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87화 (1,087/1,277)

##  1087화

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슬쩍 보니 테이블 위엔 와인병도 몇 개 있었고 술 냄새도 났다.

곧장 든 생각은 이들이 술에 취해서 지나가던 세연을 붙잡고 못 가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얌전히 앉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아니야.’

조금 더 유심히 보니 테이블의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엉망이지 않았다.

세연은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고, 알레한드로나 케빈의 눈빛에서 질 나쁜 기색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면 급할 것 없다.

사정에 따라 실례를 넘어 무례를 저질러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긴 콩쿠르 참가자들만 모인 파티 자리다. 되도록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이 사람들을 보고 상황을 봐서 대응하면 돼.’

그리고 겁먹고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이면 얕보일 것 같아서 싫었다.

콩쿠르 참가자들은 경쟁하는 관계다.

물론 파티장에선 서로 인사하고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지만, 반대로 보이지 않는 힘 싸움도 벌어지는 법이다.

내가 약해 보이면 금방 잡아먹힌다. 그리고 거기에 세연까지 말려들어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빅토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떻게 할까요.]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나 보다. 아마 내가 불필요한 트러블에 휘말린 건 아닌가 걱정하는 듯했다.

[대기하세요.]

난 짧게 답장했다.

아직 내 경호원이 와야 할 상황은 아니다. 일단은 내가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눈만 살짝 내리깐 채 스마트폰 화면을 톡톡 누르고 있자 세연이 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가까이하며 속삭였다.

{타티아나, 구해 주러 온 줄 알았는데 너도 같이 잡혀 버리면 어떻게 해?}

보기엔 괜찮아 보였는데 역시 약간 불편하긴 했나 보다.

그래도 속삭이는 목소리엔 농담기가 섞여 있었고, 그건 날 안심시켜 주었다. 난 딱히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세연이 속닥이기도 하자 데이버가 쓴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아까 저와 베르체노바 양은 인사했고…… 다른 두 사람은 제가 소개드리죠. 이쪽은…….}

{두 분 다 알아요.}

난 스마트폰을 보면서도 앞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곧장 반응했다.

{페테르손 씨 그리고 도너번 씨.}

두 사람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성을 알고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내 쪽으로 가지고 오는 데엔 효과가 있었다.

{왜 이런 곳에 계시나요?}

알레한드로는 적극적으로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레티시아가 눈치가 없다고 평가하고 싫어하기도 했지만, 내가 겪어 본 바는 없기에 일단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약간 조심할 뿐.

케빈은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와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사교도 문화이니 빠지면 후회할 거라며 내게 참석을 제안했었다.

다른 음악가들과의 교류를 중요시하는 건 좋았기에 난 그에게 동의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파티장 밖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이상하고 실망감이 든다.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많아서 무심하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알레한드로가 영어로 말했다. 짧고 간결한 어투였다.

{내 이름 기억하네?}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서요. 한번 본 사람은 좀처럼 잊지 않죠.}

{오호.}

사실은 잘 잊지만, 약간의 경고가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내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와인병들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왜 이런 곳에 있는가……. 모처럼 피아니스트들이 교류하는 자리이니 너무 시끄러운 곳은 별로라 생각해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갔다. 교류하고 싶다면 더더욱 파티장에 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알레한드로가 이어 설명했다.

{원래는 아는 사람들이랑 인사하고 술이나 좀 마시고 가려고 했는데, 데이버와 음악에 대한 견해로 논쟁이 붙었거든.}

{논쟁이요?}

{그래. 흔한 이야기지.}

그건 예상 못 한 답변이었다.

레티시아의 평가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짝 방어적으로 대하고 있었지만, 알레한드로 역시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인 것이다.

알레한드로는 얼마 남지 않은 와인 잔을 들어 다 마셔 버리고는 눈을 똑바로 뜨고 날 마주했다.

{그런데 파티장 안엔 벨기에 왕비가 돌아다녀서 이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더라고. 다들 쓸데없는 질답이나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조용한 여기에 자리를 잡았지.}

{그럼 도너번 씨는요?}

{전 파티장에 있다가 잡혀 왔어요.}

케빈은 한숨을 쉬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술에 취해 언뜻 광기 어린 음악가의 눈빛까지 보이는 알레한드로에 비해 케빈은 조금 덜 마신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데이버와 알레한드로를 번갈아 가리키더니 말했다.

{난데없이 둘 중 누구 말이 맞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말해 줬더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고…….}

그리고 케빈은 내가 궁금해하던 것 역시 설명해 주었다.

{임 양도 저와 같은 처지죠. 괜히 두리번거리다가 알레한드로에게 붙잡혔으니까요.}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느꼈던 것처럼 그녀가 여기에 붙잡혀 있는 건 맞는데……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하자 세연이 얼른 이야기했다.

{정원이 너무 예뻐서 조금만 돌아보려고 했었거든. 혹시 좋은 곳 있으면 너희랑 같이 잠깐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이곳까지 왔는데 붙잡힌 거군요?}

{응. 근데 괜찮아! 슬슬 돌아갈까 생각이 들긴 했었지만…… 어, 다들 좋은 분이라서.}

들어 보니 정말로 세연을 앉혀 놓곤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한 모양이다.

