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9화
외교관이었던 데보라 아주머니의 러시아어가 너무 유창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여긴 벨기에 브뤼셀이었다.
벨기에인들 중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파스칼 아저씨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만 하셨다. 평균적인 브뤼셀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데보라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영어로 간단한 회화 정도는 아마 가능하실 거라고 하시길래 말을 붙여 봤지만 아저씨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보라 아주머니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이는 어눌한 언어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봐.”
“대화만 되면 상관없지 않나요?”
“글쎄? 그런 것보다는 네 앞에서 더듬거릴 바엔 차라리 입 다물고 근엄한 척하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아까 녕안하냐고 러시아로 인사하셨는데 데보라 아주머니가 깔깔거리고 웃어 버린 탓에 파스칼 아저씨는 두 번 다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으신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가 빠르게 아주머니를 불러서 프랑스어로 물었다.
『□□ □□ □□□ □□□?』
『아, □□ □□□. □□□ □□ □□□ □□□□□ □□.』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분위기를 보니 아주머니가 웃으며 이야기하신 것이 또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묻고 계신 것 같은데…… 정확하게 짚으시긴 했다.
문제는 아주머니가 작정하고 속이면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거지만.
끼어들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난 멀거니 서서 두 분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윽고 두 분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파스칼 아저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 □□ □□□□…….』
{걱정 마세요. 전 랑스 씨가 러시아어로 인사해 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
내가 프랑스어를 알아듣고 말했다고 생각하는지 깜짝 놀라신 눈치다. 난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영어로 이야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은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영어로 간단한 회화는 가능하다고 하셨으니 내가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면 된다.
빙그레 웃으며 제안했더니 아저씨도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내 진의가 통한 것이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희한하다는 듯 물었다.
“아는 영어도 말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왜 굳이 그렇게까지 말을 붙이려고 하니? 너만 불편하게.”
“불편…… 글쎄요.”
아주머니는 내가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한 달이나 신세를 지는데 데면데면하게 지내면 그게 더 불편하지 않을까요?”
내가 당장의 불편함보단 미래의 불편함을 더 크게 여긴다는 걸 듣고도 아주머니는 의아해하셨다.
“그냥 나이 많은 아저씨일 뿐인데? 데면데면하면 어떠니? 그게 당연한 거야.”
“후후, 하지만 첫 단추를 잘 채워 보려고 노력은 하고 싶어서요.”
콩쿠르 참가자로서 호스트 패밀리에 머무는 것이니 제공받는 것만 제대로 제공받고 나머지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성격엔 그게 불가능했다.
감사할 사람들에겐 충분히 감사를 표할 수 있도록, 그리고 두 분이 진정 내 성취를 응원하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물론 내가 노력해도 이후에 잘 안 풀린다면 그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 본 두 분이 그렇게 말이 안 통할 사람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안 될까요?”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그냥 네가 쓸데없는 곳에 심력 낭비를 할까 싶어 그래.”
“쓸데없다니요?”
“필요하면 내가 통역을 하면 되잖니?”
순간 난 아주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만약 파스칼 아저씨와 대화가 하고 싶다면 아주머니에게 통역을 부탁드리면 된다.
물론 그건 아주머니에게 귀찮은 일이 되겠지만, 일단 방법이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무조건 내가 직접 대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모든 것이 어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잘못이었다.
“…….”
“보아하니 내가 통역할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만 생각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푸흐흐.”
내가 당황해하자 아주머니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할 때마다 즐기시는 것 같은데…… 빨리 친해져서 좋긴 하지만 이래선 내 이미지가 너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마침 분위기도 바꿀 겸 잘되었다 싶어서 아주머니에게 바로 요청했다.
“통역을 해 주실 건가요?”
“할 순 있는데…… 네가 이이한테 할 말은 없을 텐데?”
“있어요. 전 영어 말고도 통할 만한 언어를 또 하나 알고 있거든요.”
“?”
그것만으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셨는지 아주머니가 의문을 표했다. 난 일부러 자세히 말하지 않고 에둘러 이야기했다.
“남편분께 20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쭈어 주시겠어요?”
“20분……?”
“예.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아주머니도 시간을 내어 주셨으면 해요.”
곧 내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린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시더니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어머!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옆을 보세요.”
난 짤막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아주머니와 러시아어로 잔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옆에 서 계시는 파스칼 아저씨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지켜보고 계셨다.
내게 정말 관심이 없으셨다면 어색함을 견디실 필요도 없으셨겠지. 그렇다면 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보답할 뿐이다.
“궁금해하시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일지.”
말로 자기소개를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그 자체로 일종의 압력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난 밖에서 절대 내 출신과 배경으로 자기소개를 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내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학생이고 연주자란 위치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방법으로는 말보다 행동이 훨씬 확실하고.
『□□, □□ □□ □□.』
『□?』
『□□ □□. □□ □ □□□ □□ □□.』
데보라 아주머니는 빠르게 프랑스어로 말씀하셨고, 파스칼 아저씨는 약간 당황하신 모습이었다.
난 가볍게 웃으며 뒤돌아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면 청중 두 명이 올 예정이니, 연주자인 나는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
연주를 마치고 나자 갑자기 귀청을 팡팡 울리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파스칼 아저씨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진심으로 감격하셨다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일어나 여유롭게 인사를 보냈다. 박수 소리는 좀처럼 멎지 않았다. 이 정도로 기뻐해 주실 줄은 몰랐다.
내가 20분 남짓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빼앗은 것 같진 않아 다행이었다.
‘멋진 곡을 남겨 주신 세자르 프랑크에게도 감사해야겠네…….’
