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5화
아르헨티나 출신의 연주자,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난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나쁜 사람 같진 않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데이버와는 달리 그는 겉과 속이 비슷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 점은 날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레티시아는 그의 겉과 속을 전부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난 음악가로서 알레한드로가 상당히 순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 이야기가 하고 싶다던 그의 목소리와 눈동자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야.’
알레한드로는 무작정 고집만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음악 이야기보다는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이버의 제안에 일단 따라 주기도 했고, 무턱대고 와인을 마시다가도 내가 살짝 걱정을 얹어 한마디 하자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선 그만 마시기도 했다.
그 테이블에 있었던 것도 데이버의 꾐에 넘어갔던 것 같고…… 아무튼 알레한드로에게 악감정 같은 건 없었다.
“…….”
하지만 이렇게 만나서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전 세계에 방송될 영상을 촬영하고 싶은 사이는 아니었다.
난 그가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조차 거절했는데 영상이라니?
‘그건 싫은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불쑥 든다.
하지만 아직 촬영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 본 것도 아니고, 따로 촬영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싫은 티를 낼 일은 아니었다.
난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좋아 보이네.}
{페테르손 씨도요.}
알레한드로는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난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선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테이블 끄트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디렉터가 앉을 자린데.}
{지금은 상관없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디렉터님은요?}
{잠깐 뭐 좀 확인한다면서 나갔어.}
콘서트홀을 빌려 놓았으니까 아마 촬영 장비 등은 그곳에 있겠지. 아마 잠깐 기다리고 있으면 준비가 되리라.
그동안은 이 사람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
“…….”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건 알레한드로 쪽이었다.
{다음에 보자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렇네요.}
{네가 이런 촬영에 응할 줄은 몰랐어.}
{왜요?}
조용히 있는 것이 싫어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하나 싶었는데, 그의 말엔 상당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왜 멋대로 내 행동을 예측하는 거지? 심지어 그게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난 조금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레한드로는 똑바로 바라보는 내 시선을 마주하더니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가 작정하고 튀려고 마음먹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질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
{모른 척하지 마. 난 너를 꽤 오래 지켜봐 왔어, 베르체노바.}
난 나도 모르게 발끝으로 의자를 살짝 뒤로 밀었다. 허리도 더 뒤로 빼게 된다.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질색하는 것이 전해진 모양이다. 알레한드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소름 끼친다는 듯 보니까 조금 마음 상하네. 나 이상한 사람 아니다?}
{제가 정말로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려요?}
{아니, 그러진 말고…….}
내가 뭐라고 하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알레한드로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했다.
{저번에 내가 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해 줬었잖아. 피아니스트로서의 관심 같은 거니까 그냥 좋게 받아들여 줘.}
{그래도 무서워요.}
{하나도 안 무서워한다는 거 눈에 다 보여. 네가 날 무서워하면 그렇게 맞은편에 바로 앉았겠어?}
물론 난 그가 어떤 의미로 날 지켜봤다는 말을 한 건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냥 뉘앙스가 약간 이상하게 들리길래 농담을 해 봤을 뿐이다.
내가 바로 도망칠 것 같진 않아 보였는지 알레한드로는 한숨을 푹 쉬고는 이어 말했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넌 쓸 수 있는 방법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음악만으로 그 유명세를 얻으려고 애썼고, 해냈어. 그것만 보더라도 네가 정말 완고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건 어렵지 않아.}
내 배경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건 이미 세상에 꽤 많이 알려져 있다.
알레한드로는 그런 정보들에 더해 날 파티장에서 직접 본 걸로 어느 정도 내 성격을 읽어 낸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진 듯했다.
그는 옆으로 팔을 펼쳐 보였다.
{이렇게 멋들어진 촬영 같은 것을 즐길 타입은 아니지.}
{글쎄요,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는 건가요?}
괜히 이죽거려 봤지만 알레한드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니라면 한번 반박해 보라는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성격이 읽힌 것이 살짝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만큼 내가 단순한 사람이란 건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을 통해 검증된 터라 이제 와 억지를 쓰며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페테르손 씨가 계실 줄은 몰랐어요.}
{왜?}
{파티장 밖에 테이블을 차리셨던 분이잖아요?}
알레한드로야말로 이런 촬영 협조와 거리가 먼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그는 내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난 이런 걸 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 파이널리스트에 들었다면 모를까.}
진심이라는 듯 알레한드로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런 그가 결국 나오게 된 데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바네사 왕비가 날 콕 집어서 꼭 오프닝에 보였으면 한다고 했다더라고.}
{정말요?}
{그렇다니까?}
너무 믿기 어려운 말이라서 눈을 흘기며 바라보았다.
바네사 왕비님이 이 남자를? 왜?
알레한드로는 마치 자신이 어떠한 승기라도 잡은 것처럼 으스대며 낮게 웃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왕비님 눈엔 이번 참가자들 중에서도 내가 최전성기인 표준 피아니스트로 보였나 보지. 그러니까 그렇게 부탁까지 한 것 아니겠어?}
{그럴 리가요.}
그러나 난 그의 거들먹거림을 단칼에 잘랐다.
