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3화
난 바네사 왕비님이 직접 환영사를 하실 거란 이야기를 듣고, 혹시 대화를 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
살짝 긴장하긴 했지만, 왕족은 아니어도 장관급 되는 사람과 이야기해 본 적은 있으니 크게 다를 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냥 인사하고 간단하게 포부 정도만 밝히면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앉아야 할지 일어서야 할지도 모르겠고, 단상 위에서 카리스마 있게 연설하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서 그 내용에 대해 감상이라도 말해야 하나 싶었다.
옆에 있는 한국인 세 명은 앉아서 왕비를 쳐다보는 이 상황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들썩이고 있었다.
이연주가 거의 반쯤 일어났을 때, 바네사 왕비님은 환하게 웃더니 손을 펼치며 말했다.
{오! 앉아요, 앉아. 한국에서 오신 분들. 왜 그러는지 알겠지만, 안 해도 괜찮아요.}
왕비님은 세 사람이 어떤 이유로 좌불안석인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있었다. 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였다.
물론 어째야 할지 몰라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건 나와 아나스타샤, 레티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비님은 우리를 보더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서서 짧게 인사만 하고 갈게요. 음, 이 테이블에선 내가 영어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저희 계속 영어로 말하고 있었어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이연주가 대답했다.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마 왕비님이 직접 와서 말을 걸 것이라곤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왕비님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이번에도 한국에서 참가하신 분들이 많네요. 매년 한국은 좋은 연주자들을 저희 콩쿠르에 보내 주는 나라죠. 정말 고마움이 커요.}
그리고 바네사 왕비님은 과거 있었던 콩쿠르들을 거꾸로 짚어 나갔다.
2016년 피아노 파이널리스트가 있었고, 2015년엔 바이올린에서 우승자가, 그리고 2014년과 2011년엔 성악 부문 우승자가 한국에서 나왔다.
그보다 과거로 올라가면 더 많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많이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었다.
왕비님이 연도까지 정확하게 짚으며 과거 선배들의 성취를 이야기하자 이연주와 양지은, 임세연의 표정은 놀라움에서 감동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바네사 왕비님이 보이는 인정과 존중 그리고 콩쿠르에 대한 열정이 절절히 느껴진 까닭이었다.
처음 있었던 긴장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왕비님은 장난스레 웃었다.
{그래서.}
그리고 그 웃음 그대로 진지한 물음이 갑자기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이번에도 우승을 거머쥐러 온 건가요?}
도발적인 한마디에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그다지 공격적이지도 방어적이지도 않은, 참가자에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어쩐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지 세 사람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과 시험을 뚫고 이곳까지 온 프로가 압력을 못 이겨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표로 이연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답했다.
{그,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해요.}
나름대로 자신 있게 말한 듯하지만, 약간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조금 전 있었던 연설로 미루어 보면 바네사 왕비님은 당당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애매하게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는 쪽이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이해한다는 듯 왕비님은 짙게 웃었다.
{후후후, 한국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고 들었어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이연주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의 격언을 이런 곳에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놀란 이연주를 보며 왕비님은 천천히 이어 말했다.
{아주 좋은 격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내가 만나 본 한국인들은 전부 좋은 실력자일수록 더더욱 겸손했던 것 같네요.}
{아…… 그럴지도요.}
앞서간 선배들이 왕비님 앞에서 어떻게 했을지 안 봐도 알겠다는 듯 이연주가 말했다.
왕비님은 더더욱 짙게 웃더니 조금 더 고개를 숙이며 이연주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난 속지 않아요. 이 양은 무척 뛰어난 피아니스트죠. 기대하고 있겠어요.}
겸손에 속지 않겠다는 말은 살짝 묘하게 들린다. 이연주는 버벅거리며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거렸다.
왕비님은 소리 내어 웃으며 다른 두 사람도 돌아보았다.
{다른 두 분 역시 마찬가지예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을 거란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바짝 얼어선 끄덕거리기만 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지만, 무대 위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한 실력을 보여 줄 테지. 왕비님도 그것을 기대한다는 듯 잠시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페인에도 정말 인상적인 음악가들이 많았죠. 재작년에 있었던 성악 부문 파이널리스트가 생각나네요.}
이쯤 되니 우리 프로필을 전부 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참가자 총 73명 중 파티에 온 것은 어림잡아 50명 정도.
그 전부의 프로필을 외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공사다망할 왕비님이 이 정도로 알고 있다는 건 어지간한 열정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다.
레티시아는 스페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짧고 무겁게 선언했다.
{제가 보여 드리죠. 피아니스트들의 실력은 어떤지.}
예리한 레티시아는 왕비님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서로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을 정도였다. 왕비님은 매우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기대되네요.}
한국에 이어 스페인 참가자에 대한 인사와 격려도 마무리되고, 왕비님은 마지막으로 나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러시아.}
계속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 뒤로 예리한 식견이 번뜩인다. 사람을 평가하는 그 카리스마를 마주하면 움츠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더더욱 기세 좋게 고개를 들고 바네사 왕비님을 마주 보았다.
우린 한국에서 온 연주자들처럼 겸손하지도, 스페인의 연주자처럼 위풍당당하지도 않다.