그럼 세연이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음은 그녀가 했다던 이상한 말에 대해 확인할 때였다.

{그런데, 왜 절 모른다고 말씀하셨던 건가요?}

{응? 어?}

세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직접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오, 오해하지 마. 난…… 네가 휩쓸리지 않았으면 해서……. 저번에도 내 멋대로 널 끌어들인 적이 있었잖아? 이번엔 그러기 싫었어…….}

역시 그건 예상했던 대로였다.

세연은 처음 보는 남자들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도망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함은 있었기에 나까지 엮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스마트폰도 없어서 방법도 없었을 테지만…… 이참에 확실히 말해야 할 것 같다.

{왜 그랬는진 알겠어요. 하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세연은 얼마든지 절 끌어들이셔도 괜찮아요.}

{그치만…….}

{정말이에요. 되레 절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하지 않으시면 화낼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세연은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난 정말 진심이었다.

날 작정하고 이용해도 상관없는 사람이 세상에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세연이었다.

물론 그건 이기적인 마음으로 정해 놓은 다짐 같은 것이라서 세연에게 자세히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한결 마음은 편해졌다. 앞의 세 사람도 딱히 세연에게 왜 그랬냐고 더 따지고 들진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구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수상하게 여겨 모른다고 답할 수도 있다는 걸 모두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들에게서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아무튼. 세연을 논쟁에 끌어들였다면서 제 이름은 왜 나온 건가요?}

간과할 수 있는 지점이었지만 난 분명히 짚었다.

음악에 대한 논쟁을 하고 있었고, 의견을 낼 사람이 필요해서 지나가던 케빈과 세연을 무작위로 붙잡은 것이라면 거기에 내가 필요할 이유는 없었다.

누가 세연에게서 날 끌어내려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난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나름 생각하며 한 내 질문에 알레한드로는 짧고 명료하게 답했다.

{네가 슈만에 대해선 우리보다 전문가인 것 같아서.}

뭔가 아까부터 이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자꾸 틀어진다.

난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나보다 열 살은 많은 선배 연주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겸손조차 오만이 될 것 같다.

이해가 안 되다 보니 그의 말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게 점수를 따기 위해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음악가인 난 알 수 있었다. 지금 알레한드로는 대충 거짓말을 지어내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더없이 진지한 평가였다.

{모처럼 슈만 이야기가 나왔었거든. 그런데 네 음반에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 있었잖아? 난 그 곡에 상당히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넌 슈만의 전문가로 불린다며?}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난 멈칫했다.

슈만 연구회의 아이들이 아직도 종종 날 찾곤 하지만, 그건 학교에서 내부적으로 도는 이야기다.

학교 밖 사람이 그걸 안다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에르네스트가 그러던데.}

{예?}

난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생각도 못 한 사람의 입에서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놀란 내 얼굴을 보고 알레한드로는 드디어 성공이라는 듯 껄껄 웃더니 와인을 잔에 다시 따르며 입을 열었다.

“난 옛날에 러시아에서 유학했었거든. 그래서 러시아 피아니스트 친구들이 많지. 에르네스트도 그중 하나고.”

알레한드로는 꽤 유창한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러시아어를 쓸 수 있는데도 일부러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허물어진다.

난 이 정도로 경계가 느슨해져도 되나 싶었지만, 일단 내가 모르는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조금 더 협조적으로 굴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눈빛을 달리하자 알레한드로는 와인으로 입을 축이곤 이어 말했다.

“그 녀석은 꼬맹이 때부터 진지한 면이 있어서 가끔 전화로 이야기하면 재미있었어. 그런데 재작년이었나? 그 정도 실력이면서 왜 음악원에 가지 않고 음악학교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녀석이 그러더군.”

알레한드로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음악학교의 꼭대기에 올라서고 나서야 그다음으로 갈 근거가 생기는데, 지금은 그렇게 자만할 수 없다고.”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알레한드로가 에르네스트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과 에르네스트가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난 묘한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랬나요…….”

“그래. 그런데 누군지는 절대로 말 안 해 주더라. 단서만 몇 가지 있었지. 그 의문의 피아니스트는 교내에서 슈만으로 유명해서 학생들에게 불려 다니기도 하고, 한 번은 프로코피예프에 된통 당한 적도 있다고.”

전부 내 이야기였다.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가 그런 이야기를 타인에게 했다는 것이 조금 놀랍긴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나이도 많고 진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선배 음악가이니 에르네스트도 그 정도 설명은 해도 되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은 건 그의 마지막 의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알레한드로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건 에르네스트가 날 숨기는 데에 실패했단 뜻이겠지만.

알레한드로는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 콧대 높은 녀석에게 한 방 먹인 게 누군지 궁금했었는데…… 러시아에서 묘한 소문이 들려오더라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대상과 온갖 특별상을 독식하고는 앙팡 테리블이란 별명을 얻은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앙팡 테리블은 프로코피예프의 학생 시절 별명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심증 등을 종합해서 알레한드로는 에르네스트가 말하던 사람이 나라는 걸 추리한 듯했다.

“바로 알아 버렸지. 아하! 하고 말이야.”

알레한드로는 킬킬 웃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난 그 말투에서 약간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그런 게 있어.”

알레한드로는 대답해 주지 않고 웃으며 와인을 마시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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