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0화
내 발언이 어떻게 들렸을까.
콩쿠르 경험은 몇 년 전, 청소년 콩쿠르 한 번. 그 후로도 연주회나 음반 녹음 등을 하긴 했지만 그런 활동과 콩쿠르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피아노만 잘 치면 될 텐데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상관이 있다.
일단 청중들이 모두 내 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리고 실력과 신념을 겸비한 각국의 연주자들은 멀리서 음원 등으로 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소리를 쏟아 낸다.
현장에서 강한 건 나만 가진 강점이 아니다. 대부분의 클래식 연주자들의 특징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무대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신이 안개처럼 뇌리에 끼기 시작하면 연주자는 제 실력을 못 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신적인 문제들이 연주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난 이미 수많은 정신적 문제를 겪어 왔다.
아마 조금이라도 실수했거나 운이 안 좋았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행운, 그리고 정면으로 해결하고자 한 내 의지가 날 여기에 있게 했다.
랑스가에서 파이널리스트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 내 발목을 잡을 징크스 축에도 못 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자신 있게 말한 것 같다.
난 두 분에게 너무 기대를 심어 주고 싶진 않아서 적당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잘해 봐야겠죠?}
약간 놀란 것 같던 파스칼 아저씨는 이내 호탕하게 웃더니 말씀하셨다.
{태도가 아주 좋군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하는 피아니스트라면 역시 그 정도 패기가 있어야지.}
처음엔 조금 과묵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친해지고 나니 그렇지도 않았다.
파스칼 아저씨는 당당한 자세를 굉장히 좋아하시고 표현도 크게 하시는 분이셨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웃자 아저씨는 이어서 옛날이야기를 꺼내셨다.
{가만 보면 베르체노바 양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도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자신감 없이 경험이나 쌓고 가겠다는 연주자들도 있고…….}
{아니, 그런 이야기를 왜 또 하는 거예요?}
{하면 안 됐나?}
{당신은 꼭 한마디가 더 많다니까?}
또다시 끼어든 데보라 아주머니가 파스칼 아저씨에게 면박을 주었다.
내 태도가 아저씨에게 좋게 보인 건 그냥 취향에 맞았을 뿐이지, 사실 다른 음악가들에 대한 평가 기준을 내게 맞출 순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엄청난 경쟁을 뚫은 음악가들일 테니까.
그렇기에 이곳까지 온 프로들의 정신력이 나약하다고 상정할 순 없었다. 단지 불안함을 이겨 내는 방식이 각자 다를 뿐.
{무섭긴 하잖아요? 그 퀸 엘리자베스인데요. 후후.}
{……}
나 역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라서 콩쿠르에서 잘 해낼 것이라고 무작정 스스로를 믿고 있는 건 아니다. 단
지 하던 대로 잘하면 어이없이 떨어지진 않으리란 강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파스칼 아저씨는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내가 무서움 역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 생각이 드셨는지 잠시 침묵하셨다.
{자.}
어려운 이야기할 거면 이런 곳에서 하진 말자는 듯 데보라 아주머니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튼, 저녁때까지 시간이 아직 좀 남았는데…… 어떻게 할래? 타티아나. 그냥 쉬어도 되고, 혹시 괜찮으면 차나 한 잔 더 마셔도 좋고.”
“아까 차 너무 맛있었어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되고말고.”
오늘 하루는 확실하게 랑스가의 부부와 첫 만남을 잘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내 결정은 빠르게 내려졌다.
우린 다시 부엌으로 가서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인사한 시간은 짧았지만 두 분이 날 환대하고 거기에 내가 음악으로 보답한 덕분인지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이미 눈에서 친밀감이 느껴질 정도고, 파스칼 아저씨도 영어로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말씀하셨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난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아까 랑스 씨가 오시기 전에 아주머니에게 다른 곡을 연주해 드렸었거든요.}
{…….}
잠시 기다리는 사이 어떻게 데보라 아주머니와 가까워졌는지 말씀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파스칼 아저씨의 눈빛에 불만이 서렸다.
