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5화
늦게 온 이연주와 임세연, 아나스타샤와 간단한 인사 정도를 하자마자 바로 환영사가 시작되었기에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니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이연주와 레티시아는 나이도 비슷하고 예전에 콩쿠르에서 만나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웨이터가 가져다준 샴페인을 홀짝이며 이연주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레티시아, 몇 년 전엔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배웠지. 지금도 잘 못해.}
{잘하는데?}
나와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레티시아는 영어로 짧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약간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시원시원하게 말해 버리는 것에 적응한 듯 보였다.
레티시아와 즐겁게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던 이연주는 힐끔 옆자리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지은이도 영어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는 알아듣거든?}
양지은은 무시하지 말라는 듯 발끈해서 되받아치더니 이어 한국어로 말했다.
「나도 국제 콩쿠르 왔다 갔다 한 적은 많아.」
해외에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기본적으로 외국어 능력이 조금씩 늘어난다.
양지은은 제대로 말할 줄은 몰라도 그 정도면 되는 것 아니냐며 입술을 삐죽였다.
이연주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괜히 양지은에게 영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한 건 레티시아와 셋이서 같이 이야기하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본 적 없어?」
「알기는 해. 만난 건 처음이고.」
레티시아는 외부 활동을 꽤 많이 하는 연주자였다.
음악의 세계는 생각보다 좁다. 외부 활동을 자주 하면 자연스레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양지은은 레티시아를 봤었던 롱 티보 콩쿠르에 대해 이야기했고, 레티시아는 거기에 반응해 옛날 일을 떠올렸는지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20대 세 명이 과거에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10대 세 명 사이에도 과거 이야기가 주제로 떠올랐다.
{최근엔…… 난 아나스타샤랑 봤었네. 미국에서.}
{그랬었지.}
두 사람은 포트워스 청소년 콩쿠르에서 수상한 적이 있었다. 세연에겐 그것이 굉장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아나스타샤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말을 걸고 친해져서 너무 즐거웠다며 세연이 재잘거렸고,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듣더니 콩쿠르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만만찮았어. 작년에 네 실력에 정말 놀랐었던 것 아니?}
{무슨 소리야! 그 콩쿠르에서 1위 한 건 너잖아!}
{그랬던가?}
아나스타샤는 의뭉스레 어깨를 으쓱했고, 세연은 그녀가 2등 앞에서 기만을 하고 있다며 방방 뛰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이연주는 아나스타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이곳에 올 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난 이즈마일로바가 세연이랑 친하단 말에 깜짝 놀랐어.}
아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나스타샤가 상당히 쿨한 태도로 두 사람을 대했다는 것 같은데…….
그러니 그녀가 발랄한 세연과 이렇게 친할 줄은 상상도 못 할 만도 하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세연을 슬쩍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친구의 친구니까…….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돼. 아나스타샤라고 불러 줘.}
{그래도 될까?}
{이미 타티아나를 베르체노바라고 부르진 않잖니?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성을 부르지 않아.}
{그럼 어떻게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친하지 않은 사람을 부를 땐 성을 부르는 나라가 많다.
하지만 러시아는 타인의 성을 부르는 일이 정말 드물고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 곧 격식 있는 호칭으로 받아들여진다.
여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면 이렇게 각 나라의 문화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는데, 그건 굉장히 흥미로운 대화 주제였다.
러시아의 호칭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연주와 양지은은 물론이고 레티시아도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그냥 아나스타샤면 충분해…….}
아나스타샤는 전부 설명을 하고 나서야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말끝을 흐리며 홍차 잔을 들었다.
그런데 이연주는 여전히 궁금한지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왜 처음엔 이즈마일로바라고 가르쳐 줬던 거야?}
{……내가 이름을 부르는 법까지 이렇게 설명하게 될 줄은 몰랐지.}
아무래도 아나스타샤는 파티장까지만 그녀들과 함께하고 이후 친해질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하듯 성으로 부르게 둔 것이다.
