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6화
이 파티장과 저택은 정말 아름다웠다. 만약 세연의 모험심이 자극되었다면 잠깐 돌아다니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녀가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만약 그러고 싶었다면 일단 돌아온 다음에 그녀의 언니들이나 아니면 내게 같이 산책을 하자고 말했을 것이다.
세연이라면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같이 다니는 것을 선호할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의 가닥을 잡아 나가며 파티장을 나섰다.
“…….”
이 저택의 주인은 정말 파티장의 구성에 신경을 쓴 사람이었다. 안내 표지판이 바로 입구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주차장, 흡연 구역, 화장실, 의무실 등등이 모두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약도 안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림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고, 여러 언어로 쓰인 설명도 함께였다.
난 그 약도를 머릿속에 넣고는 일단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조금 멀긴 하지만 헤맬 일은 없을 텐데…….”
화장실은 저택 안의 것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파티장에서 나와 일직선으로 쭉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저택 옆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옆문이 있고, 그 옆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화장실이 있었다.
세연도 은근히 길을 잘 못 찾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일직선인 길을 헤맬 것 같진 않았다.
혹시 안에 있나 싶어서 괜히 들어가 손을 한 번 씻은 나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왔다.
‘어디로 갔을까.’
세연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서서 주위를 살폈다.
왔던 길로 그대로 다시 돌아가면 파티장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택을 빙 둘러 가는 옆길인데…… 세연이 무턱대고 이쪽으로 갔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그 근처로 향했다. 이쪽은 사람도 직원도 없이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한 파티장에 있다가 이런 곳으로 나오니 그 적막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난 이 적막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세연이라면 무서워서라도 이쪽으로 더 가진 않았을 것 같았다.
다시 맨 처음 떠올린 가설에 무게가 실린다. 세연이 돌아오다 말고 다른 연주자를 만나서 이야기 중일 것이란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아무리 둘러봐도 이야기 중인 사람이 없었다. 그럼 다음으로 파티장 밖에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흡연 구역이었다.
‘설마…….’
그런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세연이 상관없다고 한다면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 되도록 파티장 안에서 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급히 흡연 구역에 다다른 나는 벽 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남성 3명과 여성 1명이었는데 그중 세연은 없었다.
세연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얼른 다시 빠져나온 나는 안내 표지판 근처에 멈춰 섰다.
“…….”
잠깐 돌아다녔을 뿐인데도 더웠다.
이곳은 검증된 인원들에게만 주어진 초대장이 필요한 곳이고, 직원들도 무척이나 많다. 그러니 아마 세연에게 큰 문제가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살짝 불안감을 느꼈다.
일단 눈에 보이지 않고 연락할 방도도 없다는 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미 에르네스트의 일로 충분히 답답함을 느낀 바 있는 나로서는 지금 들끓는 감정을 참기 어려웠다.
불쑥 세연에게 화가 났다. 대체 왜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아, 어쩌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세연에게 화도 났지만, 걱정되는 마음이 뒤섞이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일단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서 아까 말했던 대로 제대로 직원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세연을 찾아봐야 하나 싶다.
아마 작은 소란이 일긴 하겠지만, 지금 이 답답함과 불안함을 그냥 안고 있긴 싫었다.
난 작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전에 혹시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빅토르에게 전화부터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막 스마트폰을 들었을 때였다.
{오, 베르체노바 양.}
스마트폰을 든 채로 고개만 돌려 옆을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실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사진으로 봤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피아노 연주자였다.
그는 반갑다는 듯한 제스처를 과장스럽게 하며 내게 다가왔다.
{맞지요?}
{안녕하세요.}
기분이 살짝 좋지 않은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일단 세연을 찾는 것에 신경이 쏠려 있긴 하지만, 이렇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그냥 무시해 버릴 순 없었다.
내 앞까지 적당히 다가온 그가 물었다.
{영어 됩니까?}
{조금요.}
{다행이군요. 바쁘지 않다면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예, 뭐…….}
나도 모르게 언짢은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남자는 내 태도에 크게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데이버 바리시치입니다. 크로아티아에서 왔죠. 이렇게 만나 반갑습니다.}
밝은 인사말에 난 살짝 미안함을 느끼며 그 손을 잡았다. 데이버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악수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난 차갑게 대한 것에 대한 사과로 옅게 웃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 해요.}
{알죠, 알죠. 그 이름! 요즘 베르체노바 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데이버는 기본적으로 액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손을 놓더니 들뜬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음반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베토벤도 슈만도 라흐마니노프도…… 저도 다 연주해 봤던 곡들이지만, 이렇게 깊이 있는 해석이 가능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다른 피아노 연주자에게서 음반에 대한 칭찬을 듣는다는 건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살짝 기분이 나아진 나는 차분하게 감사를 표했다.
데이버는 한동안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1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니, 이건 짚고 넘어가고 싶다는 듯 물었다.
{재작년에 무명으로 낸 건 어떻게 된 겁니까? 듣기로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계획한 것이라던데…… 막상 베르체노바 양은 아직 음악 학교에 있지 않습니까?}
{모스크바 음악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아니, 모릅니까?}
믿을 수 없다면서 데이버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내게 설명해 주었다.
