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82화 (1,082/1,277)

##  1082화

세계의 여러 콩쿠르는 저명한 음악가의 이름이나 지명을 따서 명명되곤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약간 특이했다.

1937년엔 벨기에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인 외젠 이자이의 이름을 따 이자이 콩쿠르라고 시작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이름을 바꿔 버린 것이다.

물론 음악가가 아닌 왕비의 이름을 붙인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일 출신의 왕비 엘리자베스는 인격자로 명성이 높았고 예술에 높은 식견과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1차,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왕비는 일반 시민들에 대한 구호는 물론이고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유럽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와중에도 벨기에의 예술가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인 독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그 이름을 기리는 콩쿠르가 있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역사적 배경 덕분이었다.

‘예카테리나 대제와 비슷하네.’

18세기 러시아에 있었던 예카테리나 2세 역시 예술을 사랑하여 러시아의 문화를 한층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통치자였다.

독일 출신인 것도 엘리자베스 왕비와 같았고, 사후에 대제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것 역시 같았다.

‘이렇게 계속 지속된다는 건 다른 점이지만…….’

벨기에에선 엘리자베스 왕비의 이름을 딴 콩쿠르가 계속되었고, 가장 큰 후원자는 왕가의 왕비들이었다.

오래된 대회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데에서 난 사람들의 의지를 느낀다.

콩쿠르라는 형태로 드러난 이 의지의 집합.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왕비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한다. 바네사 왕비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환영사를 시작했다.

『□□□ □□ □ □□ □□ □□ □□□□. □□□.』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여러분.}

바네사 왕비는 프랑스어로 말하면 이어서 옆의 통역사가 영어로 통역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냥 프랑스어로 연설해도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었겠지만, 여기 참석한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점을 신경 쓰고 배려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난 영어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먼 곳에서 오신, 그야말로 클래식 세계의 별이 되어 주실 분들. 환영합니다.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바네사 왕비는 영어 통역이 끝나자 천천히 고개를 숙여 묵례했다. 그 모습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왕비는 대표 환영 인사를 맡긴 위원장과 장소를 제공한 귀족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 본격적으로 환영사를 시작하기 전 분위기를 살짝 띄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 왕족으로서 이런 연설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왕비님을 따로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저런 여유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정말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간간이 주변에서 웃음도 흘러나오고 모두가 왕비님의 목소리와 분위기에 익숙해졌을 무렵, 약간 어조를 달리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매년 5월이 가까워지면 전 기대감에 잠을 설치곤 하지만, 한편으론 긴장하기도 합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본 콩쿠르를 올해도 최고의 콩쿠르로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주변의 분위기 역시 착 가라앉았다.

이제 막 이야기의 초입에 들어갔을 뿐인데도 주변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넘실거린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사교 행사만을 목적으로 모이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진지해진 파티장을 보며 바네사 왕비는 옅게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든 듯했다.

{때문에 전 본 콩쿠르의 후원자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셔 무대 바닥을 공사하여 홀의 음향을 더더욱 완벽하게 만들었고, 피아노의 관리에도 신경 썼으며, 여러분들의 모습과 소리를 단 0.1초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와 마이크에 투자하고 방송 시스템을 개선했습니다.}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적당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방송 시스템에 관한 말까지 나오니 정말 왕비님이 이 콩쿠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 벨기에의 왕비들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최고 후원자란 말은 단순히 재정적 여력을 몰아준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왕비들은 벨기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왕비의 이름을 딴 이 콩쿠르를 후원하는 것 자체를 명예롭게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세계의 인력을 끌어모으고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전 세계를 찾아봐도 이런 나라와 이런 행사는 드물 것이다.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하듯 자신이 한 일들을 담담하게 설명한 바네사 왕비는 이어서 손바닥을 하늘로 펼치곤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일류들.}

짧고 강렬하게, 바네사 왕비는 이곳에 모인 연주자들을 일류라 불렀다.

심사 위원회의 엄격한 사전 선발 과정을 거친 것만으로도 이미 그렇게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연주자들의 자부심에 고양감을 불어넣었다.

왕비는 모두를 한 점으로 공명시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여러분 역시 저와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늘 최고를 생각하고 클래식 음악의 선단을 다루며 잠 못 이루는 나날도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계 최고의 콩쿠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바네사 왕비. 그리고 그 굉장한 무대에 올릴 곡들을 보다 완전하게 준비하기 위해 노력한 연주자들.

각자 노력한 방식은 달랐지만 향하는 곳은 같았다.

{오늘, 그런 저희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 만나 도모하는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겠죠. 전 이번 콩쿠르가 음악사에 발자취를 남길 역대 최고의 콩쿠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네사 왕비는 결코 겸손을 보이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음악사를 논하고 최고를 말한다.

그 태도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존재와 말 한마디가 시시각각 이 장소의 위상을 한층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의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파티장의 연주자들은 보이지 않는 열기 속에서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며 바네사 왕비는 짙게 웃었다.

{모두가 갈고 닦은 빛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한 손에 휘어잡고 위대해지시길 바랍니다. 그 길옆에 바로 저 바네사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 말이 통역됨과 동시에 왕비는 양팔을 펼쳐 보였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그녀에게 향했다.

한마디를 해도 통역을 거쳐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을 의식했는지 연설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잠깐 사이 왕비님이 이 파티장에 가지고 온 열기는 정말 무겁고 뜨거웠다.

