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8화
알레한드로라는 사람을 슬슬 알 것 같았다.
일단 그는 주당이다. 지금 가만 보면 계속 술을 마시는 건 그밖에 없었다. 여기 비어 있는 와인병들은 모두 그의 작품인 것 같았다.
손을 정교하게 움직여야 하는 악기 연주자가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서 어쩌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연주자로서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할 정도이니 당연히 실력도 마인드도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그에게선 어떠한 광기가 느껴졌다.
음악에 미쳐 있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광기다.
문제는 내가 이런 부류의 사람을 싫어할 수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레티시아가 경고하기도 했고…… 솔직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음악가로서 진지한 면과 내가 모르는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가까워져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어쩌지.’
살살 구슬려 볼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하면 해 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술에 취했으면서도 여전히 사리 분별이 정확해 보이는 그를 내가 원하는 대로 휘두르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와인을 조금 더 먹여 볼까?’
살짝 고민하고 있자 알레한드로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킥킥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아무튼…… 그 후로 확신을 가지고 에르네스트에게 몇 번 물어봤는데, 대답을 몇 번 피하더니 나중엔 전화를 안 받더라.”
그런데 그 웃음이 마냥 밝은 건 아니었다.
아마 내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에르네스트도 불편해서 피하게 된 것 같은데, 그건 무척 실례되는 행동이긴 하다.
에르네스트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어쩌면 내가 그 원망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난 약간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화가 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내가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절교당해 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그 와중에 팔을 부러뜨려 먹질 않나……. 그 싸가지 없는 자식, 너한텐 잘하냐?”
“그…….”
갑자기 알레한드로의 입장에 공감이 갔다.
에르네스트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만큼 제멋대로인 경향이 뚜렷하다.
난 그런 성격도 존중하며 좋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이번엔 솔직히 그리 좋은 감정만 있진 않았다.
“사실 저도 지금 에르네스트와 연락이 안 돼요.”
“미친, 진짜? 제정신 아니네?”
“아, 싸우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 작곡 콩쿠르에 참가해 있어요. 그래서 외부와 연락을 모두 차단당했다고…….”
알레한드로는 깜짝 놀라 허리를 일으키더니 내가 덧붙여 설명하자 다시 의자에 반쯤 드러누우며 말했다.
“뭐야, 그럼 진즉 그렇게 말하지.”
사실 그와 연락이 안 되는 건 상관없었다. 규칙이 그렇다면 그런 것일 테니까.
다만 내가 삐쳐 있는 포인트는 그가 떠나기 전에 내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고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때 더 화를 내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정말 후회되는 일이다.
갑자기 또 잊고 있던 생각이 나서 조용히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알레한드로는 삐딱하게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무튼…… 가기 전에 나랑 사진이나 하나 찍자. 에르네스트 녀석한테 보내 줘야지.”
“왜, 왜요?”
“왜긴 왜야? 그냥.”
연락을 무시하는 에르네스트에게 장난을 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딱 잘라 말했다.
“싫어요.”
“왜?”
“하셨던 대답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그냥요.”
“어허, 서로 사진도 찍고 해야 사교 파티에 온 보람이 있지.”
“아무튼 싫어요.”
알레한드로는 오늘 증거 사진을 가져가야 나중에 에르네스트를 괴롭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끈질기게 권유했지만 난 계속 거절했다.
그런 이유로 잘 모르는 사람과 사진을 찍고 싶진 않다.
그렇게 몇 번 더 말이 오가는 사이, 데이버가 슬슬 이쯤 하면 되었지 않느냐는 듯 끼어들었다.
{저기…… 뭔가 자꾸 싫다고 하는 것만 들리는데. 뭔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도 알아들을 수 있게 대화해 주면 안 될까요, 두 사람?}
{앗.}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데이버와 케빈, 세연은 말없이 우릴 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러시아어를 모르니 같이 이해할 수도 없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알레한드로가 단둘이 이야기하게 그냥 두기엔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둘만 알아듣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난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데이버는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같이 사과해야 할 알레한드로는 뭐 그런 걸 가지고 사과까지 하냐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일단 이거나 한잔할래?}
난 와인병을 흔드는 그의 모습을 보며 눈을 흘기다가 거절했다.
{싫어요.}
{왜? 이제 술 마셔도 되는 나이 아닌가.}
{안 돼요. 혹시 세연에게도 먹인 건 아니죠?}
{권유는 했지.}
{…….}
{까다롭네.}
내가 노려보자 알레한드로는 눈썹을 씰룩이더니 자기 잔에만 와인을 따랐다. 난 조용히 그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직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진 못하겠다.
하지만 여러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나나 세연을 무슨 조카 다루듯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약간 어이가 없어서 난 못마땅한 시선으로 알레한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와인 옆에 있는 소다를 가리켰다.
{그럼 이거라도 마시든가.}
{괜찮아요.}
{그럼 쿠키라도 먹을래?}
{생각 없어요.}
파티장에서 아무거나 받아먹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건 아니다. 여긴 검증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까.