그저 실력을 보여 줄 곳이 아닌 곳에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릴 뿐이다.
{…….}
불과 몇 초 정도. 시선을 교환한 시간은 그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체감상 족히 1분은 넘게 이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네사 왕비님의 입꼬리가 슬쩍 움직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한 평가가 나왔다.
{전통적인 강자들이 많은 나라죠. 나이에 관계없이 러시아 연주자들에게선 항상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곤 했어요.}
나이에 관계없다는 말인즉슨 어리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나와 아나스타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도 만만찮네요. 후후후. 눈빛이 강렬하게 살아 있어요, 이즈마일로바 양.}
아나스타샤는 어디서나 평가가 좋았다. 생김도 자세도 무척이나 바르고, 머리도 좋아서 흠 잡힐 일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구 앞에서라도 그녀는 기대를 자아내게 한다. 그건 가히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그런 그녀에 비해 난 재능은 별로 없지만 외견도 태도도 신경 쓰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내 평가가 떨어지는 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괜찮아.’
난 꽤 자신 있다. 왕비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호의적이기도 했으니까, 몇 마디 물어보신다면 대답만 잘하면 되겠지.
큰 걱정 않고 바라보자 바네사 왕비님은 살짝 고민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베르체노바 양은 예상했던 것보다…….}
{……?}
{더 귀엽네요?}
{……네?}
놀란 내가 되묻자 갑자기 옆에서 풉 하고 누군가 폭소를 참는 소리가 들렸다.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카리스마 있는 연설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일류로 인정하며 치켜세웠고, 또 임세연과 아나스타샤처럼 어린 연주자들에게도 잔뜩 기대를 보이셨으면서. 왜 나만?
기가 막혀 올려다보자 왕비님은 미안하다는 듯 손을 마구 내저으며 수습했다.
{어머, 참가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미안해요. 실례했네요.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뇨…… 어……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어서 다행이에요.}
딱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무시하지 말라고 항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항의하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지.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설명이라도 해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왕비님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말씀하셨다.
{난 베르체노바 양의 음악을 음반으로 접한 적이 있어요. 그 음악에서 굉장히 강렬한 느낌을 받아서 실제 인상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거든요? 사진도 그렇고.}
친구들과 같이 찍었던 프로필 사진은 정말 잘 나왔다.
피아노 연주자란 느낌이 확실히 살아 있는 사진이라 마음에 들었다.
바네사 왕비님이 내 이름과 음반 그리고 사진으로 상상했던 내가 어떤 모습일지 알 것 같았다.
평상시의 난 그렇게 또렷한 인상이 아니다. 과거 아팠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건강한 지금도 여전히 약해 보이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바네사 왕비님은 연주자가 아닌 내 모습에 조금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다.
{그런데 약간 달라요. 음…….}
{…….}
{그래, 손 좀 줘 볼래요?}
얌전히 손을 내밀자 왕비님은 내 손을 잡고는 살짝 들었다. 이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이런 손으로…….}
연주자로서 강해지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서 만든 손이지만 근력 운동 등을 한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지는 데에 집중한 터라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 스스로 느끼기엔 약간 굵어졌다고 느끼지만 타인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난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곤 꾹 참았다.
바네사 왕비님이 딱히 날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음반을 듣고 느낀 이미지와 현실이 많이 달라서 괴리감에 혼란스러워하고 계실 뿐이다.
그 괴리를 한 번에 없애 버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심플한 결론에 다다른 나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바네사 왕비님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옆에서 그녀를 수행하던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
{아, 알아요. 알아.}
귀찮다는 듯 대충 말하며 왕비님은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제지가 들어왔네요. 저쪽에서 카메라들이 잔뜩 찍고 있어서 말이죠.}
나도 곁눈질로 파티장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이곳에 오자마자 확인했던 것보다 카메라가 몇 대는 더 늘어난 것 같다.
아마 수많은 기자가 오늘 일을 기사로 쓰겠지. 그런데 왕비님이 특정 연주자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신다는 보도가 나기라도 한다면 정말 곤란해진다.
콩쿠르의 공정성엔 약간의 의혹도 없어야 한다.
왕비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는 눈들이 많다 보니 내 행동도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가끔은 답답해요.}
물끄러미 왕비님의 눈을 올려다본 나는 그녀가 정말로 내게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 왔던 많은 팬이 지금 왕비님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스도르프가 전해 주었듯 그녀가 내 베토벤 소나타 24번의 팬이라는 말은 진실이었다.
조금도 의심할 것 없다는 걸 느끼자마자 난 눈앞의 사람을 벨기에 왕비가 아닌 청중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자신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만약 원하신다면…… 콩쿠르가 끝난 뒤에 뵈어도 될까요? 그땐 괜찮지 않을까요?}
{어라? 정말인가요?}
조용한 곳에서 만난다면 뭐든 해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으로 제안한 건데, 왕비님은 반색하더니 이내 짓궂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콩쿠르가 끝나고 나랑 다시 본다는 건, 수상자가 되겠단 말인데요?}
{……?}
{그렇게 해석해도 되겠죠?}
바네사 왕비님은 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