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1화
정원에 시선이 팔려 돌아다니다가 붙잡혀 온 테이블에서 세연은 곤란함과 부담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살이나 많은 알레한드로가 계속 와인을 마시며 스페인어와 영어가 섞인 말로 떠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음악에 대해서 자꾸 의견을 묻는 것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웠던 자리는 타티아나가 찾아와 동석해 주면서 확 변했다.
‘확실히 이 애를 더 신경 쓰는 것 같긴 해.’
세 남자는 이름도 유명하지 않은 세연보다는 최근 급부상하는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날을 세우며 그러한 관심들을 쳐 내고 세연에게 집중했다. 세연은 그 사실이 무척 고마우면서도 조금 미안했다.
타티아나는 이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더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간에 러시아어도 하는 알레한드로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선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고, 파티 게임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부담스럽던 분위기가 이렇게 즐거워질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니 다들 재미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그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살짝 꺼림칙했던 데이버는 생각보다 빈틈 있는 사람이었고, 케빈은 모범적인 상식인이었다.
심지어 나이도 제일 많고 술만 마셔서 무서웠던 알레한드로는 3개 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데다가 음악원을 우수하게 졸업한 사람이었다.
세연은 몰랐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들과 조금 더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창피함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기묘한 재주를 선보인 덕분도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벨기에의 귀족 정원을 빌린 파티장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귀중한 기회였다.
헤어지기 전에 세연이라고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 정도는 해 볼까 생각하며 그녀는 즐거워했다.
그리고 진실과 거짓 게임의 마지막 순서인 타티아나의 차례가 왔다.
“…….”
조용히 테이블 한쪽 구석을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고개를 슬쩍 들더니 이야기했다.
{첫 번째예요. 전 가출을 해 본 적이 있어요.}
{뭐?}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세연도 기겁해선 입을 벌렸다.
타티아나의 가문인 베르체노프가 러시아에서 얼마나 유명한 가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모두들 너무나 쉽게 타티아나가 부족함 없이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리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상을 마치 완벽하게 현실에 구현해 낸 것처럼 타티아나는 말씨나 행동 모든 부분에서 품위가 넘쳤다.
그런 타티아나가 일탈과도 같은 가출을 했다는 것을 모두 믿기 어려운 듯했다.
‘말도 안 돼.’
다른 사람들보다 타티아나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는 세연은 더더욱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스토익한 피아노의 화신. 그것이 세연이 피아니스트로서 타티아나를 보는 관점이었다. 그녀의 엄격함과 규칙적인 태도는 감동적일 정도로 또렷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살짝 까칠한 면도 없잖아 있는 편이니 무언가에 반항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기본적으로 그녀는 착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오빠나 아버지에게 반항한다고 하더라도 가출을 택할 것 같진 않았다.
진실일까? 거짓일까?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세연은 이어지는 타티아나의 말에 집중했다.
{두 번째, 전 알렉산더 테크닉을 배운 적 있어요.}
세연은 약간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케빈이 타티아나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일단 그게 뭔지 알아야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질문엔 타티아나 대신 알레한드로가 답했다.
{소마틱스somatics의 일종이야.}
{소마틱스……?}
{……그냥 스트레칭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그제야 세연은 알렉산더 테크닉이란 낯선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다.
박 교수가 세연은 자세도 좋고 유연하니 안 가르쳐 줘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던 기술이었다.
알레한드로나 데이버가 알고 있었던 걸로 봐서 아마 요가나 필라테스처럼 유명한 운동인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인터넷을 찾아보는 케빈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세연에게 물었다.
{세연도 처음 듣나요?}
{응? 어…… 생소하긴 한데, 예전에 박 교수님에게 들었던 것 같아.}
그 말에 타티아나는 나지막이 웃었다. 그녀는 세연이 교수에게 무언가 듣거나 배웠다고 하면 재미있어하곤 했다.
아무래도 세연과 교수의 관계가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인데, 어떤 부분에서 그런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렇게 두 가지 정보가 나왔다. 하나는 일탈, 하나는 자기 관리에 대한 이야기라서 정말 헷갈렸다.
{세 번째는…….}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를 듣자마자 세연은 정답을 알 수 있었다.
{전 커피를 좋아해요.}
마치 선심 써서 진실 하나는 가볍게 말해 주겠다는 듯한 어조였지만, 타티아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세연은 그녀가 커피는커녕 홍차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콜라나 초콜릿도 안 먹는다.
카페인에 너무 약해서 그 정도만 먹어도 진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스토익한 성격 탓인지, 피아노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을 봐 오면서 그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지금 세연은 타티아나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타티아나가 카페인에 약하다는 사실은 그녀의 친구라면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남자들은 모르겠지.
세연은 지금 반칙을 권유당하고 있었다. 평소 타티아나의 성격을 아는 세연은 그녀가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던지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제야 세연은 타티아나가 사실 그렇게 공정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거의 모든 면에서 타티아나는 착실하고 반듯하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기준마저도 타협 없이 똑같이 하려고 한다.
이런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반칙 같은 것을 좋아할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세연도 그녀에게 이야기 안 했지만 언젠가 이야기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문제로 냈던 것이다.
하지만 가끔 타티아나가 대놓고 편의를 봐줄 때가 있었다.
바로 상대가 세연이었을 때였다.
‘예전부터 그랬었어…….’
친구 같은 건 될 생각 없다며 거리를 둘 때도 타티아나는 묘하게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세연을 봐주었다.