이제 아나스타샤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는지 이연주가 장난조로 물었다.
{은근히 선을 긋는 타입이구나? 아나스타샤 너.}
{대놓고 그러는데?}
{그, 그렇네.}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사람을 가린다고 하는 아나스타샤의 말에 이연주는 급격히 자신감을 잃었는지 웅얼거렸다.
확실히 아나스타샤는 아무에게나 무작정 잘해 주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한번 친해지면 이만큼 상냥한 아이도 드물다.
이연주가 눈치를 살피자 아나스타샤는 크게 웃으며 장난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 말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는 웃을 때 정말 예쁘게 휘어진다.
단번에 테이블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이연주에게 한국의 문화는 어떤지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 살가운 태도에 이연주도 조금 전 일은 금방 잊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대화 주제는 곧 콩쿠르로 이어졌다.
{타티아나는 콩쿠르 참가는 한 번이지만 다른 경험이 많고…… 기대되네. 우리 첫 무대는 어떻게 될지.}
나 역시 기대가 많다.
이렇게 잠시 대화만 해 봐도 모두 자기만의 자신 있는 한 수를 쥐고 있는 연주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무대에서의 모습은 오늘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겠지.
세연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바라보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싱긋 웃어 보이자 그녀는 묘하게 달아오른 눈빛으로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지켜봐 달라는 것 같다.
물론 난 그녀가 그렇게 바라지 않더라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다가올 무대의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역시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는지 이연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들 지금 묵고 있는 곳은 어때? 난 어제 짐 풀었는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아.}
{큰일? 왜? 집주인이 별로야?}
레티시아가 심각하게 물었다. 정말 문제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위원회에 이야기를 해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연주는 그 정도 일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들은 너무 좋아. 그런데 주택가라서 저녁엔 피아노 못 칠 것 같아. 다 이해해 줄 테니 괜찮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민폐 될까 싶어서.}
{그건 나도 그래. 그래서 연습실을 빌릴까 생각 중이긴 해.}
{밤에 하는 곳 있으려나?}
{음악원 근처로 보면 있을걸.}
콩쿠르 측에선 참가자들을 위해 충분한 조건들을 마련해 주었지만 역시 모든 것이 마음에 들 순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알아서 찾아서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땐 같은 콩쿠르 참가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것도 좋았다.
적당한 연습실이나 시간대를 놓고 이야기하다가, 레티시아와 이연주는 아예 내일 함께 움직이면서 연습도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거기에 자연스레 양지은도 끼었고 세연에게도 제안이 왔지만 세연은 거절했다. 자신이 낄 자리는 아니라 생각한 듯했다.
내일 모이기로 한 약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20대 세 명을 보며 세연은 밝게 웃었다.
{다들 즐거워 보인다.}
{후후, 그렇네요.}
{난 이런 자리에 내가 올 수 있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아…….}
세연은 중얼거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벨기에 귀족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는 경험은 아마 자주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리라.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단 뜻이었다.
그녀는 감격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콩쿠르가 시작되면 현실로 느껴질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젊은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꿈의 무대나 다름없긴 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부드럽고 달콤하지 않다.
일단 첫 무대에서 3분의 2가 탈락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세연은 아까도 그 부분을 한 번 짚었었다.
난 그녀가 천진난만하면서도 이렇게 연주자로서 갖추어야 할 분명한 현실 감각을 지녔다는 것이 기뻤다.
{아마 그렇겠죠. 하지만 오늘까진…… 꿈이라 생각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해요.}
{그렇지?}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좋겠지.
나도 세연과 오랜만에 만나서 좋고, 다른 사람들도 오늘만큼은 서로 같은 연주자라는 동질감만으로 뭉쳐서 즐거워하고 있으니까.