나 역시 무언가에 이끌리듯 손뼉을 쳤고, 왕비님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뒤편의 자리로 돌아갔다.

왕비님이 의자에 앉고 나서도 박수가 잠시간 더 이어지다가 콩쿠르 위원장이 단상 위로 올라오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위원장 역시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고 통역이 뒤따르는 방식이었다.

{아, 정말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분들을 위해 환영사를 해 주신 바네사 왕비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호응하듯 다시 작게 박수 소리가 일었다가 흩어졌다.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말했다.

{자리해 주신 여러분께 제가 달리 더 드릴 말씀은 없으니, 오늘의 일정과 앞으로 궁금하실 부분 정도만 설명해 드리고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달아오른 분위기를 더 끌어 올릴 필요는 없었다.

위원장은 연설 이후 우리가 무엇을 해도 좋은지, 또 원한다면 어떤 행사가 준비되어 있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딱히 강제하는 건 없었다. 그냥 사람들과 사귀고 이야기하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해도 상관없었고, 간식이나 조금 더 먹다가 돌아가도 괜찮았다.

굉장히 자유로운 느낌이라서 여기저기서 살짝 풀어진 목소리가 들릴 즈음, 위원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며칠 후 본격적인 콩쿠르가 시작되면 여러분은 엄격한 규칙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 부분은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짝 흐트러지려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잡혔다.

모두가 알고 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 명성만큼이나 악명 역시 높다는 것을.

공정함을 위해 마련된 수많은 규칙이 연주자들을 옭아매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훈련된 연주자들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가 되기 위해선 단순히 연주자로서 뛰어난 것뿐만이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내실과 멘털리티가 단단해야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적막 가운데에서 위원장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웃었다.

{그 대신 오늘만큼은 긴장을 놓고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희의 진정한 바람입니다.}

위원장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콩쿠르의 진행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변경 사항이 있을까 싶어 난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런데 세연은 살짝 집중하지 못했는지 낮게 중얼거렸다.

{1명인가……?}

스쳐 지나가는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주변의 모두가 들었다. 이연주가 속삭였다.

{무슨 말이야?}

{아뇨…… 그, 파이널리스트요.}

{파이널리스트는 12명인데?}

이연주의 말이 옳았다. 몇 명이 참석하든 파이널리스트는 12명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세연은 이어 설명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연주가 의아해하며 재차 물어보려던 때, 세연 대신 레티시아가 설명했다.

{세연은 이 테이블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이 테이블이요?}

{참가자 73명 중 세미 파이널에 오르는 건 24명. 대략 3분의 1 정도지.}

그러니까 셋 중 둘은 콩쿠르가 시작되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단 한 번의 경합만으로 반 이상이 자격을 잃는다.

내가 그 탈락자들 사이에 끼어 있지 말란 법도 없었다.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내 일인 것이다.

물론 나머지 24명이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레티시아는 슬쩍 눈을 치뜨며 말했다.

{파이널에 가는 건 그중 절반인 12명이야. 6분의 1이라고 한다면…… 6명이 앉은 이 테이블에선 1명이란 소리고.}

그제야 우린 세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이 테이블에서 1명만이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라고 예상하니 약간 마음이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세연도 연주자로서 콩쿠르에 참가한 일이 많고, 경쟁과 선발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을 테지.

하지만 조금 전에 만났어도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입 밖으로 해선 안 될 말이 나온 모양이다.

난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약간 어색해진 이 분위기를 깬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그걸 모르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고 한다면 그런 바보도 없다.

우린 모두 프로다. 이곳에 오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쏟았고, 끈질김과 치열함을 갖추었다.

어떤 결과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에게 걱정이나 안타까움 따위는 사치다.

세연의 속마음을 설명했던 레티시아도 살짝 농담을 얹었다.

{저 옆의 테이블을 전멸시킨다면 우리 테이블에서 2명이 나올 수도 있긴 해.}

살벌한 소리를 입에 담는 그녀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직 위원장이 이야기하는 중이라서 작은 소리로 짧게 속닥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우린 도전자로서의 의지를 다시 다지며 서로를 재확인했다.

{이상입니다. 더 문의 사항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위원회의 관계자들에게 문의를 주시고……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얼마 가지 않아 위원장도 연설을 마쳤다.

박수를 받으며 위원장이 단상에서 물러간 뒤엔 사회자가 이어 안내했고, 파티장은 점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

웨이터들이 다시 들어와서 음료와 간식을 나르고, 사람들은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우리처럼 그냥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난 조금 더 많은 사람과 인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선 레티시아와 이연주, 양지은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들과는 할 말도 많았고 들을 말도 많았다.

{그래서 아까 아나스타샤랑 했던 이야기 말인데…….}

이연주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나는 순간 옆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눈만 살짝 돌려서 보니 바네사 왕비님이 의자에서 막 일어나고 있었다.

그 뒤를 수행원들과 통역사가 따랐고, 곧 5명 정도 되는 인원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방향은 정확히 우리 테이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 그제야 칼스도르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왕비님이 나와 만나고 싶어 하셨다는 것을.

{왜 그래? 타티아나.}

살짝 머리가 멈춰서 멍하니 있자 레티시아가 물었다. 그리고 그녀도 내가 보는 쪽을 돌아보더니 똑같이 우뚝 멈췄다.

우리 테이블의 모두가 돌아보았을 때, 바로 앞까지 다다른 바네사 왕비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즐기고 있나요?}

그 유창한 영어에 놀랄 새도 없이 난 이대로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는지 고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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