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7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들을 위한 환영 파티가 열리는 곳은 브뤼셀 북부에 있는 한 후원자의 저택이었다.
브뤼셀을 가로질러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기로 한 나는 그녀를 데리러 가기 위해 조금 더 일찍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먼저 가 있을래? 타티아나.
“……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묻자 그녀가 면목 없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준비를 다 못 했거든…….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어쩌다가요? 늦잠이라도 주무셨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연습하다가.
“연습이요?”
나 역시 오전 연습을 거르지 않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영 파티라는 중요한 일정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집중하신 건가요?”
-준비하기 전에 오전 연습 조금만 하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이 시간이지 뭐니? 게다가 집에 아무도 없어서 나한테 준비 안 하냐고 알려 줄 사람도 없었고…….
“아하하.”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연습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아노를 붙잡고 있는 일이 많았다.
잡힐 듯 말 듯 한 무언가를 노리다 보면 현실의 일정 같은 건 점점 뇌리에서 잊히는 것이다.
가끔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이 날 다시 현실로 끌고 와 주기도 하는데, 나 같은 경우엔 만약 그렇게 몰두해 있다고 하더라도 일정을 아는 데보라 아주머니가 알려 주셨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내가 준비할 때 아나스타샤에게도 전화를 미리 해 볼 걸 그랬다.
어젯밤 전화했었는데 오늘 또 전화하면 파티 일로 너무 들뜬 것처럼 보일까 봐 살짝 삼갔던 것이 실책이었다.
어쨌든 심각한 일로 아예 못 가게 된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난 그녀가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유롭게 물었다.
“연습은 잘하셨나요?”
-상당히.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네……. 나 지금 머리도 안 감았어.
“기다릴게요.”
-아니야.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단호하게 내 말을 끊어 냈다. 전혀 파고들 틈이 없는 어투라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말문이 막힌 내가 멍하니 있자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내가 실수한 거니까 네가 기다릴 필요는 없어. 그러다가 우리 둘 다 늦으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먼저 가.
“여유 있게 시간을 잡았으니 아마 늦진 않을 거예요.”
-그러지 마.
아나스타샤는 다시 딱 잘랐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그녀가 엄격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선 네가 나 때문에 기다려 주면 안 돼.
기다려 주면 안 되기 때문에 기다리지 말란 말은 언뜻 아무 이유 없는 굉장히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선’이라는 단서가 붙는다면 그 말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브뤼셀에 단순히 놀러 온 것이 아니다. 국제 콩쿠르의 참가자로서 온 것이다.
아직 경쟁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린 연주자로서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무대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머뭇거리거나 기다리면 안 되는 것처럼 지금 역시 망설이면 안 되는 것이다.
혹시 모를 모든 망설임을 일절 차단하겠다는 듯 너무나 엄정한 기준이 느껴져서 난 그녀의 말에 다른 반론을 꺼낼 수 없었다.
여기선 무슨 말을 하든 떼를 쓰는 것밖에 안 된다.
“아나스타샤…….”
하지만 그녀의 기준을 이해하고 나서도 솔직히 조금 섭섭했다.
내가 중얼거리자 아나스타샤는 이내 미안하다는 듯 달래는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도 마음이 급해져서 안 돼. 알잖니? 무슨 말인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입장을 바꿔 내 실수로 인해 아나스타샤가 기다릴 상황이라고 한다면 나야말로 그녀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가라고 할 사람이었으니까.
그 말이 차갑게 들릴 걸 알면서도 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은 모스크바가 아닌 브뤼셀이다.
우리가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선 먼저 앞서가야 할 일도 있는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먼저 가서……. 아니, 가 있을게요.”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려다가 신중하게 말을 바꿨다.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내 말에 그녀는 마음을 놓은 듯 웃으며 말했다.
-나도 빨리 준비하고 택시 타고 갈게.
“예. 조심해서 오세요.”
-응.
전화를 끊고 나는 운전석 쪽을 향해 부탁했다.
“소로킨. 곧장 파티장으로 가 주세요.”
“예, 아가씨.”
내 통화를 듣고 있던 소로킨은 별말 없이 대답했지만, 조수석에 있던 빅토르는 살짝 걱정된다는 듯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흠, 같이 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쩔 수 없지요.”
