
하지만 데보라 아주머니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나 역시 어렵게 대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혹시라도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첫 단추를 다시 확실하게 잠그기 위해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그저 평범하게 대해 주시길 바라요.”
“아하핫, 그러니까요. 지금 보니까 그런 생각들이 다 타티아나의 음악에 홀린 저만의 걱정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방금 전 빅토르와 한바탕한 것 때문에 아주머니는 날 달리 본 것 같았다.
나로서는 추태를 보인 기분이라 조금 창피했지만, 덕분에 아주머니가 날 편하게 생각해 주신다면 이득이 더 많았다.
힐긋 빅토르를 보자 그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나중에 혼을 내 주고 싶다.
이루어지기 어려운 바람을 뇌리에 되새기면서 난 일단 이 분위기에 편승하기로 했다.
아주머니 역시 내 기분이 풀린 걸 느꼈는지 웃으며 제안하셨다.
“차라도 한 잔 마실까요?”
“예, 부디.”
오늘 하루는 연습보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빅토르와 소로킨은 나가고, 난 데보라 아주머니와 단둘이 식탁으로 향했다.
“홍차면 되죠?”
“아뇨, 디카페인으로 부탁드릴게요. 제가 카페인에는 약해서요.”
“아하. 알겠어요. 혹시 그것 말고도?”
“음…… 탄산음료도 못 마셔요. 그리고 음식은 가리는 것이 없는 편인데…… 너무 매우면 잘 못 먹고요.”
“걱정 마요. 매운 음식은 나도 잘 못 먹으니까요.”
한 달 동안 같이 살면서 기본적으로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이렇게 차분하게 하나하나 알아 가다 보면 자연스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즈 힙 차를 한 잔 앞에 두고 난 데보라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식탁 위에 펼쳐진 주제들은 만찬처럼 풍부했다.
아주머니는 내 취향과 평소 연습 시간 등을 파악했고, 나 역시 아주머니에게 생생한 브뤼셀의 이야기나 호스트 패밀리로서 바라는 것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근처는 치안도 좋고 타티아나는 경호원들도 데리고 다니지만…… 그래도 저녁 시간엔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 책임이기도 하고.”
“후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데보라 아주머니는 내게 말씀도 편하게 하시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말을 놓아도 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가 경어를 고수하는 건 버릇 같은 것이라서 쉽게 바꾸기가 어려웠다.
“이것 참…… 첫날엔 편히 쉬게 해 줘야 하는데, 아줌마가 괜히 길게 붙잡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네.”
“괜찮아요. 저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쁜걸요.”
“그렇게 말해 주니 나도 고마워.”
차 두 잔 정도를 마실 시간 동안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이미 나와 데보라 아주머니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기분 좋은 티타임이었다.
그래도 내 피로도를 생각하시는지 데보라 아주머니는 찻잔들을 치우려고 하셨다.
슬슬 적당히 쉬다가 저녁에 다시 봐도 될 시간이기는 했다.
그런데 내가 막 일어서려던 찰나, 현관이 열리더니 낯선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무섭거나 하진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 경호원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터. 그럼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파스칼 랑스. 이 집의 또 한 명의 주인이자 데보라 아주머니의 남편이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파스칼 아저씨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데보라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내 쪽으로 손끝을 향하며 프랑스어로 말했다.
『□ □□ □□ □□□□ □□? □□□ □□□ □□ □ 피아니스트□□.』
『아, 아아.』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일단 날 가리켜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하셨다는 건 알겠다.
프랑스어는 하나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데보라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나 역시 태도와 정중함으로 내 인사를 이해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 합니다. 길게 신세 지게 되었습니다.”
“그…… □□□. 녕안하십니까.”
“?”
파스칼 아저씨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귀에 이상한 러시아어가 들렸는데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데보라 아주머니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탕탕 때리며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