그냥 딱히 무언가 입에 넣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네.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본래 목적은 세연을 찾아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할 순 없어서 잠깐 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알레한드로 역시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세연과 속닥거리며 이야기하는 걸 다 들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난 그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세 분이 어떤 분들이신지 알고 싶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고 나서 적절하게 대응하려 했었으니까.
알레한드로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깐 레티시아가 쫓아내서 제대로 인사 못 했는데. 그거 때문이야?}
{그런 걸로 칠게요.}
{그런 걸로 치겠다라…….}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어디까지 허용할지 알아보겠단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는 경쾌하게 웃으며 양손을 테이블 위로 펼쳤다.
{그럼 원래 하려던 슈만 이야기나 해 볼까?}
그런 건 환영이다.
나도 음악 이야기라면 밤새워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의견을 물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에 모두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케빈이 툭 끼어들었다.
{슬슬 보내 줘, 알레한드로.}
{뭐?}
{둘 다 불편해하잖아.}
아마 케빈은 세연과 같은 처지로 앉아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생각해 준 듯했다.
나이 많은 선배 음악가들, 심지어 며칠 후면 이들과 동등한 라인에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음악 이야기로 논쟁 같은 걸 하면 기세에서 밀려 버릴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 깊은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내가 논쟁에 별로 겁먹지 않는 것처럼 알레한드로 역시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불편하면 우리 같은 건 신경 안 쓰고 가겠지. 그렇지 않으니까 앉아 있는 것 아니야?}
{하…… 눈치 없기는.}
{왜 눈치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저 아가씨들이 당신 같은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싶겠냐고.}
이번엔 조금 현실적인 이유였다.
물론 난 그것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번엔 알레한드로에게 조금 먹혀들었는지 그는 인상을 팍 쓰더니 케빈에게 따지고 들었다.
{나 아직 스물일곱 살밖에 안 됐거든? 피아니스트들끼리 나이가 무슨 상관인데?}
{나이는 상관없다고? 몇 년 전에 잭슨 피어럴 씨랑 싸웠을 땐 나이 가지고 꼰대라고 공격하지 않았어?}
{그 양반은 꼰대 맞으니까.}
알레한드로의 기준은 제멋대로였다.
그는 아직은 남의 눈치 보면서 살고 싶지 않다며 한참이나 일장 연설을 토했다.
그 말은 알겠지만…… 솔직히 술 먹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웃긴 건 어쩔 수 없었다.
케빈은 스물네 살로 알레한드로보다 어리지만 약간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려는 사람이었다.
케빈 그리고 나와 세연은 똑같이 붙잡혀 온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케빈은 우리를 조금 더 신경 써 주고 있었다.
{아무튼 쓸데없이 괴롭히지 마. 술을 권하거나…… 그랬다간 이 아가씨 경호원이 가만 안 있을걸.}
{허 참, 좋은 집 딸들은 술도 마시면 안 되냐?}
{그게 아니라…… 딱 보면 모르겠냐고…….}
케빈은 내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과 그렇게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 같았다.
그 분석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배시시 웃으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제가 보기엔 좀 약해 보이죠. 저도 알아요. 그래서 이런 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는 있겠냐는 말도 듣고…….}
그런데 약간 자조적으로 한 내 말에 점잖던 케빈이 벌컥 성을 내며 격한 말을 쏟아 냈다.
{누가 베르체노바 양의 실력을 의심합니까? 어떤 미친놈이?}
{바네사 왕비님이요…….}
{…….}
케빈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화내 주는 건 좋은데 아무래도 너무 급했다.
우리가 하는 코미디를 보고 있던 알레한드로는 그야말로 폭소하며 테이블을 탕탕 쳤다.
{푸하하하, 그런 말을 들었단 말이야?}
{아, 놀라워하시는 뉘앙스였어요. 오해하진 마세요.}
{아무튼 간에. 재미있네. 재미있어.}
숨이 넘어가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약간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러나 케빈이 한 말대로 이제 슬슬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았다. 난 다른 사람들에게 금방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뜬 참이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여기 붙잡혀 있으면 그녀들이 더 걱정할지도 모른다.
적당히 맞장구 쳐 주다가 일어날까 생각할 때였다. 데이버가 내 행동의 맥을 끊어 버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그래요, 뭐 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고 했었죠? 그럼 우리 게임이나 하나 할까요?}
{게임이요?}
{예. 이런 곳에서 하기에 딱 좋은 게임이죠.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에도 좋고, 서로 알아 가기에도 좋고.}
솔직히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이 사람들이 위험한지 아닌지 정도였지 더 자세하게 알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데이버가 모처럼 제안한 게임을 거절하고 일어나려면 정말로 매몰차게 해야만 했다. 아니면 적당한 이유가 있거나.
잠깐이나마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미안함을 느낀 나는 이 이상 독하게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게임인데요?}
내가 이 자리에 앉은 건 얕잡히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게임엔 딱히 자신이 없지만…… 세연과 같이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