세연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진짜 아무 생각 않고 그냥 놀 거야. 레티시아 언니랑도 친해져야겠어.}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 전에 잠깐…… 손 좀 씻고 올게.}
그리고 세연은 쿠키를 집어 먹던 손을 탁탁 털더니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난 빙그레 웃으며 농담했다.
{나쁜 짓이라도 하셨나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후후후, 다녀오세요.}
세연이 일어나자 대화를 나누던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양지은이 무슨 일 있냐는 듯 물었다.
「어라, 어디 가?」
「화장실이요.」
「어디 있는 줄은 알고?」
「어딘가에는 있겠죠? 찾아가 볼게요.」
양지은과 이연주는 세연이 걱정되는지 필요하다면 따라가 줄 기세였지만, 세연은 자신은 괜찮으니 이야기를 나누라는 듯 마구 손사래를 치더니 후다닥 달아났다.
손 씻으러 간다고 하던 그녀를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우리 방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더라?}
{내가 찾은 연습실 어떠냐고.}
{아, 그래. 거기.}
세 사람은 다시 내일 약속을 위해 스마트폰을 들고 이것저것 검색을 하고 있었고, 난 아나스타샤와 쿠키들에 대해 평했다.
그녀가 마시는 홍차를 보니 나도 한 모금 마셔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카페인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만, 모처럼 오늘만큼은 파티를 즐기기로 마음먹기도 했으니 조금 들떠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요즘 너무 체면을 많이 깎아 먹은지라 난 되도록 믿음직스럽게 있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스로 마음을 누르며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그사이 대화 주제가 몇 번 바뀌고,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도 한 번 리필 되었다.
{바네사 왕비님은 이제 마지막 테이블이네.}
{정말 대단하시네. 저렇게 인사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아까 열정적이신 것 봤잖아.}
한 테이블에서 길어 봐야 3분 남짓이었지만, 그래도 열 개쯤 돌면 그 시간만 해도 30분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니 그 피로도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멀리서 본 왕비님은 전혀 피로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연주자들과 대화하고 계셨다.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그 책임감은 정말 왕비님이 콩쿠르의 큰 후원자로서 행동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인 듯했다.
난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바라보다가, 무언가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늦을 일인가?’
살짝 시간을 가늠해 보니 세연이 자리를 뜬 지 15분 정도 흐른 느낌이다.
세연이 의욕적으로 파티를 즐기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하는 나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오래 돌아오지 않자 살짝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10분이 더 흘렀다.
「세연이는 왜 안 오지?」
이젠 양지은도 오지 않는 후배가 신경 쓰이는지 고개를 들고는 파티장을 둘러보며 세연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왕비님도 떠나시고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파티장 그 어디에도 세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세연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 의식하고 있었는지 이연주도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전화를 해 보려고 해도 핸드백을 여기 두고 가서…….」
「핸드폰 그 안에 있어?」
「응.」
「그걸 왜 안 들고 갔대?」
「몰라. 금방 올 생각이었겠지.」
세연의 핸드백은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의 등받이 쪽에 놓여 있었다.
거추장스러워서 그냥 두고 간 모양인데, 이렇게 되어 버리니 상황이 답답해진다.
이 저택은 무척이나 넓다. 그래도 파티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섰다.
{제가 찾으러 가 볼게요.}
{그럼 나도…….}
{아뇨, 제가 세연이 갈 만한 동선만 보고 그래도 없으면 다시 돌아올게요. 그땐 직원에게 제대로 이야기해야겠죠.}
지금 모두가 일어나서 세연을 찾아다니고 직원에게 묻거나 한다면 일이 커진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다른 연주자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있진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그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나스타샤도 걱정된다는 듯한 눈빛을 하며 날 올려다보았지만, 그래도 내가 확실하게 의사를 밝히자 내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다녀올게요.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알았어. 타티아나.}
모두를 안심시킨 뒤 난 천천히 물러섰다.
일단 아까 세연이 파티장을 빠져나간 방향은 확인해 뒀다. 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