특히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 타티아나가 얼마나 자기 기준을 많이 깨뜨리고 자신을 위해 주었는지 세연은 모르지 않았다.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그냥 그러면 될 텐데, 타티아나는 절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하지 않으면서도 헌신적이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게임 점수는 타티아나가 3점 그리고 세연이 2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1점 이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이 게임은 타티아나와 세연의 승부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타티아나의 문제에서 세연이 그녀의 거짓을 맞히면 타티아나는 1점이 깎여 2점이 되고 세연은 3점으로 올라서서 역전이 되는 것이다.
‘나한테 상품을 양보하려는 거야…….’
지금 타티아나는 명백한 거짓을 드러내며 세연에게 맞히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역전승을 거두었다고 마냥 좋아할 정도로 세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의도로 이러는지 슬슬 알 것 같았다.
‘어쩌지.’
모른 척하자니 그럴 자신이 없었고, 덥석 받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머리가 복잡해진 세연은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모두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준 타티아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알레한드로를 지목하여 물었다.
{제 거짓말은 무엇이었을까요? 페테르손 씨.}
{글쎄…… 잘 모르겠으니 찍어야지.}
그러더니 알레한드로와 케빈은 2번을 선택했다. 어린 타티아나가 신체와 정신의 재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알렉산더 테크닉을 배우진 않았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연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1번이라고 말했다.
타티아나의 눈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녀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세연을 바라보았다. 세연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커피를 좋아한다는 말은 곧 마실 수 있느냐 없느냐랑은 관계없잖아? 그냥 향을 좋아해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거니까. 음, 그런데 가출은 안 해 봤을 것 같아서…….}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그냥 그런 기대라고 해야 할까…….}
일단 세연은 타티아나가 준 신호는 눈치챘지만 그것이 함정일지도 몰라서 피해 갔다는 논리를 펼치기로 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들리긴 했지만, 아까 타티아나도 알레한드로에게 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쉽게 무어라 말하진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데이버는 여유롭게 남은 선택지를 가져갔다. 그런데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저는 3번입니다. 커피를 못 마시죠? 베르체노바 양.}
{……세연이 힌트를 많이 줬네요.}
{아뇨. 사실 전 그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세연이 머뭇거리는 모습에서 답을 알아낸 것인가 했지만 데이버는 오해 같은 걸 사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베르체노바 양에 대해 들은 것이 많아서요.}
타티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클래식 세계에선 딱히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베르체노프라는 재벌 가문의 피아니스트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중엔 정말 말도 안 되는 루머도 많았지만 카페인에 약하다는 사소한 사실도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그건 분명히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이라서 세연은 약간 신경 쓰였다. 아까 타티아나가 경계하던 것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내 대범하게 웃었다.
{맞아요. 세 번째 이야기가 거짓이에요. 전 커피를 못 마셔요.}
{그럼 가출은 진짜입니까?}
{예.}
왜 가출했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는데, 알레한드로가 불쑥 끼어들더니 분위기를 깼다.
{뭐 가출했다고 하더라도 호텔 가서 호의호식했을 것 같으니…… 난 두 번째 이야기가 더 궁금한데. 알렉산더 테크닉 같은 걸 왜 배운 거야?}
타티아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비밀이에요. 하지만 제겐 큰 도움이 되었지요.}
{특이하네…….}
그렇게 다섯 명이 한 바퀴 돌았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고 그사이 오간 대화와 장난은 친밀감을 형성했다.
물론 무형의 자산만 남은 건 아니었다. 이 게임엔 상품이 걸려 있다.
데이버는 스마트폰을 들고는 집계가 끝난 화면을 보여 주었다.
타티아나가 마지막에 거짓이 탄로 나서 2점이 되었다. 세연은 그대로 2점이었으니 두 사람만 동점이었다.
{보통 이럴 땐 마지막 한 명을 가위바위보 같은 것으로 정하겠지만…….}
데이버는 기분 좋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공동 우승으로 치고 두 분 모두에게 상품을 드리도록 하죠.}
세연은 아까 타티아나와 데이버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타티아나는 너무 비싸다며 난색을 표했고 데이버는 비싸면 천 달러 정도라고 했었다.
천 달러면 백만 원도 넘는다. 그런 걸 두 장이나 나누어 주겠다고 하니 이 한 번의 게임에 데이버는 너무 큰 투자를 한 셈이다.
역시 부담감을 느꼈는지 타티아나가 다시 한번 말렸다.
{잠시만요, 바리시치 씨. 그건 너무 부담되지 않나요?}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치를 알고 계시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그래도…….}
{그냥 골라 보시죠. 자, 원하는 음악가 누구 없습니까?}
그러나 데이버가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투로 말하며 스마트폰을 다시 보여 주자 어쩔 수 없이 타티아나도 그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이 받지 않으면 세연도 받지 않을 생각이란 걸 눈치챘는지, 타티아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전 그럼 아까 말씀하셨던 라흐마니노프로 받을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임 양은?}
{전…….}
세연도 너무 고르는 건 민폐일 것 같아서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사인을 부탁했다.
{제 수집품은 크로아티아의 본가에 있으니 지금 드리긴 어렵고,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 드리죠.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이참에 SNS 주소라도 교환할까요, 우리?}
외국인과 쉽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역시 SNS만 한 것이 없었다.
세연은 이참에 데이버뿐만 아니라 케빈과 알레한드로의 SNS 주소도 받아 친구로 삼을 수 있었다.
문제는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아예 SNS 계정조차 없었다.
하지만 데이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리 당황하지도 않았다.
{베르체노바 양은 어떻게 보내 드릴까요? 베르체노프가로 보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마 타티아나의 저택은 세연의 아파트와 달리 그냥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일 터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가볍게 웃더니 쿨하게 말했다.
{그냥 전화로 하세요.}
그리고 타티아나는 자신의 개인 번호를 데이버에게 가르쳐 주었다. 세연은 그 번호를 아무에게나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