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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92화 (1,092/1,277)

##  1092화

세연은 안개처럼 뇌리에 남아 있던 무언가가 의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고 있는 것 아니야?’

타티아나가 쓰는 전화번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집으로 연결되는 공용 번호와 빅토르에게 연결되는 업무용 번호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직접 연결되는 개인 번호 등이다.

그중 기본적으로 타티아나가 사용하는 번호는 업무용 번호였다.

보안상의 이유라고 하는데, 사실 세연은 타티아나가 불필요하게 다수의 사람과 연결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 번호를 잘 알려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파티장에서 만난 피아노 연주자라면 그 기준이 살짝 모호해진다. 전적으로 타티아나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스마트폰을 줘 보시겠어요?}

타티아나는 데이버가 내민 폰을 받더니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아마 국제 전화로 해야 할 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느낌이 이상해.’

세연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데이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게임을 하고 놀 땐 그냥 재미있는 사람 같았고, 상품을 제시했을 땐 화통한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마치 기름을 친 것처럼 매끄러웠다.

데이버는 약간의 본심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하게 짚어 말할 순 없지만 타티아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 말했던 것도 그렇고…….’

데이버는 타티아나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어떤 방식을 통해 조사했는진 모르겠지만, 만약 그녀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개인 번호를 쉽게 찍어 주는 건 살짝 신중하지 못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불편함을 느낀 세연은 머뭇거리며 조금 더 타티아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타티아나는 머리도 좋고 단호하기도 하지만 약삭빠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알레한드로와 케빈은 타티아나에게 번호를 달라고까지 하진 않았다. 대신 알레한드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참에 사인도 해 달라고 하지? 데이버. 사인 모으는 것이 취미라며.}

술을 마시고 있던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세연은 알레한드로가 정말 밉상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자꾸 나서는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타티아나에게 관심이 많았고, 수집 취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타티아나의 사인이라면 탐낼 만했다.

심지어 두 사람은 데이버에게 고가의 상품도 받게 된 상황이라서 거기에 대한 답례 같은 것으로 데이버가 타티아나에게 사인을 요구한다면 착한 타티아나는 그것을 받아 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연은 살짝 답답한 기분을 느끼며 지켜보았다.

{사인이라.}

데이버의 눈빛이 번뜩였다. 세연은 그가 정말로 사인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이렇게 정보 조사를 하고 공들여서 타티아나와 가까워지려고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사인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 했던 것 전부가 거짓말일 수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큰 진실과 거짓 게임이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세연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데이버는 타티아나를 슬쩍 볼 뿐이었다.

{글쎄.}

세연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직감은 분명히 데이버가 타티아나의 사인을 원할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데이버는 손수 차 버렸다.

혹시 전부 혼자 오해 중이었던 걸까. 세연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타티아나의 눈치만 살폈다.

묘하게 순진한 구석이 있는 타티아나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게임이 마무리되고 약속했던 시간도 지났다. 타티아나가 일어나려 하자 알레한드로가 물었다.

{아무튼, 이제 갈 거야?}

{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럼 가 봐.}

알레한드로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서더니 테이블 너머로 악수를 청했다. 타티아나는 상냥하게 웃더니 그 손을 붙잡았다.

{다음에 봐. 두 사람 다.}

알레한드로는 짧게 이야기하며 세연과도 악수를 나누고는 도로 의자에 앉아선 다리를 꼬았다.

혹시 억지를 부리며 더 붙잡아 둘까 봐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알레한드로는 깔끔하게 이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이어 케빈 그리고 데이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세연의 신경은 데이버에게 향해 있었지만, 그 역시 알레한드로처럼 짧은 인사만 남기고는 두 사람을 보내 주었다.

‘나만 이상한 사람 같아.’

세연은 머리가 아팠다. 뒤늦게 이상한 생각들이 자꾸 들면서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큰 파티장에서 모르는 남자들과 게임까지 해 본 건 처음이라서 그런가? 괜히 드라마처럼 상황을 오해하고 있는 건가?

타티아나에게 지금 생각들을 전하고 싶은데, 붙잡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전혀 정리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세연이 끙끙거리는 사이, 타티아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음걸이로 살짝 앞서 나가고 있었다.

{재미있었죠?}

{응? 응! 즐거웠어.}

{다행이에요.}

그녀의 물음에 세연은 무조건 좋았다고 답했다. 괜한 사족을 붙여서 지금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파티장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추억이 하나쯤 생겼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세연의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이 멋대로 입을 움직였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저기…….}

일단 말은 걸었는데 그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세연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전 데이버에게 번호를 왜 주었냐고 묻는 건 정말 이상한 질문이었다.

재미있게 놀 땐 언제고 헤어지자마자 바로 뒷담화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도 하고, 세연이 참견할 일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더듬거리며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는 세연의 의중을 짚어 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번호를 왜 가르쳐 주었는지 궁금한가요?}

{어? 티 났어?}

{조금요.}

내심 알아봐 주길 바랐던 세연은 약간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타티아나는 괜찮다는 듯 걸음을 슬쩍 늦추더니 세연을 이끌고 정원 옆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봄기운이 만연한 정원은 정말로 예뻤다. 이름 모를 꽃들이 잔뜩 피어서 벤치 주변을 화려한 색과 향으로 뒤덮고 있었다.