아주머니에게만 두 곡을 들려드린 것에 대한 불만인가 싶어서 조금 당황했다.
설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실 줄은 몰랐다.
{그…… 죄송해요. 어떤 곡이었냐면…….}
{아니, 그런 것보다.}
{예?}
{왜 난 랑스 씨고 집사람은 아주머니지? 따지고 보면 우리 둘 다 랑스 씨인데.}
듣고 보니 두 분의 호칭에 차이를 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제대로 호칭 정리가 되기 전에 그냥 말을 하다 보면 이렇게 되기 마련이니까.
{어…… 따지고 보면 그런데, 따지고 보지 않아서요?}
{이상한데 솔직한 말이군.}
내 대답에 적당히 납득하셨는지 파스칼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난 이때다 싶어 슬쩍 물었다.
{그럼…… 파스칼 아저씨라고 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럼 나도 타티아나라고 편하게 불러도 될까?}
{당연하죠!}
계속 베르체노바 양이라고 불리는 게 난 조금 어색했다.
내 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러시아에선 모르는 사람들도 날 부를 때는 항상 이름과 부칭으로만 부르니까…… 성을 불리는 건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벨기에에 있는 동안은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날 베르체노바라고 부를 테니 이제 익숙해져야 할 일이지만…… 적어도 이 집에선 타티아나라고 불리고 싶었다.
『□□ □ □□□ □□□□ □□ □□□□?』
『□□□□?』
찻잔을 들고 홀짝이자 두 분은 편한 프랑스어로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하지만 답답함이 느껴지기보다는 내가 외국 가정에 머물고 있단 현실만이 흥미진진하게 와닿았다.
난 찻잔을 든 채로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거실과 부엌 등은 사실 외국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유럽 특유의 모던한 분위기는 분명 존재했다.
그냥 여행을 나와서는 이런 곳을 방문할 기회를 얻기 쉽지 않겠지. 난 여러모로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
약간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두 분의 대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약간 이국적인 음악처럼 들렸다.
난 멍하니 그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음계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 선율 안으로 갑자기 전자음이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오빠였다.
{아, 잠시만요. 집에서 전화가.}
{빨리 받으렴.}
급히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방으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멈춰 서서 전화를 받았다.
“오빠.”
왜 전화를 걸었는지 알 것 같아서 조용히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다짜고짜 핀잔이었다.
-도착하면 전화한다며 이 녀석아. 벨기에에서 내린 게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가고 있는 거야?
오빠나 아버지께서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입으로 한 말이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이미 도착은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전화할 틈이 없었어요.”
-역시 외국에 나가면 가족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 거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에휴, 내 이럴 줄 알았다.
마치 들으란 듯 오빠가 한숨을 푹 내쉬는 걸 들으면서도 난 반박할 수 없었다.
공항에서 내려 이 집에 와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까지 내 머릿속에는 이곳에서의 일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저녁쯤 되면 전화를 했겠지만…… 나도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보다 시차가 1시간 빠른 모스크바에서는 내 전화를 조금 더 늦는 것으로 체감할 테고, 그걸 감안하지 못한 건 내 실수였다.
“제가…….”
걱정 끼쳐서 죄송하다고 다시 한번 사과하려던 난 멈칫했다.
여긴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빠릿빠릿하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오빠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빅토르가 이미 보고하지 않았나요?”
-…….
“했죠?”
정곡을 찔렸는지 오빠가 조용해졌다.
내가 잘 도착했다는 걸 빅토르에게 보고받기까지 했는데 전화를 왜 또 하셨을까?
문득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오빠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못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루슬란 오빠는 예민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상관없다고?
“아뇨, 그건 아니고요. 미안해요.”
-……넌 꼭 이럴 때만 쉽게 사과하더라.
