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4화
나이는 20대 중반에 키는 175cm 정도.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이렇게 보면서 기억을 짚어 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 대신 레아가 끼어들어선 남자에게 호응해 주었다.
{피아니스트신가요?}
그 말에 남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퀴즈 쇼 진행자 같은 표정이다.
{하하하. 맞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시겠고요.}
{이야, 탐정입니까?}
{탐정은 아니고요.}
레아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한 추리를 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레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난 그녀의 추리를 따라갈 수 있었다.
백화점에서 이렇게 바로 알아보려면 일단 클래식 음악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는 반대로 내가 알아봐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여러 정황으로 추리해 보면 음악계 관계자란 의미인데, 영어가 잘 쓰이지 않는 이곳 벨기에에서 첫 만남부터 억양이 강한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인 데다가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라면 자연스레 한 곳으로 추리가 좁혀진다.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 73명으로 범위를 좁힌다고 하더라도 난 이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 봤을지도…….’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상 실력자임은 분명하다.
다만 연주자들은 성격이나 스타일에 따라 활동 방식이 천차만별이었고, 그중 실황 연주회 위주로 활동을 하는 20대 연주자라면 특별히 유명세가 있지 않는 한 알아보기 어려울 뿐이다.
명단을 보긴 했지만 참가자 모두의 얼굴과 이름을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를 알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난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 참가자셨군요.}
{거기까지!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하면 저에게 두 배의 충격이 될 테니 그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다 말한 것 아닌가요?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그는 아차 싶었는지 헛기침을 해 댔다. 난 그가 긴장하면 아무 말이나 하는 스타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미안하기도 하고, 첫인상이 그리 나쁘진 않아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를 위해 호주에서 온 케빈 도너번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반가워요.}
이어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까지 마쳤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분명 피아노 연주자의 것이었다.
케빈 역시 나와 인사하고 난 뒤엔 한결 풀어진 태도로 웃었다.
{이것 참.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곳엔 언제 왔습니까?}
{어제요.}
{오, 그렇군요. 그럼 이쪽 분은 호스트 패밀리의?}
이어 레아도 케빈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백화점 안 매장 앞에서 이렇게 만나 이야기하려니 약간 어색하지만 그래도 케빈이 커뮤니케이션을 잘 이끌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서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다.
그렇게 영어로 말이 잠시 오가는 사이, 등 뒤편에서 러시아어가 끼어들었다.
“누구랑 이야기해?”
“아, 아나스타샤. 계산은 끝났나요?”
“응.”
아나스타샤는 보란 듯이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아마 상의와 하의 세트로 한 벌 산 것 같다.
그녀가 이쪽에 흥미를 보이기에 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중계만 맡았다.
“여기 이분은 호주에서 오신 참가자세요. 인사 나누세요. 영어로 하시면 될 거예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나스타샤는 내 옆에 섰다. 그리고 케빈과 제대로 마주 보았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의 키는 거의 비슷했다.
1초 정도 탐색하듯 가만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즈마일로바 양도 영어를 잘하시는가 보군요?}
{제 이름은 어떻게?}
{푸하하, 올해 참가자 중에서 두 분의 이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즈마일로바 양이란 호칭은 살짝 어색하게 들린다. 하지만 주로 성으로 사람을 부르는 이곳에서 앞으론 자주 듣게 될 호칭이었다.
케빈은 잘 알아 두라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주의 인물들이니 말이죠.}
{뭘 그렇게까지…….}
{자! 악수나 합시다, 우리.}
케빈은 아까 나와 나누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와 악수를 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름을 듣고도 잘 몰랐던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케빈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살짝 사그라들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케빈은 우리 세 사람을 돌아보고는 질문했다.
{다 같이 쇼핑 중이었습니까?}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쇼핑백을 보여 주었다.
{그렇죠, 뭐. 올 때 짐을 줄이다 보니까 편히 입을 게 없어서.}
{그건 그렇죠. 저도 사야 될 게 산더미라서 나와 봤는데, 이렇게 만나게 됐군요.}
그를 보니 이렇게 그냥 헤어지기엔 굉장히 아쉬워하는 눈치다.
하지만 매장 앞에서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해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러 가기엔 레아에게 실례다.
케빈 역시 여자 세 명이 같이 쇼핑 중인데 갑자기 끼어들어 시간을 뺏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고……. 아, 파티엔 오십니까?}
{파티라면…….}
{며칠 후에 있을 환영 파티 말입니다.}
난 콩쿠르 측에서 받은 메일에 첨부되어 있던 일정표를 떠올렸다.
그중엔 본격적으로 콩쿠르가 시작하기 전에 참가자들을 위한 환영 파티 일정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파티는 아니었으니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니었고, 싫으면 안 가도 된다.
그래서 케빈은 확인차 물어본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안 오실 생각입니까?}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잖아요?}
{사교도 중요한 문화이니 말입니다. 만약 오지 않으신다면 많이 아쉬워할 겁니다. 다른 참가자들도, 그리고 미래의 이즈마일로바 양께서도.}
음악을 업으로 삼다 보면 여러 음악가와 교류하게 된다.