파티장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미지의 공간에 혼자 가는 것보단 당연히 둘이서 가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걸 분명 잘 알 텐데도 아나스타샤는 내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내가 혼자서도 괜찮으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보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을 순 없다. 아예 그녀가 깜짝 놀라도록 해 줄 생각이다.
“제가 가서 다른 분들과 먼저 인사를 나눈 다음에 아나스타샤를 소개시켜 줄 거예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그렇죠?”
솔직히 나는 사교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렇게 목적이 확실하다면 못 할 것도 없다.
난 다시금 의지를 바로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
정확하게 파티 시작 20분 전에 난 전달받은 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가 가능한 정원이 있는 만큼 일반적인 저택은 아니었다.
입구의 거대한 철문을 보자마자 내가 떠올린 것은 모스크바에 있는 베르체노프 저택이었다.
‘비슷할지도?’
이 저택의 파티장을 빌려준 후원자는 벨기에의 귀족이었다.
입헌 군주제 국가인 벨기에엔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도 존재했다.
이 1,300개에 달하는 귀족 가문은 현대에 이르러 명예직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중 400여 가구는 17세기 이전부터 이어져 온 가문들이다.
그만큼 오래된 저택을 소유한 귀족들도 많았다.
『□□ □□ □□□□□?』
입구에 서 있던 경비 직원이 프랑스어로 물었고, 소로킨은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칼스도르프에게 미리 받아 둔 것이었다.
초대장을 확인한 직원은 두말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당히 공들여 가꾼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당연히 난 익숙한 우리 집의 정원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각각의 매력이 있어서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소로킨은 마치 몇 번 와 본 사람처럼 정원 사이를 가로질렀다. 초대장에 주차장 위치가 안내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여기서 내리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소로킨.”
운전으로 수고해 준 소로킨에게 인사하는 사이, 빅토르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에스코트했다. 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
살짝 어지럽기도 했지만 지금 중요한 장소에 와 있음을 다시 상기하며 정신을 차렸다.
턱을 당기고 허리를 편다. 오늘 내가 보일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첫인상이 될 것이다. 제대로 할 필요가 있었다.
“파티장까지만 가까이에서 모시겠습니다.”
빅토르는 멀리 떨어지지 않고 내 대각선 뒤편에 섰다. 파티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땐 자연스레 떨어질 셈인 것 같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를 살폈다. 주차장 주위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남자였는데, 아마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 같다.
“…….”
순간적으로 내가 이목을 끌었는지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그들 중 몇 명을 알아봤다.
얼마 전 다시 확인한 참가자 명단에 있었던 연주자들이었다.
이참에 인사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난 약간 당황했다. 인사도 무관심도 아니고, 뭔가 알아봤는데 미심쩍어하는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였다.
‘……뭐야?’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반응에 휘둘리긴 싫었다. 난 그냥 신경 쓰지 않고 파티장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들을 지나치던 와중, 거리가 가까워지자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내 귀에 들려왔다.
{초대받은 벨기에 귀족인가 본데? 경호원도 대동하고.}
{후원자 딸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영어로 대화하는 이야기를 듣고 난 황당함에 웃고 말았다.
나도 연주자로 초대받은 건데, 어째서인지 벨기에 귀족 후원자의 딸로 오해받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하는 걸 보면 매스컴이나 참가자 명단에서 내 사진 정도는 본 것 같은데…… 제대로 연상하지 못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빅토르의 존재가 상당히 강렬한 모양이다.
원정을 온 피아노 연주자가 경호원을 데리고 오는 건 드문 일일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제대로 인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약간 고민이 되어서 멈칫하는 사이, 파티장 입구 쪽에 있던 한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
프랑스어였지만 내 이름을 제대로 말하고 있으니 뭘 묻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우린 서로 간에 통하는 언어를 물었고, 영어가 겹쳐서 그렇게 소통하기로 했다.
에바라는 이름의 그녀는 이곳 파티장을 안내하는 직원이었다.
{러시아어를 하는 직원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나중에 혹시 통역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답답한 건 아니었다.