내가 이번에 연주한 곡도 세자르 프랑크의 곡이었다.
전주곡, 아리아와 피날레. PWV 23.
앞서 데보라 아주머니에게 들려드렸던 곡처럼 여러 형식을 넘나드는 구성이 아름다운 곡이다. 다만, 그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여러 사람이 부르는 코랄 대신 아리아는 조금 더 솔로 가수에 집중한다.
오페라적 스토리에 기반한 이 아리아는 앞선 전주곡과 자연스럽게 달라붙으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피날레다.
낭만적인 발성과 기교로 내 소리를 엮어 냈다. 절대로 오버하거나 과시할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가 랑스 부부를 위한 답례와 내 자기소개를 겸한 자리란 것을 염두에 둬야만 했다.
강한 음악으로 휘두를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며 그저 부드럽게 두 부부의 곁을 머물다가 흩어진다.
언젠가 내가 떠나가야 할 사람인 것처럼 이 음악 역시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베르체노바 양.}
영어로 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무색하게, 파스칼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그리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아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며칠 정도 지나 약간 친해지면 아저씨가 스스럼없이 영어를 쓰셨을 것 같긴 하다.
지금은 그 시간을 20분으로 줄여 놓았을 뿐이다.
난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봐 주셔서 다행이에요.}
{상상을 뛰어넘는 피아니스트시군…….}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감탄이 가득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세요.}
{정말입니다. 고전…… 악기 연주자들이 전자 음원보다 현실에서 훨씬 막강하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베르체노바 양의 실력이 이렇게 높, 뛰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이유는 연주만으로 가능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음원이나 인터넷 영상 등을 보여 주는 것으론 내 음악의 반도 보여 줄 수 없다.
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내 청중 두 명은 제대로 내 음악을 들어 준 것 같았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살짝 흥분해선 파스칼 아저씨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확실히 다르지? 마치 소리가 피부를 타고 오르는 것 같달까…….}
{흔하게 겪을 수 있는 경험은 아니었지. 실력이 거의 눈에 보이던데.}
그렇게 내 연주에 대한 평을 내리려 하시던 아저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시는가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윽고 아저씨는 생각의 결론부터 꺼내셨다.
{드디어 파이널리스트를 보게 되는 건가?}
내 목표도 바로 그것이었다.
대상까지 타면 물론 좋겠지만, 파이널까지만 가더라도 일단 내가 준비한 모든 곡을 세상에 보이고 결과를 낼 수 있다.
그 정도면 콩쿠르에 대해선 납득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스칼 아저씨가 날 좋게 평가해 주시는 것 같아 다시 감사를 표하려는데, 갑자기 데보라 아주머니가 벌컥 성을 내셨다.
{이 사람이 진짜! 그 소리를 왜 지금 해!}
{……뭐가? 당신은 그럼 베르체노바 양도 파이널에 못 갈 거라고 생각해?}
{그게 아니라……!}
말을 하다 말고 아주머니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난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내가 파이널리스트에 가면 안 되나?
그런데 가만 대화의 흐름을 짚어 보니 문제가 내게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 집에선 파이널리스트가 한 명도 없었나요?}
{…….}
내 말에 파스칼 아저씨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고, 데보라 아주머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맞아. 세미 파이널이 한 명. 다른 둘은 예선까지였어.”
“그랬군요. 그럼…… 오래 있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어야 했겠네요.”
“……그랬었지.”
참가자 중 파이널리스트의 비율은 15% 정도. 그러니 전체에서 무작위로 세 명을 꼽아도 거기에 들지 못하는 건 확률적으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스트 패밀리의 입장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가 보다. 상당히 착잡한 기분인지 아주머니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려는데 아주머니는 이를 갈며 남편을 노려보았다.
“아까 네가 지난 참가자들 물어볼 때 내가 일부러 이야기 안 하고 있었는데……! 이 인간이 정말 눈치 없이 왜 이런데?”
지난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 집에서 맡은 참가자들의 결과가 어땠는진지는 전혀 듣지 못했었는데, 굳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걸 굳이 묻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전 괜찮아요.”
“우리 집에 그런 징크스가 있다고 생각하면 재수 없잖니. 그렇지 않아도 예민할 텐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아주머니는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피아노의 상태,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연습의 질, 편한 휴식, 입에 넣는 음식, 머무는 곳의 환경까지 정말 온갖 조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 연주자이다.
심지어는 그날 날씨가 안 좋으면 연주 역시 덩달아 안 좋아지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나 역시 조건들에 영향을 받는다. 어느 곳에서나 완벽한 컨디션으로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는 무적의 연주자는 없다.
하지만 난 내가 불완전함을 알기에 더더욱 대비하고 준비한다.
연주에 방해가 될 징크스를 조심하고 피하는 것 역시 그 준비의 일환이겠지만,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정면으로 마주하고 상대할 필요가 있다.
난 징크스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제가 연주한 두 곡, 징크스에 영향을 받아서 불안정해 보였나요?”
“아니! 내 귀엔 당연히 완벽하게 들렸지.”
“그렇다면 전 괜찮을 거예요.”
담담하게 고하자 아주머니의 표정에도 안심이 서렸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건 기대감이었다.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가만 계시던 파스칼 아저씨가 대충 어떤 말이 오갔는지 이해한 듯 말했다.
{베르체노바 양이 무어라 했는지 알겠군. 우리 집에 징크스 같은 게 있다면 해결해 주겠다고 했지?}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깨부숴 드릴게요.}
살짝 과격한 내 어휘에 파스칼 아저씨가 놀란 눈빛을 했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 나는 결코 미적거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