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0화
알레한드로와 케빈은 데이버를 놀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지만, 난 그 와중에도 그의 말을 짚어 보고 있었다. 어떤 게임이든 일단 이길 생각이었으니까.
데이버가 밝힌 정보 세 가지는 운동을 좋아하고, 개를 싫어하고,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잠깐 만나 보고 느낀 첫인상이나 선입견으로 그에 대해 알긴 어려웠다. 특히 개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는 더더욱.
그러나 의심스러운 것을 하나 꼽을 순 있었다.
‘인기가 없을 것 같진 않아.’
취향은 둘째 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데이버는 겉모습에 문제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있는 것 같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알레한드로의 놀림에 진심으로 화가 나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티 나긴 하지만 세 번째가 거짓일 것 같았다.
우리 네 명에겐 서로 이야기를 하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일단 알레한드로와 케빈은 문제를 맞히는 데엔 관심이 없고 데이버에게 치욕을 주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말이 안 통했다. 그래서 난 세연과 의견을 교환했다.
{내 생각도 너랑 비슷해, 타티아나.}
세연은 이 게임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데이버가 쉬운 문제를 낸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못마땅한 얼굴로 데이버가 말했다.
{자, 의논은 그쯤 하시고. 슬슬 답을 정하시죠.}
알레한드로는 장난기가 가득한 몸짓을 했다.
{음…… 난 1번. 네가 운동을 싫어한다에 걸겠어.}
{그럼 난 2번으로 할게. 사실 개 키우고 있는 것 아니야?}
{…….}
데이버는 두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다음으로 나와 세연이 말했다.
{전 3번. 연애 경험이 있으신 걸로 할게요.}
{저도요.}
우리 두 사람의 말에 데이버는 간신히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내 영혼을 구했어요.}
{그럴 것까진…….}
부담스러움에 당혹스러워하자 데이버는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정답인 거짓은 3번. 난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이 있다.}
데이버의 선언에도 두 남자는 끝까지 장난을 쳤다.
{에이, 진짜? 설마 다섯 살 때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
{믿기 어려운데. 사진이라도 보여 줘 봐.}
{당신들이 그런들 신경 안 써. 일단 베르체노바 양과 임 양은 맞혔으니까.}
완전히 차분함을 되찾은 데이버가 거의 무시하듯 말하자 그제야 두 사람은 재미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데이버는 한숨을 쉬며 집계용으로 켜 놓은 스마트폰 앱에 점수를 적었다. 나와 세연이 1점씩 그리고 데이버는 -1점이었다.
‘어떻게 하는 건진 알겠어.’
실제로 해 보니 한 번에 게임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네 명도 이 게임을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는지 각자 어렵게 문제를 내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도 꽤 진지하게 게임에 쓸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사실 세연을 데리고 나오기 전에 상황을 제대로 매듭짓기만 할 생각이었고, 상품이 걸리고 나자 거기에 주목적을 두긴 했지만……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용기 있게 다음 순서로 나선 건 세연이었다.
{음…… 이렇게 내도 될진 잘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볼게요.}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그녀를 응원하자 세연은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전 매운 것을 잘 먹어요.}
한국 사람들이 매운 음식에 강하다는 건 이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 전 수학을 잘 못 해요.}
세연은 고정 관념을 문제로 내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당연히 아시아인이라도 수학을 못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정보는 진지하던 우릴 뒤집어 놓았다.
{마지막, 전 팔꿈치를 혀로 핥을 수 있어요.}
{뭐!?}
{뭐라고?}
다들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만큼 세연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직접 팔을 들고 혀를 내밀기까지 했다. 저 사람 정말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이게 된다고?}
{그거 보통은 안 돼. 진짜 유연하거나 혀가 긴 사람만 될 텐데.}
{대놓고 거짓말을 해서 다른 걸 찍게 하는 건가?}
{다른 게 뭐였지? 매운 걸 잘 먹고, 수학을 잘 못 한다?}
{맞아.}
좌중은 혼란에 빠졌다. 앞선 두 정보는 차치하고, 팔꿈치에 혀가 닿는다는 것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뚫어져라 세연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 시선이 심히 부담스러운지 세연은 어깨를 움츠렸다.
혼자 중얼거리다가 재차 팔꿈치에 혀가 닿나 실험해 보던 알레한드로는 급기야 세연에게 말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혀 좀 쭉 내밀어 볼래?}
{실례예요!!!}
세연이 빽 소리를 쳤고 케빈은 미쳤냐는 듯 알레한드로를 윽박질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끌려 나가고 싶어?}
{말이 안 되잖아 이거…….}
{우리 다 놀아나고 있어.}
세연의 충격적인 정보 공개로 퍼진 혼란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세연은 정말 이 게임을 빠르게 파악하고 영리하게 머리를 잘 쓴 것이다.
