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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93화 (1,093/1,277)

##  1093화

세연을 데리고 파티장에 다시 들어섰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큰 변화 같은 것이 있진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돌아다니거나 각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뒤편의 카메라들이 찍고 있었다.

지금 찍는 영상들은 콩쿠르 시작 전 오프닝으로 편집되어 사용되겠지. 나도 모르게 조금 더 태도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리라.

‘그래서 밖에 자리를 잡았을지도…….’

난 데이버가 살짝 속이 검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내를 전부 알 순 없지만, 파티장 밖에 테이블을 잡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유죄다.

물론 그가 하고자 하는 건 결국 탐색과 흥미 해소 정도겠지.

그래서 나도 적당히 경계하며 그들을 탐색했고, 결국 데이버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정신력을 조금 쏟긴 했지만 그래도 케빈이나 알레한드로 같은 사람도 알게 되었으니 이득도 있었다. 선물로 라흐마니노프의 사인도 얻었고.

“…….”

세연은 내가 그를 경계하면서도 번호를 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사람을 가까이 끌어들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용 가치도 있었고.

업무용 번호를 알려 주고 거리를 더 두어도 상관없었겠지.

하지만 난 데이버가 날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한 루머 등을 이야기하면서 흥미를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제안한 게임이나 실제로 보여 준 취미 등을 전부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데이버는 수집욕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수집욕은 사인뿐만 아니라 정보 등에도 향하고 있었다.

단순한 호사가의 취미라기엔 조금 더 좁은 카테고리만을 겨냥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연락을 해 온다면 나 역시 반대로 그에게 어떤 정보들이 돌아다니는지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막상 하려고 하니 잘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나 오빠가 사업을 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나마 본 것이 약간의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이걸 세연에게 이야기할 순 없지…….’

세연은 아직 신경 쓸 필요 없는 이야기다. 때문에 난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마침 콩쿠르 참가자로 같은 선에 선 그녀에게 괜히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길 바랐다. 지금만큼은 난 피아노 연주자 타티아나로 있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조금도 잘난 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

데이버와의 탐색전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느라 그의 이용 가치를 따지기도 했는데, 반대로 데이버 역시 날 평가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평가 기준은 당연히 연주자로서의 가치에 달려 있겠지. 그건 무례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첫 무대에서 떨어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가 평가하는 내 가치 역시 수직 하락하게 된다.

나 스스로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데이버에겐 그렇지 않겠지.

심지어 그 역시 평범한 수집가가 아니라 참가자라는 걸 생각하면 실력만으로도 그에게 밀릴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알레한드로와 케빈 역시 무시무시한 연주자들이다. 어느 누구 하나 내가 쉽게 볼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네.’

난 살짝 반성하며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나이 많은 남자들과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온 것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연습이 되었다.

기세에서 지지 않으려고 애쓴 보람이 있다. 덕분에 내 집중력은 조금 더 예리해졌고 압박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세연도 조금 익숙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같이 어울려 게임을 하면서 편해진 모양이다.

지금은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긴 한데, 본래 영리한 아이니까 아마 무대에 섰을 땐 방금 겪었던 일들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

생각을 그렇게 갈무리하며 우리가 원래 있었던 테이블을 찾아냈다. 그런데 거기엔 모르는 사람들이 또 근처에 와 있었다.

그러나 나도 세연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또 인사하고 서로를 알아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왔니?}

{어디서 놀다 온 거야?}

테이블로 향하자 아나스타샤와 이연주가 물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양지은과 레티시아는 물론이고 주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그럼 이쪽이 베르체노바 양?}

『안녕하세요.』

『□□□ □□ □□□□.』

난 인사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프랑스어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인사 정도를 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 사람들은 이어 세연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그 연주자들은 다음에 만나길 기약하며 다른 테이블로 떠나갔다. 그제야 나와 세연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앉자마자 레티시아가 불안한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알레한드로의 테이블에 가 있었다며? 괜찮니? 불쾌한 일 없었어?}

{예, 괜찮았어요.}

내 대답에도 레티시아는 불신의 눈빛을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바로 너희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아나스타샤가 메시지를 받더니 일단은 기다려 보자고 하더라고. 여차하면 네 경호원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고…….}

{맞아요. 제 경호원이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어요.}

{그래, 바보같이 널 건드릴 사람이 있진 않겠지.}

한숨을 내쉬는 레티시아에게 웃어 주고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소리 내지 않고 작게 입을 움직였다. 그 입 모양은 내게 묻고 있었다. ‘이겼니?’라고.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나스타샤는 그럼 상관없다며 다시 느긋하게 잔을 들었다. 마치 축배를 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잠시 더 있다 가겠다는 내 메시지를 보자마자 내 깊은 의중까지 읽어 낸 것이다.

바로 도망가듯 자리를 뜨면 얕잡아 보일 수 있으니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나올 생각이었다는 것을.

내가 그렇게 마음먹고 상대하고 있는데, 만약 레티시아가 구하러 와선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알레한드로를 매몰차게 대하고 우릴 끌고 나와 버렸다면 상황이 묘해졌을 것이다.

