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0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하다 보면 콩쿠르 참가나 연주회 일정 등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많다.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말 안 통하는 곳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별일이 다 있곤 했다.
양지은은 가벼운 택시 사기부터 시작해서 물건 강매, 지갑 분실, 콘서트홀과의 트러블 등 정말 골치 아픈 일들을 겪은 바 있었다.
친구인 이연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정도로 엉망진창인 것 같진 않은데, 묘하게 양지은은 운이 없는 편이었다.
억울한 심정도 없잖아 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늘 손해를 보는 기분도 들었고.
하지만 여러 좋지 않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양지은이 해외로 나가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사기나 불친절은 상대의 잘못이지 외국인의 잘못이라 할 순 없었다.
그런데 겁먹고 한국에서 움츠리고 있으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 손해다. 단지 그 생각만으로 양지은은 더더욱 당당하게 해외 활동을 해 왔다.
그런데 가끔은 명백히 그녀의 잘못으로 생긴 난처한 상황도 있기 마련이었다.
「초대장 받았잖아?」
「어?」
이연주의 말에 양지은은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로서 환영 파티에 초대받아 택시를 타고 온 참이었다.
파티 장소를 제공한 독지가는 어마어마한 부자인지 파티장은 말만 저택이지 거의 성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이 다가오더니 택시를 검문하기 시작했고, 이어 무언가 요청했다.
프랑스어라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택시 기사가 어설픈 영어로 두 사람에게 무언가 이야기했고, 이연주는 핸드백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어 건넸다.
그게 초대장이라는데…… 양지은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그거 못 받았는데?」
「못 받다니 무슨 소리야. 분명히 담당자가 네가 머무는 호스트 패밀리로 보내 줬을 건데. 가족들이 너한테 주지 않았어?」
「……?」
「이거 말이야, 이거!」
이연주가 답답하다는 듯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양지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런 걸 받은 적 있었나……?’
양지은의 호스트 패밀리 가족들은 무척 친절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나마 통하는 언어가 영어뿐이었고, 때문에 소통이 그리 원활하진 않았다.
양지은의 언어는 대부분 미소나 보디랭귀지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연주가 흔드는 초대장이란 걸 보고 있자니 어제저녁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막 브뤼셀에 도착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가족들이 그녀를 붙잡고 프랑스어로 적힌 서류들을 보여 주면서 영어로 해석하여 설명해 주었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편지 같은 것도 있었고, 그걸 꺼내서 웰컴 파티라면서 무언가 이야기하고는 전부 전해 주긴 했었는데…….
어떤 장소에 대한 약도가 그려져 있는 그 편지가 웰컴 파티에 초대하는 편지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편지 자체를 가지고 와야 할 줄은 몰랐을 뿐.
「받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받았어? 못 받았어?」
「바, 받았어……. 죄다 프랑스어라서 중요한 편지인지 몰랐지…….」
화가 난 이연주에게 혼이 난 양지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연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말해 줬어야 했는데…… 아.」
이연주는 자책하며 중얼거렸다. 양지은은 거기에 살짝 짜증이 났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설명하면 되잖아? 내가 할게.」
「네가? 어떻게?」
「뭐 어떻게든…….」
하지만 양지은은 경비원들이 초대장도 없는 여자를 아무렇게나 들여보내 주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외국에선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굉장히 엄격하다. 특히 이렇게 커다란 저택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억울함과 창피함에 양지은이 입을 다물자 이연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래선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되지……. 내가 일단 이야기해 볼게.」
그리고 이연주는 창문 밖으로 경비원에게 영어로 이야기했다. 드문드문 들리는 말과 어투를 보면 사정 좀 봐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바리케이드는 열리지 않았다.
경비원들도 조금 난감하긴 한지 옆에서 무언가 하고 있긴 한데, 일단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한차례 이야기를 마친 이연주가 좌석에 등을 묻었다. 양지은은 조심스레 물었다.
「뭐래?」
「윗선에 확인해 보긴 하겠는데 일단은 기다리래……. 그런데 분위기 보니까 어려울 것 같아.」
「내 담당자한테 전화해 볼까?」
「……일단 해 봐.」
양지은은 급하게 스마트폰을 들고는 콩쿠르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어가 통하고 이곳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그녀의 담당자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엇을 하는 중인지 전화는 한참 동안 신호만 갔다.