듣자하니…… 러시아의 여러 음악가가 모여서 진행하는 한 비밀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 중심인물이 바로 나라는 것 같았다.
프로젝트 본부는 모스크바 음악원이고.
난 어이가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는데 그걸 오히려 흥미로워한다고 느꼈는지 데이버는 더더욱 깊게 말도 안 되는 루머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베르체노프가의 비밀 병기냐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괴상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 크로아티아 남자가 어느 정도 그 헛소문이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는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계속해서 자기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갈지도 모른다.
일단 그 착각을 고쳐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난 진지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루머를 사실로 믿지 말아 주세요.}
{아차, 실례했군요. 그럼 전혀 상관없는 겁니까?}
{예, 전혀……. 왜 그런 루머가 도는지 모르겠어요.}
{역시, 그럼 지금 사사하는 음악 학교 선생님이 전적으로 주도하신 거란 말이죠?}
{……그게.}
데이버는 일단 내가 주도적으로 음반에 관한 것을 진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음악원의 교수님이든 아니면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이 개입했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물론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난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인터뷰라도 해서 정확하게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진행한 프로젝트임을 밝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설명하기도 약간 귀찮고, 당장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
내가 똑바로 다 말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데이버가 물었다.
{누구 찾습니까?}
{예?}
{저와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자꾸 두리번거리시는 것 같아서.}
눈앞에 사람을 두고 똑바로 대하지 않고 다른 데에 신경 쓰는 건 무례한 일이다.
때문에 되도록 데이버에게 집중하려고 했는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해서 혹시나 세연이 지나다니지는 않나 살피고 있었다.
데이버는 그리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난 어쩔 수 없이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맞아요. 친구를 찾고 있어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습니까? 제가 눈치 없이 방해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파티장에 같이 있던 친구인데 잠깐 자리를 뜨더니 돌아오지 않아서요.}
{전화를 해 보죠?}
{스마트폰을 놓고 갔어요.}
상황을 알겠다는 듯 데이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멈칫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어, 음…… 그 친구분 인상착의가 혹시 어떻게 됩니까?}
{도와주시려고요?}
{가능하다면요.}
{전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조용히 도와주실 수 있나요?}
어차피 이대로 테이블로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분명 일이 커진다.
만약 데이버가 열심히 도와줘서 세연을 찾아 준다면,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만으로 해결될지도 모른다.
살짝 부탁조로 말하자 그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리하죠.}
그에게 집중하지 못했으면서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 미안하긴 하지만, 그 미안함은 나중에 보상하면 될 일이다.
난 손을 들어 내 머리쯤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키는 저와 비슷하고 푸른 원피스를 입었어요. 머리는 검고 어깨까지 내려오죠. 이름은 임세연이고 한국인이에요.}
{한국?}
{아시아에 있는 나라예요.}
{알아요.}
데이버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살짝 곤란한 미소를 짓더니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어쩐지 내 반응을 살피는 눈치라서 난 의아함을 느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자 데이버가 결국 말했다.
{그 친구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 것 같은데요.}
{예!?}
{음…… 이렇게 찾아다니고 있을 줄이야.}
그러더니 그는 슬쩍 물러섰다.
난 당장 빅토르를 불러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난처해하는 표정을 보니 그럴 일이 아닐 것 같긴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다시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약간 강압적으로 말했다.
{어딘가요?}
{그런데 정말 그녀를 찾아다녔던 건가요? 베르체노바 양. 임 양은 당신을 잘 모른다고 했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안내해 주세요.}
{뭐…… 그러죠.}
데이버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따라오라는 듯 앞장섰다. 난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그가 향한 곳은 파티장 옆에 있는 다른 구역이었다. 원래는 춤을 출 수 있게 조성된 공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사용하지 않아서 춤을 추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구석에는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한 테이블에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세 사람 다 낯이 익었다.
{……!!}
그중 한 사람인 세연이 날 발견하더니 몸을 들썩이며 반쯤 일어섰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두 사람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했다.
한 명은 아까 우리 테이블에 인사 왔었던 아르헨티나의 연주자, 알레한드로 페테르손이다.
그는 날 보더니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며칠 전 백화점에서 만났던 케빈 도너번이었다.
케빈은 날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음을 느꼈는지 살짝 당혹스러워했다.
“…….”
나와 데이버는 테이블 앞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데이버는 유쾌한 목소리로 날 소개했다.
{자, 여기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겠지? 베르체노바 양이야. 아까 파티장 옆에서 만났는데 여기 있는 임 양을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너무 동떨어진 곳에 있었던 모양이야.}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난 세연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데리고 나올 참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그렇게 겁에 질려 있거나 불안해하며 떨고 있지 않았다. 대신 내가 걱정된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는 이야기고 뭐고 저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되니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졌다.
“…….”
난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세연의 옆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
뭐든 좋으니까 일단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조금 알아봐야겠다. 그런 어두운 흥미를 가지며 난 날카롭게 모두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