물론 레티시아에겐 고맙지만, 나와 세연은 그냥 어린애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중에 무대에서 제대로 증명하면 될 일이긴 하지만 어린애 취급을 받은 것은 나중에 우리 음악에도 영향을 주게 될지도 몰랐기에 난 이번에 한 번쯤은 제대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고, 깔끔하게 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아나스타샤는 한 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녀가 날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레티시아의 얼굴엔 그다음 흥미가 떠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했니? 물어봐도 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면 너무 길어질 텐데.

살짝 고민하는 사이 세연이 대신 대답했다.

{언니들, 우리도 게임 하나 하지 않을래요? 재미있는 것 배워 왔는데.}

마침 잘되었다는 듯한 세연의 제안에 모두 흥미를 보였고, 이번엔 여섯 명이 참가한 진실과 거짓 게임이 시작되었다.

***

파티장에서 머문 건 6시간 정도였다.

오전에 열린 사교 파티치고는 정말 긴 시간이었다. 심지어 난 도중에 체력이 떨어져서 돌아온 것이었다.

해가 지고도 계속 높은 텐션을 유지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체 얼마나 체력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돌아올 땐 아나스타샤와 한 차로 돌아왔다.

“…….”

난 아나스타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간 몇 년이나 알고 지냈지만 난 그녀에게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몰랐던 것을 하나 더 알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대충 둘러대도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도 나도 피곤했다. 우린 멍하니 좌석에 기대어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슬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들이 많아 도로가 막혔지만, 난 그사이 아나스타샤와 더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도로를 빙글빙글 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윽고 우린 아나스타샤가 머무르는 샤르베가 앞에 도착했다.

“태워 줘서 고마워.”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고 내리면서 내게 인사하고 이어 빅토르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피곤해 보인다. 난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푹 쉬세요, 아나스타샤.”

“응, 너도.”

난 샤르베가로 들어서는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좌석에 몸을 뉘었다.

랑스가도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방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빅토르.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전혀. 걱정 마십쇼. 저야말로 아가씨 체력이 걱정인데요.”

“이 정도야 뭐……라고 할 정도는 아니네요. 졸려요.”

보란 듯이 하품을 하자 빅토르가 킥킥 웃었다. 그는 노는 것도 피곤해해서 어떻게 하냐는 농담을 던졌고, 난 사교도 일이라고 받아쳤다.

우린 이런 가벼운 농담에선 서로 잘 맞는 편이다.

빅토르를 보낸 뒤 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열쇠를 받았기에 문을 여는 데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데보라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보다가 환하게 웃으셨다.

“타티아나! 잘 다녀왔니?”

“예, 아주머니.”

약간 늦을 것 같다고 미리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다.

“저녁은?”

“파티장에서 먹은 것이 많아서…… 괜찮아요.”

“그럴 것 같긴 했어. 그럼 가볍게 따뜻한 수프 정도는 어때?”

일단 무조건 뭔가 먹이고 싶어 하는 건 전 세계 아주머니들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요리에 취미가 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파티장에서 약간 과식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아주머니가 해 주시는 수프는 꼭 먹고 싶었다.

“그럴까요?”

“일단 샤워하고 오렴.”

“예.”

따뜻한 물로 피로를 씻어 내리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오니 아주머니가 막 따뜻하게 끓인 수프를 한 접시 내어 주셨다.

난 감사를 표하며 식탁에 앉고, 접시가 하나뿐이란 것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파스칼 아저씨는요?”

“오늘 늦는다더구나. 그보다 파티 이야기나 해 줄래? 사진 찍은 것 있니?”

아주머니의 모든 관심은 내게 향해 있었다.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시는 모습을 보니 환영 파티에 정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다.

다행히 난 직접 찍은 사진도 있고, 공유받은 사진도 많았다.

“여기 아나스타샤는 아시죠?”

“응, 응.”

“그리고 이쪽이 레티시아 코스타. 오늘 친해진 분이에요.”

난 사진을 보여 주며 한 명씩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정말 즐거워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 주셨다.

수프를 한 접시 먹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주머니도 사진을 다 보고는 오늘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서 피곤했을 것 같다며 얼른 자리를 치워 주셨다.

“이만 쉬러 갈게요.”

“그러렴.”

아주머니 앞에선 흔들리지 않던 태도가 방으로 향할수록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난 침대 위로 거의 쓰러졌다.

오늘 주로 이야기한 것은 레티시아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세 사람이지만, 잠깐 인사하고 지나간 사람들은 족히 30명도 넘었다.

사교 파티에 참석한 보람이 있는 결과였다.

물론 그 반동으로 닥친 피로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까지 계속 참고 있었던 것이다.

“…….”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 멍한 피로감이 내 전신을 끌고 침대에 깊게 파묻으려 한다.

물론 쉬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오늘 만났던 연주자들을 보고 나니 반갑고 즐거웠던 만큼 긴장감 역시 되살아났다.

난 몸을 일으키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레퍼토리를 다시 연습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난 손을 뻗어 건반을 천천히 누르며 내 음색을 점검했다.

오늘 만났던 여러 연주자의 생생한 에너지를 전신으로 마주한 것을 그저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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