양지은은 답답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다가 뒤쪽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 돌아보고는 경악했다.
「뒤에 차 있는데……?」
「우리가 막고 있으니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가 봐.」
「미치겠네.」
경비원들이 통과를 언제 시켜 줄지도 모르겠고, 다른 참가자임이 분명한 뒷사람은 기다리고 있고……. 파티 개시 시간까진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택시 기사가 난처한 듯 무어라 말했다.
{시간이 □□ 많이 □□□□. 난 □□□□ □□□□ □.}
{아, 잠시만요. □□□□ □□□ □…….}
{요금 □□□ □□□. □□□ 못 □□□□□.}
드문드문 들리는 말을 보니 택시 기사는 빠르게 발을 빼려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잘못 재수가 없으면 1시간 붙잡히는 건 일도 아니다.
양지은은 융통성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택시 기사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이연주는 금방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양지은은 괜한 민폐를 더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연주야, 내가 내릴게. 너만 먼저 들어가면 되잖아.」
「뭐?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말 하나도 못 하면서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내가 너 그냥 두고 파티장 가면 퍽이나 잘 놀겠다.」
괜히 이연주의 화만 북돋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지갑을 꺼냈다.
「일단 우리가 내리자. 그래야 뒤차라도 먼저 갈 테니까. 다른 차들이 더 올 수도 있고…….」
언제 통과할지 모르는데 길을 막고 있다가 뒤에 차들이 많이 밀리기라도 하면 정말 끝장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두 사람은 택시에서 내렸다.
뒤쪽 차량에게 조금만 뒤로 빼 달라고 수신호라도 해야 하나 할 때였다. 뒤차에서도 사람이 내리고 있었다.
「어라.」
세련된 원피스에 재킷을 걸치고 있는 여자였다. 키는 170cm 정도 되었을까.
이곳엔 키가 큰 여자가 많으니까 평범한 키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양지은의 눈엔 그녀가 마치 모델처럼 보였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그 여자는 슬쩍 고개를 들더니 양지은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항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택시 타고 먼저 들어가면 되는데…….」
양지은은 괜히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차에서 내린 참이다. 뒤의 택시는 살짝 뒤로 빠졌다가 앞 택시가 후진해서 나가고 나면 문제없이 검문을 받고 지나가면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랐던 뒷사람은 결국 참지 못하고 거의 동시에 택시에서 내려 버리고 말았다.
잠시 어색하게 머뭇거리는 사이 택시 두 대는 가 버렸고, 세 사람은 입구 앞에 남았다.
‘어색해…….’
한눈에 봐도 세 사람 다 콩쿠르 참가자다.
양지은은 빠르게 뒤의 여자가 누군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명단의 사진을 봤다고 이렇게 실물을 보고 바로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연주도 뒤를 돌아봤지만 누군지는 모르는지 쭈뼛거렸다.
그사이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어…… 그게…… 우리가 늦으니까, 먼저 하…….}
애매한 영어로 사정을 설명하고 먼저 입장하시라고 하려는데, 여자는 양지은 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냥 쌩 지나쳐선 경비원들 쪽으로 향했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겠지만 저렇게 차갑게 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친절하다고 해서 불만을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쪽도 피아니스트라면, 실력도 그 성격만큼인지 알아볼 기회는 많을 테니까.
「…….」
양지은은 그저 조용히 경비원과 여자가 무어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초대장을 보여 주었고, 별문제 없이 통과가 허가되었다.
허가가 난 직후 여자는 이쪽을 힐긋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냥 한심한 한국인 두 사람을 비웃으려는 건가 싶어서 양지은은 입을 다물고 마주 보았다.
그렇게 마주 본 건 잠시뿐이었다. 이내 여자는 다시 휙 돌아서더니 입구를 지나쳤다.
어제 본 약도에서 파티장은 저택 옆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저택은 여기서 보이지도 않았다.
거기까지 걸어가려면 꽤 힘들지도 모르겠다. 차를 타고 가면 편할 일을 굳이 내리게 만들었으니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컸다.
