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94화 (1,094/1,277)

##  1094화

환영 파티에 다녀온 뒤 이틀 동안은 연습에만 몰두했다.

그동안 영상 등으로만 보던 다른 피아노 연주자들을 파티장에서 직접 보고 나니 의욕에 제대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이렇게 피아노 연습에 몰두한 건 아나스타샤나 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 메시지로 전해 듣기론 두 사람도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피아노 앞에만 앉아 있다고 한다.

‘강한 아이들이라 다행이야.’

기가 약하거나 스트레스에 내성이 없는 예민한 연주자들은 그런 파티장에서 겪은 일들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때문에 아예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연주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파티장에서 제대로 얼굴을 알리고 인사를 하고도 더더욱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인 또래 친구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외롭지 않다는 건 정말 큰 힘이 된다.

‘조금 의외인 사람도 있지만…….’

데이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나와의 접점을 원하는 것 같길래 개인 번호를 가르쳐 주고 어떻게 나오는지 잠시 지켜보았지만, 그는 조용했다.

콩쿠르 기간에 연락해 와서 귀찮게 군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데이버에게 길게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정말로 콩쿠르가 끝난 뒤에 연락해 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었다.

“…….”

브뤼셀 곳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난 다시 피아노 건반을 짚었다.

내 연습은 곡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연습이 아니다. 이미 곡을 암보하고 전체적인 구조를 쌓아 올리는 일은 마무리된 지 오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보다 세부적으로 곡을 다듬고 수정하는 일이다.

때문에 같은 구간을 계속해서 반복하거나, 한 손으로만 피아노를 치거나, 음색을 달리하며 같은 음을 계속해서 치는 등의 연습만이 되풀이되었다.

연습을 이어 나가면서 내 마음에 들도록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멈출 때가 있다.

“……음.”

이때가 딱 기점이다.

더 이상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완성도가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난 조용히 그 음악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가늠해 본다. 이것을 세상에 내놓아도 될지.

이 자기 평가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종종 음악가들은 스스로의 음악에 취해서 속기도 한다.

그렇게 취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음악을 구사할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감각적인 역량에 너무 큰 비중을 두면 손해를 보기 쉽다.

난 살짝 떨어져선 내 음악이 정갈하고 합리적인지 다시 잘 따져 보았다.

그때였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티아나, 잠시 괜찮니?”

“예.”

데보라 아주머니였다. 피아노 소리가 멎으니 내가 연습을 멈추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집중해야 할 때였지만 내 예민함을 굳이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가볍게 대답하자 아주머니가 컵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목마르지 않니? 물 한 잔 마시고 하렴.”

“감사해요.”

연습을 하면서 난 차나 주스도 잘 마시는 편이지만, 역시 그냥 물을 마시는 편이 입안이 개운해서 좋았다.

수분 보충을 하고 컵을 돌려드리니 아주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연습은 어때?”

“좋아요.”

“다행이네……. 난 피아니스트들이 연습하는 걸 많이 들어 보기도 했는데, 네가 하는 걸 듣고 있으면 잘되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가더라.”

무대를 앞두고 자신의 완성된 음악을 반복해 확인하는 연주자들도 많다.

그러나 내 연습은 얼핏 들으면 미완성인 음악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들리니 데보라 아주머니 입장에선 조금 걱정이 되실 만도 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란 걸 조금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

“아니, 아니야. 내가 어떻게 듣는지는 신경 쓰지 말고! 네게 필요한 방법으로 하렴. 그게 중요한 거니까. 그렇지?”

“음…… 알겠어요.”

아주머니는 내 연습 방법에 변화를 줄 필요는 절대 없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난 이제 하루에 한두 번 정도는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편하게 하자 데보라 아주머니는 약간 어색하게 옆에 다가오시더니 조심스레 물어보셨다.

“그보다, 연습에 방해될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들어왔는데. 들어 볼래?”

“뭔가요?”

은근히 제안하시는 것 같아서 흥미를 표하자 아주머니는 천천히 설명해 주셨다.

요컨대, 콩쿠르 다큐멘터리 촬영의 일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콩쿠르가 되면 여러 채널의 방송으로 송출이 되는 건 당연하고, 그런 방송에선 아무 가공 없이 무대의 모습만 툭 내놓을 수 없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을 콩쿠르 무대에 몰입시키기 위한 설명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러한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활용하는 콩쿠르였고, 매년마다 다큐멘터리를 함께 삽입하고 있었다.

난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뭔지 알겠어요.”

“어라? 그러니?”

“예전에 비슷한 걸 촬영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연습 장면도 찍었었죠.”

작년, 문화부에서 주최했던 가을 연주회는 준비 과정부터 촬영 팀을 불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었다.

큰 무대에 서야 할 연주자는 연주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어떻게 하는지도 봤었고요.”

“그렇구나.”

물론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파이널리스트가 아닌 오프닝 영상에도 모든 참가자가 의무적으로 촬영에 임해야 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전 건너뛰고 싶어요.”

데보라 아주머니는 왜 하기 싫은지 궁금하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난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단순히 말하자면 그럴 기분이 안 들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이 하겠지만…… 내 머릿속엔 데니스 프로듀서가 열심히 촬영했던 지난가을 연주회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촬영 자체는 정말 즐거웠다.