거기에 잠시 앉아 타티아나와 세연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세연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타티아나가 곧장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저 테이블을 주도하고 있는 건 데이버예요.}

{어? 알레한드로가 아니라?}

타티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예리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세연은 알레한드로가 세 명의 남자 중 가장 나이도 많고 억세 보이니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알레한드로를 자극해서 파티장 밖에 테이블을 따로 이루고 케빈과 세연 그리고 타티아나를 끌어들인 건 바로 데이버였다.

{잠깐만, 생각해 보면…… 날 잡은 건 아마 널 끌어들이려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타티아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세연의 추리를 부정했다.

스스로를 미끼 같은 역할이었다고 생각하던 세연은 의아한 눈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으며 다리를 뻗었다.

{제가 낸 마지막 게임에서 정답을 말한 순서를 기억하시나요?}

{어…… 네가 먼저 알레한드로에게 물었고…… 케빈이 같이 답하고, 그다음 나였지?}

{맞아요. 데이버가 마지막으로 답했어요.}

음악에 있어선 엄격하면서도 평소엔 약간 순진한 구석이 있는 타티아나였지만, 그녀는 모든 상황을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알레한드로와 대화한 후에 경계를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데이버는 제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세연이 일부러 오답을 택하고 저와 이야기하는 걸 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어떻게든 정답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죠.}

데이버는 자신의 정답을 분명 확신하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타티아나에게 커피를 못 마시지 않느냐고 말하던 얼굴이 생생했다.

{그런데 그는 정답을 피하지 않고 맞혔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정답을 알아서 정답을 맞혔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세연은 타티아나가 어디에서 의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세연을 보며 타티아나는 웃었다.

{생각해 보세요, 세연. 그는 답을 맞혀야 할 상황이었나요?}

{어…… 응……?}

{그는 단순한 게임 참가자의 입장이 아니었어요. 만약 그가 일부러 오답을 골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차분하게 상황을 짚어 보았다.

마지막 게임까지 온 상황에서 타티아나가 3점, 세연이 2점이었다. 그리고 세연은 일부러 오답을 냈고, 타티아나는 거짓이 탄로 나서 1점을 감점당해 2점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데이버가 오답을 골랐다면? 타티아나는 그대로 3점으로 단독 우승자가 된다.

{어…… 어?}

{아시겠나요?}

{주최자였지!?}

{맞아요.}

세연은 이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데이버는 주최자로서 게임에 상품을 건 입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권을 쥐고 있었으니 그냥 타티아나를 우승자로 두고 상품을 주면 그만이다. 아마 그게 원래 목적이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데이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저와 세연을 동점으로 만들었죠. 그러고는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저희 둘 모두에게 상품을 주겠다고 했어요.}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전 그렇게 생각해요.}

타티아나의 결론에 세연은 경악했다.

데이버가 그냥 승부욕이 앞서서 일단 답을 맞힌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그 정도로 허술해 보이진 않았다.

그럼 의도적으로 세연과 타티아나를 우승자로 만들었다는 건데…… 방금 전까지 같이 놀던 사람에게 미안한 말이고, 상품까지 받은 입장에서 하면 안 될 말이지만…… 약간 소름 돋았다.

좋게 생각하자면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그냥 두 사람 모두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정황을 다시 떠올린 세연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기겁한 세연의 얼굴을 보며 타티아나는 웃었다.

{후후후, 겁먹진 마세요. 그가 이상한 사람이란 뜻은 아니니까요. 그냥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을 즐기는 것 같긴 했지만요.}

{그게 이상한 사람이잖아…….}

{세상엔 특이한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 그걸 그냥 이렇게 넘길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비릿한 미소를 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것도 벌써 콩쿠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 없이 놀고 있던 건 세연뿐이다.

{그, 그럼 그 특이한 사람에게 번호는 왜?}

{글쎄요…….}

기분을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타티아나는 중얼거리더니 이내 짧게 답했다.

{뭘 하고 싶은 건지 직접 듣고 싶어서요.}

만약 업무용 번호를 알려 주더라도 결국 데이버와 연락을 취해야 할 때가 오겠지. 때문에 타티아나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정면으로 맞받아친 것이다.

상황을 신중하게 본다면 해결도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긴 하다. 타티아나는 항상 차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기도 했고.

그러나 가끔, 타티아나는 생각 이상으로 기분파일 때가 있었다.

{난 이해가 안 가…….}

아무것도 몰랐던 세연과 달리 타티아나는 데이버가 주도하는 상황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야기도 해 주고 게임도 참가했다. 심지어 전화번호도 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타티아나를 완벽하게 유도하고도 데이버는 마지막에 그녀에게서 사인을 받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나마 흥미가 있다면 받으려고 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쉽지 않네 모두들.’

세연은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역시 넓은 세계로 나와 보니 별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교류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있고, 그렇게 경쟁자들은 서로를 가늠한다.

{슬슬 일어날까요? 모두들 기다리겠어요.}

{응, 그러자.}

따라 일어나며 세연은 타티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세연을 지켜 주고 있지만, 사실 타티아나는 정말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세연이 이곳에 온 목표이기도 했고.

그리고 방금 본 것처럼 타티아나 역시 특이한 사람 축에 속했다.

원래 그런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 타티아나가 보여 준 모습은 세연을 새삼 충격에 빠뜨렸다.

‘좀 더 알고 싶은 게 많아

하지만 세연은 기죽지 않고 다시금 마음을 강하게 세우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직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가출 이야기나,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 등.

세연은 언젠가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나면 타티아나와 길게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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