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9화
내가 알기로 데이버는 스물두 살로 남자 세 명 중에선 가장 어렸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술을 마시느라 바빴고, 케빈은 끌려온 입장이라서 이 상황은 묘하게 데이버가 주도하고 있었다.
세연과 내가 자리를 뜰 것 같은 낌새를 보이자 게임을 제안한 것도 아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함인 것 같은데……
이 정도로 노력한다면 잠깐 협조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진실과 거짓을 밝히는 파티 게임입니다.}
데이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의 흥미를 조금 더 끌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은근하게 조성하려던 분위기를 알레한드로가 끼어들어 깨뜨렸다.
{또 희한한 걸 준비했네. 뭐냐 그건?}
{……지금 카드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로 할 수 있는 게임을 하면 좋잖아?}
식사나 댄스 등의 주제가 있는 게 아닌 자유로운 파티이다 보니 테이블마다 게임 같은 것을 해도 무방했다.
아마 트럼프 카드 게임도 허용될 테지만, 다섯 명이서 하기엔 조금 애매했다. 그래서 적당한 파티 게임을 하자는 것 같은데…….
진실과 거짓을 밝히는 게임이라고 해도 그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난 약간 더 신중해졌다.
벌써부터 이 사람들과 진실 게임 같은 것을 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지켜보는 사이, 케빈이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데이버. 우린 차치하고 여기 베르체노바 양은 만난 지 5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그건 너무 깊게 가는 거 아니야?}
{아, 심도 깊은 이야기를 캐내는 게임이 아니니 걱정 마. 어디까지나 친해지기 위한 파티 게임이라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게임이라고 데이버는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관심 있습니까?}
만약 이상한 게임이라면 그때 거절하고 떠나도 상관없겠지. 괜찮은 게임이라면 적당히 한 게임 정도는 같이해서 이 상황을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난 일부러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한 번 보고 데이버에게 물었다.
{오래 걸릴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다섯 명이서 하면 15분 정도?}
{그럼 잠시 메시지 하나 보낼게요.}
{아, 그러시죠.}
확실히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가 돌아다니다가 이 자리에 합석해서 보낸 시간까지 합치자면 너무 길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지금 세연을 찾았는데 다른 테이블에서 잠깐 인사만 하고 가겠다는 메시지였다.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더 할지 특정해서 말하진 않았다.
괜히 아나스타샤나 레티시아가 걱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특히 레티시아는 알레한드로를 싫어하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데, 비스듬하게 의자에 앉아서 날 바라보고 있던 알레한드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벌써 대충 베르체노바의 성격을 알 것 같은데?}
나야말로 레티시아가 저 사람을 왜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난 일부러 그를 무시하고 메시지를 적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보내기 직전, 나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세연은 어떤가요?}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던 세연은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웃었다.
{괜찮아. 아까랑은 달리 네가 옆에 있기도 하고…… 같이 붙잡혀 준 데엔 이유가 있는 거잖아?}
세연의 목소리에선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 있진 않을 거라고 믿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놀다가 가자.}
{알겠어요.}
세연은 일부러 놀자는 단어를 강하게 말했다. 조금 더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있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타티아나, 게임 같은 거 잘하는 편이야?}
{아뇨, 전혀.}
{괜찮겠어……?}
난 게임에 정말 약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하기만 하진 않는다.
이번엔 진실과 거짓을 밝혀내는 게임이라고 했으니 아마 운동 신경을 필요로 하는 게임은 아닐 것이다.
머리를 쓰는 종류라면 그럭저럭 자기 몫 정도는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운을 시험하는 게임이 아니길 바라보죠.}
만약 운이 필요한 게임이라면 그냥 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난 정말 끔찍할 정도로 게임 운이 없었다.
케빈과 무언가 이야기하던 데이버는 내 말을 들었는지 약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보통 게임에 자신이 없다면 운에 맡기는 게임을 바랄 텐데요?}
난 굳이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굳이 내 약점을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
데이버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 살짝 안달이 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상관없습니다. 약간의 운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단 감식안이 더 중요한 게임이니까요.}
그는 곧바로 게임의 규칙을 설명했다.
규칙은 단순했다. 참가자인 다섯 사람은 각각 순서가 왔을 때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밝히면 된다. 그 정보는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었다.
단, 정보는 총 세 가지를 밝히게 되어 있는데 그중 두 가지는 진실이고 한 가지는 거짓이어야 했다.
그렇게 세 가지 정보가 주어지면 다른 네 사람이 그중 거짓 정보를 찾아내면 되는 게임이었다.
‘규칙이 어렵진 않은데…….’
진실과 거짓 게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긴 했지만 친목을 위한 파티 게임답게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한 전형적인 게임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정보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 사이에 거짓 정보를 진짜인 것처럼 섞어 넣어야 한다는 점이 골치 아팠다.
슬쩍 보니 세연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회전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 같을 정도였다.
그런데 게임은 둘째 치고 그 이후에 관심이 있는 남자도 있었다. 알레한드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기면 뭐가 좋은데?}
{글쎄, 그건 정하기 나름이지. 거짓이 탄로 난 사람이 한 잔 마신다든가, 아니면 맞춘 사람이 무언가 시킨다든가…… 보통은 그런 게 파티에 걸맞은 규칙이니까.}
데이버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슬쩍 나와 세연 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눈빛이었다.
