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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79화 (1,079/1,277)

##  1079화

세연을 마지막으로 본 건 지난가을. 그러니 시간으로는 반년도 더 되었다.

그사이 세연의 외견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이미 우린 키가 클 나이가 지났다.

성장이 끝났으니 앞으론 꽤 오랫동안 이 모습 그대로이리라.

하지만 몸의 성장이 끝난 것과 달리 그녀 내면의 강인한 에너지가 반년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더 강렬해졌음을 느꼈다.

본래 피아노 연주를 들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세연의 미소와 태도만으로도 연주자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자신을 오롯이 만들기 위해 음악에 보다 집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연 역시 분명한 무기를 양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그 자신감이 엿보인다.

“…….”

물론 이 자리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쭈뼛거림이 약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연이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주변의 압력을 이겨 낼 정도의 단단함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웃었다.

‘많이 컸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교수님과 공부한 악보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며 악보를 가지고 왔다가 그걸 빼앗기고는 울고 있었지.

하지만 그때 약하고 불안정해서 울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우린 닮은 곳이 꽤 많았다. 힘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다.

세상의 돌풍에 잘못 휩쓸리면 중심을 잃고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그러나 우린 피아노 연주자로서 포기하지 않는 면까지도 닮아 있었다. 500kg이 넘는 그랜드 피아노를 붙잡고 끈질기게 버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린 이곳에 섰다.

“…….”

내 근처까지 순식간에 달려온 세연은 그대로 날 끌어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옆에 레티시아가 보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 참는 모습이었다.

살짝 숨을 몰아쉰 세연은 밝은 미소와 함께 러시아어로 말했다.

“잘 지냈어?”

“물론이죠. 세연도 건강해 보이시네요.”

“음…… 모르겠다…….”

건강에 대해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내 말 자체를 못 알아들은 것 같다.

난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미안해. 러시아어 배우겠다고 한 게 벌써 몇 년인데.}

{괜찮아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세연과 소통하는 데에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듯 팔을 붕붕 저었다.

{그게 문제야. 네가 이렇게 맞춰 주니까 내가 편해서 공부할 동기가 안 생기잖아.}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야?

어이없다는 눈빛을 하고 내가 바라보니 세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고마워.}

세연의 감사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원래 난 그녀와 친하게 지낼 생각이 별로 없었다.

어차피 음악가로서의 길 위에 서 있다면 언젠가 만나게 될 테고, 그럼 간접적인 도움이라도 주면서 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을 충족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항상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세연을 외면하지 못했고, 지금은 이렇게 친구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손을 잡은 것에 대해 그녀는 고마워하는 것 같았지만, 되레 내가 더 고마웠다.

“…….”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세연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이쪽 분은?}

{아, 레티시아 코스타예요. 스페인에서 오신……}

【안녕하세요!】

부에노스 디아스. 레티시아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세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스페인어로 인사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스페인 사람 앞에서 외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레티시아는 살짝 놀란 듯 눈을 뜨더니 이내 살며시 웃었다.

【안녕하세요.】

【…….】

세연은 침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난 세연이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고 들은 적이 없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스페인어로 인사부터 저질러 놓고 생각하기로 한 모양인데,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다행히 레티시아는 친절한 사람이어서 빠르게 세연의 상황을 이해하고는 먼저 말을 꺼내 주었다.

{이 이상 인사는 영어로 할까요?}

{죄송합니다……. 저기, 임세연이라고 해요!}

세연의 자기소개를 듣고 레티시아도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영어를 조금 불편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마친 세연은 새로운 연주자와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했다.

{좋은 분 같네, 타티아나.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어?}

{아뇨. 파티장에 아는 사람이 없는가 해서 마침 왔다고 한 참이에요.}

{진짜로?}

{정말로요.}

세연의 의심은 레티시아가 다시 증언함으로써 지워졌다.

{그 이야기 맞아. 어떤 친구인가 했는데…… 역시 같은 나이라 그런가? 어디에서 만났어? 두 사람은.}

레티시아는 금세 호기심을 보였다.

세연과 난 나이도 같고 이 콩쿠르의 몇 안 되는 최연소 참가자이다.

때문에 친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레티시아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세연 역시 우리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의 바람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2년 전이었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였어요.}

들뜬 세연은 옆자리에 앉더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시 들으니 살짝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세연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그때 내가 일주일쯤 머물렀었지?}

{그랬었죠.}

세연은 중간중간 자신의 기억이 옳은지 내게 묻기도 했다.

내가 동의해 주면 그제야 마치 그 기억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듯 기뻐했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나도 웃음이 나왔다.

레티시아는 흥미진진해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세연의 빠른 영어가 듣기 쉽진 않을 테니 이렇게까지 궁금해할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도 그녀는 진심으로 세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레티시아는 흐뭇한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정말 부럽네. 그런 만남이 있었다니…….}

{에헤헤.}

{그 후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 오고 있는 거야?}

{네.}

뭔가 두 사람이 벌써 친해진 것 같았다.

