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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78화 (1,078/1,277)

##  1078화

레티시아는 조금 난처해했다.

먼저 와서 말을 걸 정도로 친해지고자 하는 의지는 분명히 있지만, 통하는 것은 불명확한 영어뿐이다.

그러나 말이 조금 안 통한다고 해서 그냥 가는 건 내게 엄청난 실례였다.

레티시아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보인다. 난 그녀만 괜찮다면 조금 불편하게 대화하더라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눈치를 보는 사이, 에바가 음료수 잔을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베르체노바 님. 여기 웰컴 드링크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 앞에 오렌지 주스 잔을 내려놓고는 옆에 서 있는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코스타 님과 합석하셨군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

순간적으로 레티시아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무어라 빠르게 프랑스어로 요청했다.

하지만 에바는 잠시 뒤편을 힐긋 살피더니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오가는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있자 이어 에바가 내게도 설명해 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 안내 업무에 집중해야 하는지라 통역이 가능한 다른 직원을 찾아보겠지만…… 아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레티시아가 통역사를 요청한 모양이다.

이런 다국적 모임엔 통역사를 대동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일찍 요청을 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이렇게 찾으면 피차 난감하게 되어 버린다.

결국 조금이나마 가능한 언어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난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하며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잘 대화해 볼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바가 다시 돌아가고, 난 레티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이 어색한 상황이 길어지면 점점 수습하기도 어려워진다. 지금 우릴 찍고 있는 카메라가 내가 발견한 것만 두 대다.

레티시아 역시 내 옆에 잠깐이라도 앉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의자를 빼서 앉았다.

잘 쓰지 않아 어색함이 역력한 영어로 그녀가 처음 던진 건 농담이었다.

{열일곱 살이라고 해서 오렌지 주스를 마셔야 하는 건 아닌데.}

{제가 이걸 좋아해서요.}

내가 받은 오렌지 주스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어린애 같다고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어쩐지 내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조금 내려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흩어 놓고 서로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 같아서 난 우선 그녀에게 또박또박 감사를 표했다.

{말 걸어 주셔서 감사해요.}

{어, 음…… 그런데 말 걸어 놓고 내가 영어에 형편없어서…….}

{괜찮아요. 혼자 앉아 있느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코스타 씨 덕분에 살았어요.}

{다행이네.}

본래 레티시아는 꽤 사교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그녀는 어깨를 쭉 펴면서 이어 말했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할게. 레티시아 코스타야. 스페인에서 왔고…… 피아니스트지.}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러시아에서 왔죠.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이나 기뻐요.}

이렇게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온 보람이 있었다. 기분 좋게 웃고 있자 레티시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난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

역시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것만큼 흥미가 가는 일은 없나 보다.

내가 레티시아를 보자마자 풀 네임을 말한 덕분에 그녀는 약간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기대감을 가득 충족시켜 주고 싶었다.

{5년 전에 쇼팽 콩쿠르에 참가한 적 있으시죠? 그때 영상으로 본 기억이 있어요. 인상적이었죠.}

솔직히 너무 오래되어서 가물거리긴 하지만, 그 음색만큼은 기억들이 풍화되고 덮어씌워지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레티시아가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난 빙그레 웃으며 이어 말했다.

{참가자 명단에 계신 걸 보고 조금 놀랐어요.}

{나야말로 널 명단에서 보고는 놀랐어. 네가…… □□ 이 콩쿠르에 참가할 줄은 몰랐거든.}

레티시아의 서툰 영어가 한층 더 흐트러졌다. 살짝 흥분한 기색이다.

그러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제대로 구사하기가 어려우니 살짝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난 그저 차분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레티시아는 입술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저 농담만 해도 좋겠지만…… 솔직하게, 묻고 싶은 게 많아.}

음악가로서 해 온 일들을 되짚어 나가며 감탄하고 칭찬하는 것도 괜찮겠지.

불명확한 영어로 나누는 의사소통이다 보니 깊은 대화보다는 일단 서로 편하게 공감할 수 있는 농담 등으로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런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압축해 버리고는 거리감을 확 좁혀 왔다.

{미안한데 이것 좀 쓸게.}

그렇게 영어로 사과한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번역기 앱을 실행시켰다.

빠른 속도로 화면을 터치한 그녀가 이내 한 문장을 완성시켜서는 내 앞에 보여 주었다.

[이렇게 쓰면 알아보겠어요?]

스페인어의 격식 있는 표현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말투가 짧고 가벼웠던 건 억양도 표현도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장 구사를 길게 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용히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 주는 레티시아는 초면인 내게 지금까지 영어로 가볍게 이야기했던 것이 살짝 후회되는 듯 보였다.

처음에 대화를 꺼렸던 것도 내게 무례하진 않았을까 걱정한 탓인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스마트폰도 꺼냈다.

[물론이죠. 저와 같은 기종 쓰시네요?]

[그렇네요?]

우연이지만 이런 것으로도 공감대를 만들기엔 충분했다.

