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4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시상은 당대의 벨기에 왕비가 한다. 상식처럼 굳어진 전통이었다.
따라서 내가 한 말은 시상식에서 뵙겠다는 말로 해석되더라도 이상할 것 없었다.
물론 지금 왕비님은 일부러 그런 해석을 내세운 것이다.
{그게…….}
말을 고쳐 보려던 난 두 마디도 내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연주자로서 콩쿠르가 끝나고 뵈어도 되냐고 제안한 건 콩쿠르를 기준으로 놓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바네사 왕비님 한 명을 청중으로 보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비님이 원하는 바를 직감했기에 살짝 돌려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구체적으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건 너무 건방지다.
‘은근히 바라시는 것 같기도 한데…… 짓궂으시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하면 재미있다며 한껏 웃어 주실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나도 체면이 있다.
그리고 왕비님은 내 제안을 훌쩍 뛰어넘어선 포부를 직접 확인하려 질문하신 것이다.
난 거기에 제대로 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 적당하게 이야기해서 넘기려 한다면 상당히 실망하시겠지.
경솔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생각해서 말을 정돈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요.}
시상대에 오를 수 있는가. 그건 모른다.
나는 물론이고 왕비님이 결정할 일도 아니었으니까.
원론적인 내 말에 왕비님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뭐…… 그건 그렇죠?}
긍정은 하지만 약간 실망하신 기색이다.
아까 레티시아가 했던 것처럼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길 바란 모양이다.
물론 내가 할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건 심사 위원들이 결정할 일이지만, 결국 내가 이 폭풍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건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만약 제가 세 번의 무대에 모두 오르게 된다면…… 왕비님이 제 제안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주실 거라 감히 예상합니다.}
내 말에 바네사 왕비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용히 난 왕비님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여유롭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연주자로서 눈앞의 사람을 청중으로 인식하고 꺼낸 제안을 왕비님은 은근슬쩍 빠져나가며 반대로 날 몰아세우려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난 전부 이해하고 있었고, 휘두르려 하는 대로 휘둘려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바네사 왕비님은 크게 내색하지 않고 이내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목소리에 살짝 놀리는 투가 섞인다.
{오…… 놀랐어요.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제가 건방졌나요?}
{아하핫, 아뇨. 전혀요. 재미있는데요? 이렇게 자신 있는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 그래서, 날 정말로 베르체노바 양의 팬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인가요?}
오가던 대화에서 내가 과감하게 한 발짝 내딛자 바네사 왕비님은 아예 불쑥 서너 걸음 다가오며 날 압박했다.
짙은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이면의 그림자는 섬뜩하다.
역시 벨기에의 왕비를 나같이 미숙한 사람이 마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나 오빠라면 이런 상황도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론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한 마디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둘 것이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피아노 앞에서 해야 할 준비를 충분히 갖춘 연주자라면 피아노가 없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난 바네사 왕비님을 올려다보며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세 번이나 무대에 올라 그 정도도 못 할 정도로 허술하게 준비하진 않았어요.}
그 전에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지.
난 내 음악을 완전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내 음악이 충분한 기초와 설득력을 갖추어서 마지막 무대에 오를 기회까지 얻게 된다면 난 확실하게 청중들을 매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네사 왕비님은 놀랍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번의 무대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내 말에 기가 막힌 모양이다.
그러나 연주자로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최선의 연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바네사 왕비님.}
파티장은 시끌벅적했지만 우리 테이블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적막했다.
수행원들과 서 있는 바네사 왕비님은 그 세상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그 지배자에게 은근히 도발 아닌 도발을 한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솔직히 너무 막 나간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감은 적중했다. 이윽고 바네사 왕비님이 나지막이 물었다.
{최선이라……. 최고가 아니라 최선이라 하는군요?}
{최고는 따져 봐야 알 일이지만, 최선은 따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요.}
난 되도록 확실한 말만 하려고 노력한다.
자신감이 조금 있다고 해서 불확실한 말을 마구 하기엔 무서워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을 말할 땐 그 어떤 것에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건 내 마음을 똑바로 돌아볼 때도 그렇고, 세상 그 누구를 앞에 두고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왕비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작게 흔들며 웃었다.
{냉철하네요. 그리고 훌륭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제가 실례를 해도 너무 실례했네요. 조금 전에 귀엽다고 했던 말은 취소할게요.}
그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사과까지 하셨다.
귀엽다는 말에 딱히 크게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다.
어차피 내 평소 이미지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신들 결국 무대에서 나 자신을 증명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전 괜찮다고 말하려던 찰나,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굳이 취소하실 건 없어요, 왕비님. 실제로 보고 느낀 바를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저희 피아니스트들은 그런 평가도 중요하게 여긴답니다.}
난 황당한 마음에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그녀가 왕비님의 말을 막는지, 그 이유는 분명했다.
내게 장난을 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던 것도 아나스타샤였다.
