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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71화 (1,071/1,277)

##  1071화

저녁에는 데보라 아주머니께서 그야말로 만찬을 준비해 주셨다.

메인 요리는 벨기에의 전통 요리라고 하는 홍합탕과 프렌치프라이의 조합이었는데,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약간 기이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요리는 곧 내 입맛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고 프렌치프라이는 당연히 프랑스에서 온 것 아니냐고 했다가 파스칼 아저씨에게 벨기에가 원조라는 일장 연설을 듣기도 했고……

테이블 위 대화 주제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영어와 러시아어, 프랑스어가 오가는 상황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프랑스어로만 대화를 나누셨을 두 분은 나의 등장에 어지럽게 여러 언어를 써야 할 상황이 되었지만, 되레 이런 상황이 더 재미있다는 듯 열정적으로 나와 소통하려 하셨다.

나 역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말했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도 거의 2시간 넘게 담소를 나누다가 방으로 돌아오자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너무 피곤했던 나는 스케일 연습만 한 번 하고는 일찍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의 첫날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

눈을 뜬 건 오전 6시경이었다.

일찍 잠들어서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잠자리가 얼마나 편했는지 8시간 가까이 푹 자 버렸다. 내 생각보다 더 피곤했었나 보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 나는 차분하게 스트레칭하며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남아 있는 잠을 몰아냈다.

별다른 문제가 느껴지진 않았다. 전날에는 피곤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푹 자서 모두 나아 버린 기분이다.

산뜻하게 일어난 나는 일단 욕실에 갔다가 방으로 돌아와서 제대로 옷을 갖춰 입기 위해 캐리어를 뒤적였다.

한 달 내내 한 가지 옷만 입고 있을 순 없어서 옷가지를 몇 개 챙겨 왔는데, 이렇게 보니 뭘 입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4월이라고 해도 아직 쌀쌀해서, 대충 밖의 날씨에 맞게 얇은 니트웨어와 청바지를 꺼냈다.

아무리 편하게 지내라고 해도 어수선하게 다닐 순 없었다. 난 깔끔하게 스스로를 정돈한 뒤 거실 쪽으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 타티아나. 일찍 일어났구나? 한참 전부터 소리가 들리던데.”

거실에서 들리던 소리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것이었나 보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날 곁눈질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보셨다.

“잠자리는 어땠니? 불편하지 않았어?”

“너무 편했어요.”

괜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편했다. 꿈도 안 꾸고 8시간을 자 버린 게 그 증거였다.

난 평소 잠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서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했다가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잠을 아끼면 결국 건강을 망친다는 잔소리까지 들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숙면이 건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나와 아주머니는 집중하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2층에서 잠시 소음이 들리더니 파스칼 아저씨가 계단을 내려왔다.

『□□, □ □□…….』

프랑스어로 중얼거리던 아저씨는 날 발견하더니 멈칫했다. 설마 날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지?

난 밝게 웃으며 먼저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좋은 아침.}

그제야 아저씨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저씨가 왜 계단에서 멈칫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러시아어로 아침 인사를 어떻게 하는지 외워 뒀었는데 그걸 까먹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와 영어가 뒤섞여 버렸다고 한다.

데보라 아주머니께서 한참이나 웃으면서 그렇게 원하면 러시아어 특강이라도 해 주겠다며 놀렸지만 아저씨는 이젠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웃어넘겼다.

보기보다 귀여운 부분이 많으신 분이다.

즐거운 대화도 잠시, 시계를 확인한 파스칼 아저씨가 선반에서 자동차 키를 집으며 말했다.

{난 이만 출근해야겠구나.}

{식사는 하지 않으시나요?}

{아침에는 뭘 잘 안 먹는 편이라서.}

그건 살짝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 집에 머문다고 해도 원래 계시던 분들의 생활 패턴에 영향을 주면 안 되는 일이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도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따 보자꾸나.}

{다녀오세요.}

일어나 현관 근처에서 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데보라 아주머니께서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 두리번거리자 아주머니가 이내 픽 웃었다.

“타티아나, 어쩜 그렇게 예의 바르니?”

“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평범한 게 쉽지 않잖니.”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평범한 건 쉬우니까 평범한 게 아닌가?

난 되도록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적당히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하려고 노력 중일 뿐이라고 말해 봐야 더욱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해서, 난 아무 말도 않고 눈치만 살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복잡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듯 식탁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난 아침을 먹는 사람이라서 지금부터 아침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래? 더 자도 되고.”

당연히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같이 먹어도 될까요?”

“괜히 물어봤구나?”

데보라 아주머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른 내가 도와드리겠다고 했더니, 엄격한 거절이 돌아왔다.

만약 내가 만들어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 부엌을 쓰는 건 자유이지만, 일단 아주머니께서 있을 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 이 부엌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그럼 옆에서 봐도 되겠냐 했더니 그것도 거절당하고, 결국 난 방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너무 강경하신 입장이라 내가 더 이상 억지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는 시간에 손이나 조금 풀어 둘까 싶어서 피아노로 바흐의 인벤션을 생각나는 대로 몇 곡 쳐 보고 있을 때였다.

“다 되었으니 오렴.”

아주머니의 부름에 따라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아까는 없었던 맛있는 냄새가 느껴진다.

메뉴는 간단했다. 샐러드와 담백한 구이 요리였는데, 어제 이야기할 때 아침은 담백하게 먹는 편이라고 했던 걸 기억해 주신 듯했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

아주머니는 내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시다가 포크를 들었다.