에바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이쪽으로 다시 향하던 남자들의 시선엔 점차 난처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날 확실하게 알아봤는지 누군가는 탄성을 내기도 했다.
난 그들을 돌아보고는 살짝 눈웃음만 지었다. 에바의 안내를 받기로 했으니 지금 인사하기엔 타이밍이 별로였다.
파티장 안에서 만날 기회도 있겠지. 깊게 신경 쓰지 않고 난 에바를 따라갔다.
{이쪽입니다.}
야외 파티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화려했다. 정원을 잘 조성하여 만든 공간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한쪽엔 분수까지 있었다.
거기다 정성스레 세팅한 테이블이 수십 개. 맨 앞에 있는 단상은 즉석 콘서트를 해도 될 정도로 컸다.
이곳에서 어떤 파티가 벌어질지 보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될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커다란 카메라도 이미 뒤편에 몇 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방송국 등에서도 사람들이 온 것 같았다.
역시 여왕님도 오시는 환영 파티라서 그런지 준비된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면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아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차분함과 점잖음이 어우러져 있었다.
한 손에 서빙용 쟁반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는 웨이터들이 음료나 핑거 푸드를 서빙했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역사가 깊은 클래식 콩쿠르 파티란 으레 이런 것일까. 일단 떠들썩한 느낌은 아니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파티장을 구경했다.
이쪽으로 향하는 카메라와 시선들이 있는 걸 느꼈지만 과하게 의식하진 않았다. 이곳의 분위기에 맞춰 격식 있게 행동할 뿐이다.
{행사는 30분쯤 후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웰컴 스피치가 진행되고 나면 사교 행사도 있으니 즐겨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대되네요.}
{자리는…… 이쪽이 어떠신가요?}
에바는 날 앞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비어 있는 곳들이 많으니 아무 곳에나 앉아도 될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해서 물었다.
{지정석인가요?}
{아뇨. 그렇진 않지만 앞좌석에 계시는 쪽이 단상의 분들을 보기에 좋으니…….}
콩쿠르 관계자들이나 여왕님을 굳이 가까이서 봐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소극적으로 뒤쪽에 콕 박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난 에바가 추천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드링크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와인부터 홍차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런데 내가 마실 수 있는 건 물과 오렌지 주스뿐이었다.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한 다음 난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순간 빅토르는 자연스레 없어져 있었고, 나 혼자만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덩그러니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
인제 와서 카메라 렌즈가 의식된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누가 와서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진 아무것도 못 한다. 하지만 일어나서 돌아다니자니 아직은 약간 어색한 기분이었다.
마음의 준비야 충분히 하고 왔지만 여전히 난 파티장이 그렇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 곳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건 발렌티나 정도일 것 같다.
어쩔까 싶어서 고민하다가 일반 에바가 주스를 가져다주면 그걸 마시고 생각하려는데, 한 여성이 척척 다가오더니 내 옆에 섰다.
난 약간 놀랐지만 그녀가 스페인의 연주자인 레티시아 코스타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 □□□ □□□.』
문제는 그녀가 프랑스어로 하는 말을 난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와 겹치는 언어를 찾기 위해 일단 영어로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레티시아 코스타. 미안하지만 프랑스어 말고 다른 언어로 대화할 수 없을까요?}
【□□ □ □□□?】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말은 영어가 아니었다. 스페인어라는 건 알겠는데 무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자 레티시아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붉어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어……. 내가 들었다. 친구에게. 네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고.}
{전혀 못 하는데요…….}
{아.}
레티시아가 날 보자마자 자신 있게 프랑스어로 인사한 건 잘못된 정보 때문이었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가 능통하고 영어가 불편한 그녀는 혹시 어떻게 안 되겠냐는 듯 애처롭게 날 바라보았지만, 그렇게 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이런 상황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국제 콩쿠르에서 사람들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레 겪는 일이었다. 신선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잘못된 정보로 부끄러운 상황도 겪고, 말이 잘 안 통하는 답답함도 있어야 비로소 모르는 땅에 와 있구나 하는 현실감이 드는 것이다.
난 미소를 지으며 레티시아를 올려다보았고, 그녀는 주춤거리며 그냥 돌아가려다가 내 눈빛에 붙들려선 오도 가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