난 잔뜩 불만 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나스타샤!}
{왜? 맞잖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만두세요.}
{싫은데. 아깝잖아.}
{대체 뭐가요?}
다시 따져 물으려던 나는 시선을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아직 바네사 왕비님이 옆에 계신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와 티격태격해 버린 탓에 난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옹송그렸다.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왕비님은 그저 웃으시기만 했다.
{음, 취소했던 걸 다시 취소해야겠네요. 알겠어요.}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네사 왕비님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왕비님은 미소를 지었다.
워낙 내가 도발적인 언사를 많이 해서 약간 걱정은 있었지만, 다행히 왕비님은 그런 것들을 전부 유쾌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그 미소엔 약간의 욕심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어쩐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아서 마주 웃어 보이자 왕비님은 미련 없이 허리를 폈다.
{이야기 즐거웠어요. 슬슬 다른 테이블로도 가 봐야겠네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아무래도 곤란해져서.}
파티장에 있는 테이블이 열 개 가까이 되는데 한 테이블에 너무 오래 있을 순 없었다.
모든 테이블에 비슷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왕비님이 지키는 공정함의 일환인 것이다.
우리는 그걸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왕비님은 살짝 몸을 돌리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기 전에 한 가지만 약조하죠. 그대들이 무대에 올라 반짝이며 빛나는 모든 시간을 지켜보겠다고요.}
조금 전까진 바네사 왕비님에게서 짓궂음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느껴졌었다면, 지금은 묵직한 책임감과 존재감이 정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왕비님은 짙은 미소와 함께 손을 펼쳐 보이며 말을 맺었다.
{모두 후회 없이 완전한, 자신만의 예술을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말했던 최선이란 말에서 왕비님은 완전함을 끌어냈다.
확실히 오랜 시간 음악가들을 봐 오셔서 그런지 직접 음악을 하지 않아도 왕비님은 이미 이쪽 사람들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계신 듯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왕비님은 손을 내렸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시간 되시길.}
{감사합니다.}
{후후, 감사는 무슨. 장난쳤던 것 미안해요.}
정말 내게 장난을 치셨던 걸까…….
물론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다.
바네사 왕비님은 은근히 날 떠보면서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하셨으니까.
내가 조금이나마 본색을 드러냈던 건 그런 왕비님에게 한 서비스에 가깝기도 했다.
건방지게 도발하는 것이 어떻게 서비스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아마 왕비님도 흡족해하시는 것 같으니 괜찮은 것 아닐까.
“…….”
그렇게 짧은 대화가 마무리되고 왕비님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우리 옆 테이블로 향했다.
이미 그쪽에선 우리 상황을 보고 철저하게 대비했는지 그리 긴장하거나 벌벌 떠는 기색 없이 좋은 분위기였다.
우리만 처음이라서 억울했다.
「나 죽는 줄…….」
「진짜로.」
「좋은 분이셨는데, 왜 이렇게 긴장했지?」
이연주와 양지은은 혹시라도 옆에 들릴까 걱정되는지 한국말로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바네사 왕비님의 카리스마에 상당히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진짜 대단했어. 어떻게 그렇게 잘한 거야?}
{……예?}
{바네사 왕비님하고 이야기한 것 말이야. 깜짝 놀라시던데?}
이연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살짝 흥분한 투로 말했다.
난 솔직했을 뿐이지 뭔가 유연하게 잘 대처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아서 그녀의 반응에 조금 얼떨떨했다.
그러나 이연주는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신경 쓰지 않고 한참 이야기하더니 이어 양지은에게 말했다.
「저 애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처음에 전화로 이야기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어. 그 상황에서 거꾸로 영상 통화를 걸어 올 정도였으니까.」
「그건 그래.」
「제가 그랬잖아요. 대단하다고요.」
거기에 임세연까지 끼어들어선 한마디 보탠다.
난 가만히 듣다가 못 견딜 것 같아서 살짝 항의하듯 말했다.
{제가 알 수 있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분위기만 봐도 내 이야기라는 걸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레티시아도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할 줄은 몰랐어.}
{더하다니 무슨 의미인가요?}
{음, 칭찬이야.}
레티시아가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겠다며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난 사실 그녀가 제일 깔끔하게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좋은 인상을 남긴 아나스타샤라든가…….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듯 날 테이블 위의 주제로 올려놓았다.
{그나저나, 보자마자 첫인상이 귀엽다는 말에 못 참았지 뭐야.}
{난 네가 웃길래 따라 웃을 뻔했어.}
가만히 있으면 산채로 잡아먹힐 것 같아서 난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지금 그 이야기 하면 전 앞으로 한 마디도 안 할 거예요.}
{아, 알았어. 미안해, 미안.}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바로 사과해 버리니 할 말이 없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그 후로 날 놀리는 건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우린 한동안 왕비님이 어느 테이블에 가 계시는지 힐끔거리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처음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