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스마트폰 이야기나 할까 했는데, 레티시아가 번역기 앱을 켠 것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전 당신이 음반 활동을 주로 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갑자기 음악가로서의 질문이 휙 날아들었다. 난 조용히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지금이 아니라면 물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자세히 듣고 충실히 대답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같은 프로그램으로 두 번 녹음했으니까요. 일반적으론 그렇게 하지 않죠. 만약 하더라도 텀을 길게 두거나요.]

레티시아의 말대로 내가 낸 음반 두 장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나처럼 활동한 사람은 아마 전무후무할 테지.

하지만 그런 특이한 음반 활동을 보고 레티시아는 음반 자체보다는 나라는 사람에 주목했다.

그녀는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내 음악도 상당히 깊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1년 전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는 그 완벽주의적 면모로 미루어 보아 국제 콩쿠르 등에 도전하기 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판단한 타티아나라는 연주자는 불과 1년 전에 낸 음반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녹음할 정도로 까다로운 성격의 완벽주의자인가 보다.

난 딱히 첫 번째 음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달리 해석했는지 레티시아가 급히 덧붙였다.

[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한 건 아니고요. 당신 실력은 지금도 충분히 뛰어나니까…… 음, 5년 정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레티시아는 다시 신중하게 화면을 터치해 문장을 입력했다.

[그런데 나이가 차자마자 콩쿠르에 도전한 이유가 있나요? 무명으로 낸 음반처럼 그냥 연습 삼아 도전했다기엔 상당히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는 것 알죠?]

레티시아가 어떻게 날 파악하고, 지금 이렇게 참지 못하고 묻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레티시아의 행동에서 난 그녀가 굉장히 착한 사람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난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보여 주었다.

[절 제대로 봐 주신 건 기뻐요. 하지만 오해도 있네요.]

레티시아는 날 똑바로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는 표시였다. 난 천천히 이어서 적었다.

[전 완벽함보단 완전함을 추구해요. 언제나 그래 왔어요.]

[그게 어떤 차이가 있죠?]

[완벽한 음악가와 완전한 음악가의 차이죠.]

레티시아는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같은 말을 반복하진 않은 것 같았다.

완벽함이란 통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불굴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물론 난 음악가이기에 앞서 예술가로서 완벽한 작품을 원한다.

그러나 순서를 지키지 않고 거기에 몰두해 버린다면 결국 하나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현재 주어진 조건과 시간에 나 자신을 집어넣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 즉 완전한 나를 이루는 것뿐이다.

[무명으로 낸 음반도 연습 삼아 낸 것이 아니었어요. 여러 이유가 맞물리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 음반은 당시 제 완전한 음악을 담고 있었죠.]

나는 단 한 번도 힘을 아껴 대충 음악을 흘려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내 긍지고 자존심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참가한 건…….]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내 말이 얼마나 오만하게 들릴지 안다.

그러나 내면의 거울을 똑바로 바라봤을 때, 난 지금 완전한 자신을 증명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나 세연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녀들에겐 할 이야기가 많다.

문장을 보여 주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니 이내 레티시아의 진지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멋지네.}

영어로 짧게 감탄을 발한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내가 오해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당신은 국제 콩쿠르가 처음이고…… 혼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궁금해져서.]

[신경 써 주신 건가요?]

레티시아의 정갈하지 않은 문장을 보고 난 가볍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녀는 빠르게 부정했다.

[여기까지 온 연주자를 걱정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실례죠. 그리고 제가 왜요?]

레티시아는 짐짓 냉철한 사람인 양 굴며 딱 잘랐지만 이제 와 차갑게 보이려고 해 봤자 늦었다.

내가 말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그녀는 약간 불만이 생긴 듯 작은 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게 투덜거렸다.

이윽고 포기한 듯 그녀가 목에 힘을 뺐다.

고개를 뒤로 쭉 빼고 스마트폰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문장을 쓴 레티시아가 그것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음악 이야기는 그만하고, 파티 이야기나 해 보죠. 아는 사람 또 누구 있나요?]

중요한 이야기는 다 했으니 같이 놀자는 것 같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고 알아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알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날 제외한 72명 중 내가 아는 사람은 반의 반절도 안 된다.

그중에서도 인사라도 해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흥미를 보이는 그녀를 실망시키긴 싫어서 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러시아 연주자라면 제 친구인 아나스타샤나…… 렌스키 로마노비치 정도네요.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얼마 전에 만난 케빈 도너번이나 프랑스에서 본 루이 디아라가 있지만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될진 잘 모르겠다.

두 사람 다 잠깐 인사했을 뿐이니 아무래도 거리가 조금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티아나! 오랜만이야!!”

꽤 자연스러운 러시아어.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인사밖에 할 줄 모른다. 난 반가운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세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뛰면 어떻게 하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의 세연을 보게 되었다는 기쁨이 앞섰다.

난 가볍게 미소로 그녀를 맞이하며 레티시아에게 말했다.

{저기 오네요.}

레티시아는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했지만, 곧 이해한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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