하지만 도중에 에르네스트가 함께하지 못하게 되고, 연주회 자체를 취소해야 할 상황까지 몰리면서 결국 그 영상들은 제대로 다 쓰이지 못했다.

전혀 상관없는 일이란 건 안다. 하지만 내 바보 같은 생각은 멋대로 기분을 휘둘렀다.

아주머니는 내 표정을 지켜보더니 꼭 해야 하냐는 내 질문에 대답해 주셨다.

“아마 요청은 모두에게 가겠지만 그중에서 하고자 하는 사람만 하게 될 거야.”

“그럼 안 해도 괜찮겠죠?”

떼를 쓰고 있는 기분이다. 아주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렇긴 한데……. 음, 감독은 네가 꼭 도와주었으면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직접 전화를 한번 해 보는 건 어떠니?”

데보라 아주머니는 못내 아쉬워하시는 모습이었다.

아마 내가 파티에도 갔다 왔으니 다큐멘터리에도 얼굴을 비춰서 조금 더 인지도를 얻길 바라시는 것 같았다.

맡고 있는 연주자가 주목받고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시는 마음이 전해져 와서 난 무턱대고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해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아주머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프랑스어로 대화하시고는 이윽고 내게 넘겨주셨다.

“자, 영어로 하면 될 거야.”

“감사합니다.”

감독이라는 사람인 걸까? 난 조심스레 영어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아, 베르체노바 씨! 맞습니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빠르고 활력이 넘쳤다.

사람 목소리 외에도 소음들이 섞여 있는 걸 보니 실외에서 바쁜 와중에 전화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예, 그런데…….}

{반갑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촬영 감독 기욤 메를랑입니다. 미안한데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오프닝 다큐멘터리 촬영이 있다는 건 들으셨죠!?}

기욤은 순식간에 말들을 쏟아 내며 자기소개와 화두를 던져 왔다.

난 약간 당황스러워하며 짧게 그렇다고 답했다. 다시 그가 빠르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건 파이널리스트들의 다큐멘터리입니다. 때문에 오프닝은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져서인지 하기 싫다는 분들이 많아서 분량 뽑기가 난감할 정도였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 참가자들은 준비한 음악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촬영도 결국은 대외 활동인데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오프닝을 멋지게 찍었다고 한들 평가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대로 첫 라운드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창피한 일이 되어 버린다.

기욤의 말은 여러 연주자를 상대해 보면서 알게 된 솔직하고 담백한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에 동의하자 그는 갑자기 말을 휙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오프닝에도 힘을 좀 줘 보라고 하시더군요.}

{누가요?}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우리 제일 큰 후원자께서 말씀하신 거죠.}

바네사 왕비님이 요청하신 건가……?

아마 콩쿠르의 규칙 등을 바꾸실 순 없겠지만, 오프닝 영상에 힘을 쏟으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지시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말인즉슨 이번 콩쿠르에 기존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어오겠다는 의미였고, 그만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 기대의 무게를 느끼는지 기욤은 절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진지하게 부탁드립니다, 베르체노바 씨. 촬영에 협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딱 1시간만 내어 주시면 충분합니다! 인터뷰도 없을 테니 연습하는 장면만 잠깐 보여 주시면 됩니다. 부담스러운 요구 같은 것도 전혀 없을 테니 걱정 마시고요.}

솔직히 나 말고도 72명이나 있으니까 거절하고 싶긴 한데, 1시간이면 된다는 말을 냉정하게 내치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참가자로서 파티에도 갔다 왔으니 콩쿠르 측에 조금 더 협조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내 개인적인 기분 문제만 조금 갈무리하면 되는 일이다.

{그럼……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럼 다시 호스트분께 전화를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예…….}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데보라 아주머니에게 스마트폰을 넘겨드리자 아주머니는 프랑스어로 기욤과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셨다.

역시 콩쿠르 참가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

기욤은 시간을 길게 끌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바로 오후에 촬영을 잡았다.

나 역시 속전속결로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고 다시 연습에 집중하고 싶었으므로 그의 시간에 맞추었다.

내가 머무는 랑스가에 찾아와서 촬영을 하나 했지만 그렇게 하진 않는다고 한다.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고 머무는 곳을 알리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일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 연주자들에겐 팬이 많고, 그중엔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위치를 알리지 않는 건 적절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곳을 빌릴 줄이야.”

브뤼셀의 중심가엔 왕궁과 왕립 음악원 그리고 박물관 등이 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왕궁 바로 앞의 악기 박물관이었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박물관치고는 굉장히 컸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건물에 철제 첨탑이 인상적이었는데, 저 첨탑만 봐도 멀리서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악기 박물관답게 입구부터 전통 악기나 민속 악기 등이 보였다. 갑자기 기욤의 요청에 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매표소에 내 이름을 대자 잠시 뒤 다른 몇 명의 사람들이 와서 날 안내했다.

이 박물관엔 전시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작은 홀까지 있었다. 기욤은 촬영을 위해 그 홀을 빌려 놓은 것이다.

이렇게 멋진 박물관의 홀은 얼마나 멋질까.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잔뜩 부푼 기대감을 안고 이후 기욤이 무슨 말을 하든 협조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직원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 다짐은 몇 분 가지 않아 삐걱거렸다.

{오, 베르체노바.}

며칠 전 파티장에서 만났던 알레한드로 페테르손이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기욤이 단독 촬영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귀띔 정도는 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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