「우린 어쩌지?」
「뭘 어떻게 해? 저 안쪽에 있는 사람한테서 통과시키란 말이 나오든가…… 아니면 네 담당자에게 도움을 받든가…….」
「10분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파티장까지 걸어가는 데에만 10분 걸리지 않을까?」
「그럼 우리 늦은 거야?」
「몰라, 바보야.」
양지은은 울고 싶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입구에서 붙잡히다니. 정말 끔찍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차량 두 대가 더 와선 바리케이드를 지나갔다.
경비원들은 이제 들어오는 사람들을 확인하는 일만 해도 바빴다. 양지은은 언제쯤 들어갈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름이 뭐야?}
파티장으로 가 버린 줄 알았던 여자가 어느샌가 돌아와선 양지은에게 물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 매서운 눈빛에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하지만 불친절한 외국인들에게 수많은 고초를 겪어 본 양지은은 간신히 압박을 이겨 내고 대답할 수 있었다.
{양지은. 음, 나는 피아니스트고…….}
{지은…….}
자기소개를 하려는데 그 말은 듣지도 않고 여자는 중얼거리더니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말도 않고 화면을 무성의하게 툭툭 터치했다.
뭔가 도와주려는 것 같으니 태도를 문제 삼으면 안 된다는 건 알겠지만…… 아무래도 첫인상이 좋진 않았다.
이연주도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근처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양지은에겐 막 대하지만, 사실 기가 약해서 조금만 무서운 사람이 있으면 말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사이 차량 한 대가 또 바리케이드를 넘어 지나갔다. 양지은은 부러워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여권.}
멍하니 서 있는 그때, 여자가 손을 내밀며 여권을 요구했다.
패스포트란 단어에 양지은은 당황했다. 공항 입국 심사 직원도 아니고 여권을 왜?
같은 피아니스트임이 분명한 여자가 설명도 없이 갑자기 여권을 요구하니 어이가 없었지만, 양지은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핸드백에서 여권을 꺼냈다.
외국에서는 어딜 가든 여권을 항상 챙겨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건 상식의 범주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그냥 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 역시 상식이다. 하지만 이 여자라면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았다.
{…….}
양지은이 말없이 여권을 내밀자 여자가 픽 하고 웃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여권을 달라 하는데 그냥 이렇게 줘 버리니까 요구한 입장에서도 어이가 없나 보다.
지금이라도 이유를 설명하라고 닦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여자는 다시 돌아서더니 경비원에게 가선 여권과 스마트폰을 보여 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비원은 힐끔거리며 양지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마법처럼 통과해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뭐야? 뭔데!?」
「지금 저 사람이 해결해 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떻게?」
놀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결사가 되어 준 여자가 돌아와서는 양지은에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빛으로 묻자 그녀가 말했다.
{□□□ 명단과 네 이름을 □□□□ □□.}
언뜻 들리는 단어들만 가지고도 양지은은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콩쿠르 참가자 명단엔 양지은의 얼굴과 이름이 있다.
그렇다면 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항상 외국에서 다른 사람이 여권을 요구하는 일만 당해 봤지, 직접 여권을 보여 주면서 본인임을 증명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양지은은 이렇게 제일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름 해외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겪기만 했지 나아진 게 없네…….’
양지은은 조금 우울했지만 이내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도움을 받은 건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다.
이런 방법도 가능한데 경비원들이 먼저 친절하게 융통성을 발휘해 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늦게나마 다행이란 생각만이 가득 들었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
양지은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자 여자는 짧게 고개를 까닥이며 답했다. 슬슬 웃을 만도 한데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여전히 눈매는 매서웠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보다, 서두르자.}
걸어서 파티장을 찾아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서둘러야 했다.
두 사람은 앞서가는 여자를 따라갔다. 양지은은 약간의 용기가 생겨서 그녀의 뒤에 대고 물었다.
{네 이름은 뭐야? 알고 싶어.}
여자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고개만 살짝 돌려 눈을 양지은에게 향하며 대답했다.
{이즈마일로바.}
성인지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동구권 쪽이었다. 이즈마일로바란 단어를 되뇌며 양지은은 어떻게든 그녀를 떠올려 보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