여러 의견이 한참이나 오갔지만 그럴싸한 정답은 나오지 않았고, 분위기를 지켜보던 세연이 슬쩍 물었다.
{다들 정하셨나요?}
알레한드로와 데이버는 세연의 블러핑에 절대 속지 않겠다며 팔꿈치에 혀가 닿는다는 정보를 거짓으로, 케빈은 잘 모르겠으니 찍겠다며 수학을 잘 못 한다는 정보가 거짓일 거라고 대답했다.
‘모르겠어.’
나도 세연과 안 지 오래되었지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공정하게 문제를 낸 것이다.
팔꿈치는 차치하고…… 매운 걸 잘 먹는지, 수학을 잘 못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사실 조금 충격이었다.
같이 식사한 적은 많지만 상세한 취향은 일부러 묻지 않았고, 연락을 할 때도 주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하지만 친구 사이라면 사소한 이야기들도 많이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난 속으로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어쨌든 결정은 해야 했다. 난 마지막으로 아무도 고르지 않은 첫 번째를 선택했다. 세연이 깜짝 놀랐다.
{어라? 내가 너한테 혹시 이야기했었니?}
{예? 뭘요?}
{내가 매운 음식 잘 못 먹는다고…….}
설마 내가 맞혔나?
하지만 이대로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행위를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난 내가 어떤 이유로 선택한 것인지 사실대로 말했다.
{아뇨. 적어도 네 명이서 모든 선택지를 다 골라 놓으면 제출자는 마이너스 점수가 될 테니까요.}
{너무해……!}
내 설명에 세연은 정말로 토라진 듯 소리쳤다. 난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짜로 그 이유밖에 없었으니까.
옆에 있던 알레한드로가 감탄했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주 논리적이고 냉철해. 훌륭하다, 베르체노바.}
{칭찬하지 마세요.}
난 날카롭게 쏘아붙이곤 세연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내가 끈질기게 다독이자 결국 풀어졌다.
{정답은 매운 것을 잘 먹는다입니다.}
당연히 추후 확인이 들어갔다.
{그건 상관없어. 수학을 잘 못 하는 것이 진실이어도 상관없고. 그런데 팔꿈치에 혀가 닿는다고? 진짜로?}
{네.}
{증명해 줘야겠는데.}
그제야 세연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는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곤 허둥거렸다.
그러나 모두 그런 세연의 반응엔 별 관심이 없었다. 정말로 팔꿈치에 혀가 닿는지 안 닿는지, 그것만이 관심사였다.
거의 부끄러워 죽기 직전인 표정으로 세연은 가까스로 자신의 재주를 증명해 냈다. 마치 기적을 목도한 사람들처럼 세 남자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런 건 처음 봤어.}
{그게 어떻게 되는 거지?}
{그만하세요!!}
결국 참지 못한 세연이 소리를 치고 난 뒤에야 상황은 진정되었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케빈이었다.
{쉽게 정해 봤어.}
케빈의 정보 세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벨기에에 와 본 것이 처음이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문제를 듣자마자 알레한드로는 하품을 했다.
{재미없네…….}
{……진지하게 들어, 알레한드로.}
{진심으로 재미없어.}
아무래도 세연이 가져온 충격이 너무 강렬했나 보다. 거기에 비해 케빈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밋밋한 건 사실이었다.
데이버의 반응도 시큰둥했고, 나와 세연만 케빈의 거짓말이 어떤 것일지 알아맞히기 위해 노력했다.
‘어쩐지 영화는 좋아할 것 같고…… 저번에 백화점에서 봤을 때를 생각해 보면 벨기에가 처음인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쉽지만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첫인상으로 추측해야 하는 것이니 꽤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그런데 각자 생각이 달랐는데도 우리들의 결정은 묘하게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난 3번.}
{저도요.}
데이버만 2번, 즉 케빈이 벨기에에 와 본 것이 처음이라는 데에 걸었고 나머지 셋은 모두 그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정보가 거짓이라는 데에 걸었다.
어쩐지 마지막 것만 다른 두 개와 느낌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거짓의 냄새가 났다.
케빈은 낭패를 겪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거짓은…… 맞아, 세 번째였어. 어떻게 안 거야?}
{재미없었으니까.}
{…….}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다가 세 명이나 답을 맞혔으니 쉽게 간파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우울해하는 케빈을 보며 혀를 차던 알레한드로는 잘 보라는 듯 나섰다.