식사를 하며 나눈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당연히 내 쪽으로 향해 있었다.

아직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개최일까지는 한참 남았다. 보통 일주일 안에 도착해서 준비하는 것과 비교하면 난 할 수 있는 한 빨리 온 축에 속했다.

그러니 그사이 내가 무엇을 할지 아주머니가 궁금해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 예정이니?”

“음…… 일단 아침 연습을 이어서 마무리 짓고요. 잠시 외출하고 올게요.”

“어디 볼일 있니? 필요하면 아줌마가 도와줄 수 있는데. 통역도 가능하고.”

외출이란 말에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만약 공적인 일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실 것 같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을 벨기에에서 아주머니가 도와주신다면 물론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냥 쇼핑만 조금 할 생각이거든요.”

“응? 쇼핑?”

갑자기 쇼핑이란 말에 아주머니는 황당해하셨다. 내가 정말 여유롭게 브뤼셀을 돌아다니면서 쇼핑과 관광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신 것 같다.

사실 난 콩쿠르를 위해 다른 도시에 가서 관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그렇게 돌아다녔던 경험이 도움이 된 적도 있었고,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바르샤바에서 정신적 곤경에 처했을 때 놀러 다니는 것으로 해결했었던 것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중에 남아 있을 긴장을 떨쳐 내고 낯선 곳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데에는 역시 돌아다니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아주머니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백화점에 가서 카드를 긁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 그런 의미에서의 쇼핑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야 할 필요가 있어서요. 샴푸라든가…….”

“샴푸 있으니까 그냥 쓰렴.”

“한 달을 넘게 써야 하잖아요?”

“상관없는데.”

“그래도요.”

어차피 폐를 끼치고 있긴 하지만 도를 지나칠 생각은 없다.

아까 아주머니가 강경하게 식사 준비에서 날 쫓아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아주머니도 내 생각이나 상황을 이해하셨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마 앞으로도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내게 필요한 것이 많을 텐데, 그런 건 직접 보고 알아서 사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혼자 나가려고?”

“아뇨, 빅토르도 있을 테고…… 아나스타샤도 같이 가기로 했어요.”

“아, 그러니? 그럼 괜찮겠구나.”

안심이 된다는 듯 아주머니는 웃으셨다. 두 사람은 척 봐도 믿음직스럽게 생기긴 했다. 나와 다르게 말이다.

왜 나만 미덥지 않아 보이는 걸까. 속으로 한숨을 쉬며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이 오면 바로 말하고. 알겠지?”

“후후, 알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아주머니는 내 걱정을 해 주셨다. 그래도 이렇게 걱정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뻤다.

***

아침 연습을 마치고 나서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역시 낯선 집에서 적응하느라 어제는 정신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목소리가 밝았다.

-그쪽 집은 어떠니?

“좋아요. 아나스타샤는요?”

-여기도 괜찮아. 어젠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지 뭐야?

랑스가에서 내게 잘해 준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굉장한 환대를 받은 모양이다.

그녀는 어디서든 환영받을 사람이긴 했다. 예쁘고 예의 바르고 머리도 좋으니까. 누가 그녀를 싫어할 수 있을까.

그래도 혹시 모를 불안이 있었는데, 이렇게 첫날이 잘 풀렸으니 앞으로도 좋을 것 같다는 기대가 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나올 수 있지?

아나스타샤는 나와 가까운 곳에 머문다는 것을 듣자마자 쇼핑 계획부터 짰다.

그녀도 캐리어를 상당히 줄여 온 상황이라서 구매해야 할 물건이 많은 모양이다.

“예, 아침에 아주머니께 이야기했어요.”

-잘됐네. 그럼 10시쯤에 만나자. 장소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알았어.

내가 평소 타고 다니던 차량은 모스크바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브뤼셀에서 택시를 타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먼저 도착한 소로킨과 다른 직원들이 차량을 미리 준비해 뒀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 올 땐 데보라 아주머니께서 가지고 온 차에 탔지만, 사실 경호 문제 때문에 앞으로 차량만큼은 미리 준비한 차량을 타야 한다고 들었다.

프랑스에 갔었을 때도 덕분에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지……. 이번에도 아마 비슷하게 될 것 같다.

“…….”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집을 나섰다. 마침 검은 벤츠 한 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부근에선 독일 차량들을 자주 볼 수 있어서 그런지 수상해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빅토르가 차에서 내려서는 뒷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빅토르.”

“별말씀을. 오늘은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묘하게 깍듯한 모습이라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빅토르가 이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를 정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소로킨이 절 죽이겠다고 했거든요.”

“아.”

“살려면 어쩔 수 없으니 협조해 주시죠.”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빅토르를 죽이고 싶진 않았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차에 올라 소로킨과도 인사하고 아나스타샤가 머무는 집으로 향했다.

“타티아나!”

미리 마당에 나와 있던 아나스타샤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부터 이미 이 차량을 알아보았다. 가까이 가서 내리니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분 더 있었다.

어제 뵈었던 제라르 씨의 부인이라기엔 너무 젊었다.

내가 눈을 마주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급히 자기소개를 했다. 유창한 러시아어였다.

“어, 그, 안녕하세요. 레아 샤르베라고 해요. 오늘 아나스타샤 양의 안내를 맡게 되었어요.”

“반가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가볍게 웃으며 인사하니 레아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프랑스에서처럼 아나스타샤와 빅토르와 같이 돌아다니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사람이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벨기에에서 우리 또래의 사람과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약간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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