깔끔하게 사과해도 오빠는 못내 찝찝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공항에서 있었던 일과 이곳에 와서 한 일 등을 신나게 이야기해 주자 곧 흥미를 가지고 들었다.
“빅토르 좀 혼내 주세요, 오빠.”
-왜 또.
“저 정말 체면 다 구겼다고요.”
-오, 뭔데? 재미있었겠는데?
“뭐라고요?”
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이번엔 오빠에게 일러바쳤는데 이번에도 나만 바보가 되었다.
체면 운운하면 오빠가 내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지 않을까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냥 빅토르에게는 반항하지 말아야 할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삐쭉이자 오빠가 빠르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건 됐고, 거기 생활은 어떨 것 같아? 괜찮아?
“……진심으로 제가 괜찮길 바라시는 것 맞나요?”
-당연히 진심이지.
이제 와서 더 물고 늘어져 봐야 나만 손해다. 빅토르가 가끔 얄밉긴 해도 진짜로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니…… 그냥 덮고 가야 할 것 같다.
깨끗하게 잊기로 한 나는 오빠를 안심시킬 만한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주인 두 분 다 좋은 분들이시고요.”
-그래? 다행이네.
“일단 오늘 하루는 연습을 살짝 미뤄 두려 해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해야죠. 음…… 그리고 쇼핑도 좀 해야 할 것 같고요.”
-쇼핑?
“예. 짐을 최소한으로 줄였거든요.”
내 캐리어는 두 개였지만 하나는 드레스용 캐리어라서 절대 다른 걸 같이 넣을 수 없었다.
화장품이나 색이 묻어 나올 만한 걸 같이 넣었다가 만약 터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니까.
때문에 내 개인 짐은 캐리어와 작은 가방 하나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달 동안 쓸 용품들과 옷 등을 전부 챙겨 넣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캐리어를 무한정 늘릴 수도 없기에 난 아델리나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챙겨야 할 것들만 최소한으로 챙기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구매하는 것이다.
‘너무 홀가분하게 와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좀 걱정일 정도였다. 샴푸 같은 것도 여행용으로 가져갈 만한 게 없어서 그냥 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델리나의 조언을 너무 화끈하게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긴 하다.
특정 브랜드만 쓰는 아나스타샤가 내 캐리어 상황을 듣더니 거의 기겁했었지만, 아무튼 가리는 것 없이 잘 쓰는 난 지금 샴푸도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 빌려 써도 되겠지만 한 달이나 쓰는 것이니 소모품은 제가 사서 쓰는 게 낫겠죠. 아나스타샤가 일단 같이 나가자고 하더라고요. 모처럼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고요.”
-가깝다고?
“예. 브뤼셀 남동부의 구역이에요. 이름은…… 모르겠네요.”
도저히 외울 수가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더니 대뜸 오빠가 싸늘하게 툭 내뱉었다.
-우아테르말부아포르잖아.
말투는 차가웠지만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난 빙그레 웃으며 얼른 빈틈을 찾아냈다.
“그나저나 그걸 오빠는 어떻게 아시나요? 빅토르가 말해 줬나요?”
-보고를 받아야 할 사항이니까.
“프랑스어라서 어려운 지명인데도 외우셨네요?”
-…….
오빠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장난기가 든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많으셨냐고 물으면 다시는 날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시겠지. 말뿐이란 건 알아도 그런 말을 듣긴 싫다.
그래서 난 적당히 둘러대듯 이어 말했다.
“기억력 좋으신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듣고 외우시다니 부러워요.”
오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래, 너랑은 다르게.
“저도 기억력 좋은 편인데요?”
-웃기고 있네. 자기가 머무는 곳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미아 되면 집에 어떻게 들어갈래?
경호원들이 있는데 대체 무슨 걱정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대꾸하면 재미없을 테니 난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죠.”
-어이없네.
정말로 기가 차다는 듯 오빠는 헛웃음을 내뱉었으나 기분이 나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