{다음은 내가 하지. 특별히 수위엔 신경 썼다.}
{잠깐만,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불안해하는 케빈의 말을 무시하며 알레한드로가 손가락을 들었다.
{난 빚이 많다.}
난데없는 부채 고백에 모두가 멈칫했다. 즐거웠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는다.
알레한드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음악원에서 F학점을 받은 적이 있지.}
{네가?}
{마지막으로 난 직접 술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알레한드로의 세 가지 정보를 들은 우리는 약간 숙연해졌다. 하나가 거짓이라고 해도 다른 두 가지가 진실이라면…….
세연이 조심스레 다시 확인했다.
{거짓은 하나죠?}
{하나야.}
알레한드로가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자 세연은 목이 타는지 물을 마셨다.
뭔가 알레한드로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셋 중 가장 최악인 것이 거짓이길 바라고 싶은데…… 무엇이 가장 문제일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세연이 바짝 붙더니 속삭였다.
{그나마 빚이 많다는 게 거짓말 아닐까……? F학점이야 받을 수도 있는 거고…… 술 만드는 게 문제는 아니잖아?}
{그만큼 알코올 중독이라는 거잖아요…….}
{에, 에이…… 아니겠지. 술을 만든다고 해서 전부 그런 건…….}
세연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술에 관한 것도 다시 생각해 보니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알레한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란 듯이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 장난을 치고 있는 중이란 건 알겠지만 제발 그만 마셨으면 좋겠다.
{다 됐어?}
가장 심각한 토론이 이어지고, 이윽고 알레한드로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 물었다.
우린 각자 고른 답을 이야기했다.
{난 2번. 당신이 F를 받았을 것 같진 않아.}
{빚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만약 있더라도 그렇게 말할 것 같진 않고. 그러니까 난 빚이 많다는 게 거짓이라는 데에 걸게.}
{전 이야기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까 빚이나 술은 함정일 것 같아요.}
데이버와 세연은 알레한드로의 F학점 이야기가 거짓, 케빈은 빚이 없을 거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답했다.
{전 3번이요.}
{3번?}
왜 3번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레한드로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까의 논리랑 같은 건가? 일단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모든 선택지를 골라 놓으려고?}
{아뇨.}
{그럼 뭔데? 이거 안 보여?}
알레한드로는 지금 무시하냐는 듯 와인 잔을 흔들었다. 난 그걸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 이상은 아니길 바라서요.}
{…….}
내 말에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네 바람을 말하는 게임이 아니야. 거짓을 맞히는 게임이지.}
{알아요.}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전부 맞혀서 3점을 획득했다는 것도 계산하고 있다.
그러나 점수에 상관없이 그냥 지금은 알레한드로의 세 번째 이야기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낮게 웃었다.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묘한 구석이 있네, 베르체노바.}
난 대답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의 건강 같은 걸 걱정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오지랖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몸을 해치는 일은 적당히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알레한드로는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며 답을 발표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정답은 두 번째 이야기다. 난 음악원에서 모든 수업을 A로 졸업했지. 한 번도 F를 받아 본 적이 없어.}
그럼 남은 두 가지가 진실이다. 곧장 케빈이 물었다.
{빚이 많다고?}
{그래. 얼마 전에 집을 샀거든. 1년에 몇 번 들어가지도 않지만.}
{술 이야기는?}
{혹시 걸려들까 싶어 대놓고 진실을 섞은 건데, 베르체노바가 걸렸네.}
알레한드로는 킬킬거렸다. 날 놀리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와인 잔에 손대지 않았다.
난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가만 보면 약간 무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이 상황을 넘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난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시선을 돌리자 알레한드로가 말했다.
{자, 다음은 마지막으로 베르체노바의 차례야.}
{……그렇네요.}
벌써 한 바퀴 다 돌았다. 데이버는 15분쯤 걸릴 거라고 했었는데 그보다 덜 걸릴 것 같다.
어떤 문제를 내면 좋을까. 앞선 네 사람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난 내적으로 많이 고민했다. 이야기를 어디까지 꺼낼지 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고민 끝에 난 첫 번째로 공개할 정보를 결정했다.
고개를 드니 기대하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네 사람이 보였다. 난 흐릿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첫 번째예요. 전 가출을 해 본 적이 있어요.}
{뭐?}
내 말에 모두 경악했다.
검은 새가 지금 이 사람들을 보면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