그런데 그중 대부분은 연륜 있는 선배 음악가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우리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같은 세대의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학교나 콩쿠르 등뿐이었는데, 경쟁하기 바쁜 콩쿠르에선 친목을 다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콩쿠르 측에서 주최하여 여는 파티에 참가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만큼 이런 자리 역시 결코 흔하지 않다. 놓치면 정말 미래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음.}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케빈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가겠다고 하진 않았다.
{별로 내키지 않아 하시는 것 같은데. 이유라도?}
{제가 좀 내성적이라서요.}
{내성적…….}
그 말에 케빈은 실례임을 알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으며 눈을 치켜떴다.
{왜요? 그렇게 안 보이세요?}
{아뇨, 그건 아니고.}
케빈은 살짝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단순히 케빈을 놀리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애초에 이곳에 오기 전에 환영 파티에 대해서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파티에 참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건 몇 년 전에도 똑같았다.
학교에서 매번 열리는 학기 말 사교 파티에 아나스타샤는 매번 참가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불특정 다수와 어울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내성적인 것과는 약간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약간 고독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그런 성향이 있기에 아나스타샤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딱 한 번 사교 파티에 참가하긴 했지만 그 이후론 간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은 괜찮았는데.’
항상 이런 일엔 갈등이 인다.
왜냐하면 내 본질적인 성향은 그런 파티를 즐기지 않음에도, 그곳에서 만났던 막심 선배나 니콜라이 선배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춤을 잘 못 추니 아나스타샤가 내게 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고.
여러 가지 기억들이 아직도 행복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때문에 난 무엇이든 한 번쯤은 직접 겪어 보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체노바 양도 조금 내성적인 타입인가요?}
케빈이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그건 정말 내 성격이 어떤지 궁금한 게 아니라 아나스타샤를 움직이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해 보려는 일환이었다.
그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무작정 케빈에게 동조해 버리면 아나스타샤가 불편하게 된다. 그런 건 싫었다.
“…….”
난 조용히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 있다.
난 기본적으로 내성적이고 고민이 많은 스타일이지만 도전적인 일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시도하는 편이다.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확신만 있다면 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내 운명을 조금이나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할 테니까. 내가 모든 걸 피하기만 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진 못했을 것이다.
“넌 가고 싶구나?”
아나스타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내 말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강제할까 봐.
그러나 그런 내 생각마저도 읽혔는지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가.”
“아나스타샤는요?”
“난…… 글쎄.”
평소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답지 않게 아나스타샤는 말끝을 흐렸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의견을 물은 것이 일종의 압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란다. 파티 같은 게 싫다면 안 가면 된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따라 불참을 선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그녀에게 또 다른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을 시원하게 깨뜨린 건 우리 중 한 명이 아니라 바로 레아였다.
“뭘 고민해? 가야지. 진짜로 남들 다 파티 가서 인사하는데 트레이닝복 입고 방에서 피아노만 칠 생각이야?”
“그럼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그러면 그동안 연습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아나스타샤도 말문이 막혔다. 눈치가 빠른 레아는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신경 쓰일걸?”
“그건 맞는 말이네.”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인정했다.
혼자만의 연습에 몰두하는 것을 이유로 파티에 가지 않는 것이라면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나나 아나스타샤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럼…… 갈까?”
“괜찮죠?”
“하…… 사교 파티 같은 건 저번에 너랑 갔던 학기 말 파티를 마지막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우린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나 보다. 그간 함께해 온 일들이 많아서일까. 난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때 생각했었어요.”
“그랬니?”
“예. 정말 재미있었는데, 하고요.”
“……다행이네.”
아나스타샤는 킥킥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는 사이 케빈은 자리를 떠나지도, 끼어들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에겐 조금 미안해졌다.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전 내성적이라서 안 가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타티아나가 혼자 가면 불화설 같은 게 돌까 봐 겁나네요. 가야겠어요.}
{하하하,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냥 연습에 집중하는구나 하겠죠.}
케빈은 껄껄 웃으며 아나스타샤의 말을 부정했지만 그녀가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건 아는 눈치였다.
러시아의 최연소 참가자들에게 쏠린 관심은 생각보다 꽤 컸다.
어쨌든 케빈은 나중에 또 볼 수 있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듯 슬쩍 물러났다.
{그럼 파티장에서 봅시다. 베르체노바 양, 이즈마일로바 양.}
{그래요, 도너번 씨.}
{즐거운 쇼핑 되시길.}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케빈은 다시 인파들 사이에 섞여 사라졌다.
다시 우리만 남게 되자 레아는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티에 갈 땐 어떻게 입고 갈 예정이야?”
레아는 우리가 근사한 곳에서 파티를 즐길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짓궂게 웃으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올려 그녀의 즐거움을 깨뜨렸다.
“이거 입고 갈 건데.”
“……어?”
“이거.”
“트레이닝복을 입고 간다고? 너 미쳤니, 아나스타샤?”
말도 안 되는 농담 좀 하지 말라며 레아는 방방 뛰었다. 그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