세연은 레티시아가 불편해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하고는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했고, 레티시아 역시 사근사근하게 그녀를 대해 주었다.

두 사람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난 이렇게 세연이 또 인맥을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처럼 국제 콩쿠르에 참가했으니 해외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당장 나도 세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레티시아와 세연의 이야기가 끊어질 무렵 살짝 끼어들었다.

{세연. 브뤼셀엔 언제 오신 건가요?}

{나? 어제. 어후, 정신없더라.}

{딱 맞춰 오셨네요.}

{너희는 조금 여유 있게 왔었지?}

서로 일정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세연은 내가 며칠 전에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까 너무 좋다.}

{후후, 저도요.}

{아,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샤는?}

{그녀는 따로 오기로 했어요.}

러시아에서 비행기도 함께 타고 온 친구와 파티장에 따로 온 것에 대해 세연이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까 싶어 이어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자기 역시 마찬가지라며 말했다.

{나도 언니들이랑 같이 못 오고 따로 왔어. 다들 머무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기선 내가 제일 가까워. 택시로 5분 거리야.}

각국의 콩쿠르 참가자들은 브뤼셀 전역에 퍼져 있는 호스트 패밀리에 무작위로 가게 된다.

같은 나라에서 왔다고 해서 한동네에 몰아넣는 일은 없었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특이한 경우였다.

세연은 올 땐 같이 왔는데 그 후로 떨어진 양지은과 이연주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고 웃었다.

{그나저나, 그때 정말 고마웠어.}

{그때라 하심은?}

{언니들이랑 처음 만났을 때. 너한테 전화했었잖아.}

벨기에에 오기 전, 새벽에 갑자기 세연이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시차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전화한 것에 대해 그 후에도 세연은 다시 사과를 하며 고맙다고도 했었다.

난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세연의 마음속엔 상당히 깊게 그때 일이 남아 있나 보다.

{잘 부탁한다고 해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기억 속에 있기도 했고…… 난 그녀들이 좋은 사람들이란 걸 안다. 그래서 세연을 잘 챙겨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부탁했던 것이다.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적어도 난 그렇게 부탁하고 나서 세연에 대해선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어차피 제가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았어도 잘 대해 주셨겠죠.}

{어라? 확신하는 것 같네? 언니들 인상이 그렇게 좋았어?}

{바로 알 수 있었어요. 그보다 세연의 교수님께서 소개시켜 주신 분들 아닌가요?}

내 말에 세연은 놀란 눈을 했다. 자기가 말한 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난 당연히 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약력을 보면 어디서 어떤 분을 사사했는지 다 나와요.}

{그걸 다 찾아봤어?}

{예.}

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나중에 양지은과 이연주의 커리어를 다시 찾아본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참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전 같았으면 일부러라도 절대 찾아보지 않으려 했을 텐데, 지금은 그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살짝 든다.

세연은 자신이 소개해 준 사람들에 대해 내가 적당히 인사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세하게 찾아봐 주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멍하니 말했다.

{네가 찾아볼 줄은 몰랐네……. 아니, 봤더라도 추리한 게 대단해.}

{사사한 분이 눈에 익은 이름이라서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뵈었잖아요?}

{맞아. 그때 교수님이랑 너랑 이야기 되게 잘 통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세연과 친구로 가깝게 지내면서 전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정말 많았다.

그녀를 대하는 내 마음에 거짓됨은 없지만, 그래도 이따금 튀어나오는 내 생각은 상당히 불순했다.

이제 이런 건 비겁한 욕심이란 걸 알면서도 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잘 계시죠?}

{응? 물론이지. 얼마나 잘 지내시는데.}

{……다행이네요.}

세연은 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자신의 교수님을 내가 신경 쓰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물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다. 더 이상 파고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연이 이렇게 빠르게 피아노 연주자로서 바로 설 수 있게 된 건 교수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기도 할 테니까……. 그걸 알게 되었다면 충분하다.

난 빙그레 웃으며 살짝 말을 돌렸다.

{이곳 굉장히 좋네요. 그렇지 않나요?}

{어, 그렇긴 한데…… 난 예전에 너희 집에 가 본 적이 있잖아? 그때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이 정도는 이제 놀랍지 않네.}

{비슷한 것 같은데요.}

{아니야, 전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희 집이 훨씬 더 좋아.}

세연은 마치 모스크바의 저택을 묘사하려는 듯 팔을 이리저리 저으며 이야기했고, 거기에 다시 레티시아가 흥미를 보였다.

우리 세 사람은 한 테이블에서 그렇게 환담을 나누었다. 그사이 서서히 파티장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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