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과격한 벌칙이 있을수록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좋다는 데엔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럼없이 유쾌하게 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데이버도 무리해서 진행할 생각은 없는지 피식 웃더니 제안했다.
{지금은…… 그래, 상품을 걸어 볼까?}
{상품?}
알레한드로가 묻자 데이버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선 사진 갤러리를 펼치고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 보여 주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종이 위에 쓰인 사인이었다. 모두 그 사인이 뭔지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이버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일 잘한 사람에겐 내 수집품 중에서 원하는 게 있다면 줄게.}
{이거…… 사인이야? 누구 건데?}
{다양해. 지금 이건 파데레프스키, 그다음 소토코프스키, 폴리니, 하이페츠,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베르디…….}
데이버는 손가락을 뻗어 화면을 옆으로 휙휙 넘기며 음악가들의 이름을 읊었다.
그는 유명 음악가들의 사인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임을 제안한 사람이 이렇게 상품을 거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 상품들의 가치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사인은 최소 수백 달러는 넘을 텐데……?’
파티장에서 게임을 하는 것까진 괜찮다. 상품이 걸리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그 상품의 가치가 너무 높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인물이었고, 대중들에게 사인도 자주 해 주어서 그 희귀도가 조금 낮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고 작은 쪽지에 쓴 사인도 최소 수백 달러다.
예전에 찾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사인지나 악보, 음반 등에 사인이 된 것은 만 달러도 넘어간다.
물론 데이버가 보여 준 것은 대부분 일반 종이에 쓰인 것들이었지만…… 난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안 돼요. 너무 비싸잖아요.}
데이버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버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생각보다 그리 비싸진 않아요. 비싸 봐야 천 달러 정도?}
{그게 어떻게 안 비싼가요? 그리고 개인 수집품으로 모으신 거잖아요.}
난 딱히 무언가 모으는 취미는 없지만, 그래도 수집가들에게 있어 수집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잘 안다.
저 사인들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걸 어렵게 구한 게 많을 텐데, 이런 식으로 상품으로 내놓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심지어 원하는 걸 그냥 주겠다는 식으로.
그러나 데이버의 눈빛에서 아쉬움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내 손에 있지만 언젠가 이 사인들도 그 가치를 아는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겠죠. 그게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에요.}
100년도 넘은 사인들을 수집하는 데이버는 이후 100년의 일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가치를 평가액보다 소유자에게서 보는 관점은 굉장히 특이했다.
그러나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린 오랜 유산들을 지키고 되살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내 표정을 본 데이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흥미가 아주 없으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게 하시네요.}
그의 수집품들에 욕심을 내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간다.
이건 본능적인 것이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까 게임을 제안한 것도 그렇고, 데이버는 묘하게 날 끌어들이는 지점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 조금 끌려가는 기분도 없잖아 있지만…… 세연도 모처럼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까 잠깐 어울려 줄 생각이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데이버는 잘되었다는 듯 웃으며 박수를 치더니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답은 어떻게 확인하지?}
{여기 냅킨에다가 각자 거짓 정보를 몇 번째로 말할 건지 숫자를 적어서 가지고 있자.}
{일단 숫자만 적어 놓으면 되는 거지?}
{그렇지.}
반칙할 수 없도록 세부적인 규칙을 정하고 다섯 명 중 승자를 가리기 위한 규칙도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거짓을 잡아내면 1점, 자신의 거짓이 밝혀지면 마이너스 1점이다.
종합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승자가 되는 간단한 규칙이었다.
{제안자인 내가 먼저 하는 게 좋겠네.}
합의를 모두 마치고 모두 어떤 정보를 내놓아야 할지 골몰하는 사이 데이버가 먼저 말했다.
일단 게임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우린 그에게 집중했다. 모두의 시선을 마주하며 데이버가 손가락을 들었다.
{하나, 난 운동을 좋아한다.}
난 데이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키는 185cm 정도 되어 보였다. 저렇게 키도 크고 체격도 좋으니 운동을 좋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피아노 연주자였다. 연주자들은 기본적으로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아리송했다. 이런 부분을 꿰뚫어 보는 것이 바로 이 게임의 묘미였다.
{둘, 난 개를 싫어한다.}
{왜요?}
{……?}
나도 모르게 물어보고 말았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부끄러움에 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대체 어떻게 개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집에 있는 벨카를 떠올리면 그 귀여운 생명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는지 상상도 안 간다.
그러나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 세상에 존재한다. 물렸을 수도 있고, 그냥 싫어할 수도 있겠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데이버는 피식 웃고는 대답하지 않고 마지막 정보를 공개했다.
{셋, 난 한 번도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다.}
그걸 듣자마자 알레한드로와 케빈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말했다.
{마지막 건 진실이겠네.}
{그럼 운동을 싫어하거나 개를 좋아하는 건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두 사람은 세 번째 정보를 진실로 확정 지었고, 데이버의 표정은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헤이…… 왜 그걸 진실이라고 못 박고 가는 건데?}
{굳이 그런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이 게임은 위장된 거짓을 맞추는 게임이라고!!}
여유롭게 이 테이블을 주도하던 데이버가 평정을 잃은 모습을 보고 두 남자는 박장대소했다.
{아니, 이렇게 하는 게임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알레한드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은근히 엇나가던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죽이 척척 맞았다.
큰 관점에서 보면 데이버가 게임을 제안한 목적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데이버는 망신창이였다. 그는 제발 부탁한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난 표정 관리를 하느라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