알레한드로가 날 읽은 것처럼 나 역시 바네사 왕비님이나 알레한드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치미를 떼려는 것 같다. 난 단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바네사 왕비님은 공정함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연주자들과 대화하는 시간마저도 평등하게 가져가려고 하신 분이세요. 그런데 참가자 한 명을 표준 같은 것으로 삼으실 리 없죠.}
짧고 간결한 내 말에 알레한드로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눈을 크게 떴다.
{너 정말 대단한데.}
갑자기 웬 칭찬?
이제 와 칭찬 같은 것으로 무마해 보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듯 더더욱 날카롭게 응시하자 알레한드로는 껄껄 웃었다.
{당장의 눈앞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잘 보고 있네.}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니까요.}
{……내가 저번에 너무 와인 마시는 모습만 보여 줬었나?}
내 안에서 알레한드로의 이미지 중 절반은 주정뱅이에 가깝긴 했다. 그는 그게 약간 후회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지 쇄신을 앞으로 할지 말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각이 있다면 슬슬 진실을 똑바로 이야기해 줄 때였다.
{왕비님께서 찾으신 건 맞겠죠? 설마 그런 것까지 거짓을 말씀하시진 않았을 테니까.}
{정확해. 내 이름을 콕 집어 불렀지. 파티장에 와 놓고선 인사도 없이 밖에서 술만 마시던 녀석을 오프닝에라도 얼굴 비추게 하라고.}
{…….}
그럼 부탁 같은 것이 아니라 괘씸죄로 끌려온 것 아닌가?
콩쿠르 오프닝 영상 촬영이라는 형태가 같더라도 의도가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알레한드로가 그걸 잘난 척하면서 포장하려 했던 것에 난 어이가 없어졌다.
가벼운 말장난 정도로 봐줄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그의 뻔뻔한 태도를 보니 황당할 뿐이다.
{그렇게 강제성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싫다고 해도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약간은 협조해 줘야겠다 싶더라고. 연주자가 오로지 음악만 준비할 순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진솔한 이야기엔 동의할 수 있었다.
여전히 경계 대상이긴 하지만 음악가로서 알레한드로와 내 견해는 꽤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든다.
심지어 지금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조차 성향이 비슷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레한드로와 음악 이야기를 깊게 해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그냥 불편하니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상충한다.
난 복잡한 심경으로 어중간하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오네.}
다행히 어색함이 이어지기 전에 기욤 감독이 돌아왔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처음 보지만 그가 책임자라는 사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굉장히 바쁜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베르체노바 씨!}
나도 일단은 감독과 협조해서 잘하기로 마음먹었던 만큼 그 손을 잡으며 밝게 웃어 보였다.
{반가워요, 메를랑 씨.}
{이렇게 바로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대 준비로 여념이 없을 텐데……. 혹여나 컨디션 망치시는 일 없도록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기욤 감독은 우리 옆자리에 앉더니 이번에도 이런저런 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복잡하진 않아요. 그럼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간단하게 설명드리죠.}
말이 굉장히 빠른 그의 설명은 다행히 알아듣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을 한 장소에서만 찍을 순 없으니 여러 장소를 빌렸는데, 일단 이 박물관 홀에서의 촬영은 나와 알레한드로만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니 홀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을 넉넉히 15분 정도 찍고, 다음은 혹시 모르니 피아노를 두고 사진 몇 컷.
그러고 나선 테이블을 두고 알레한드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필요했다.
감독이 어떤 구도를 그려 놓은지는 모르겠지만, 난 일단 의견을 냈다.
{저기…… 대화 장면까지 필요한가요?}
{왜 그러십니까? 어차피 모든 사운드는 제거됩니다. 그러니까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이야기하는 척만 해 주셔도 됩니다.}
{그게…….}
하지만 더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자니 앞에 있는 알레한드로에게 너무 실례였다.
그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싫다고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애매한 상황에 걸쳐져 있던 난 결국 어쩔 수 없이 감독의 구도대로 따르기로 했다. 세상엔 마음대로 되는 것이 별로 없다.
알레한드로는 아무 의견 없이 그냥 기욤 감독이 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고, 그렇게 설명은 몇 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대본도, 리허설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촬영이 있다는 것조차 겨우 몇 시간 전에 연락받은 것이다.
겉모습만 준비하는 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도 알레한드로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갑시다.}
브뤼셀에 첫발을 디뎠을 때부터 우리들은 이미 연주자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인사를 해야 하거나 사진을 찍히더라도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거기엔 이런 촬영 협조 역시 포함되었다.
승낙을 얻은 기욤은 경쾌하게 앞장섰고, 우린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8층에 도착한 우리는 이미 촬영 장비 등이 준비된 콘서트홀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장비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욤 감독이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나와 알레한드로는 동시에 눈을 마주했다. 기욤 감독이 이어 조언했다.
{일단은 페테르손 씨가 먼저…….}
{제가 할게요.}
감독이 나와 알레한드로 두 사람 중에 아무래도 경험도 많고 노련할 알레한드로를 앞세운 건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가 보란 듯이 피아노 앞에 앉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도전적인 내 말에 알레한드로는 깊게 잠긴 눈으로 내려다보았으나 곧 어디 먼저 해 보라는 듯 뒤로 슬쩍 물러섰다.
난 준비된 무대 중앙에 있는 피아노로 향했다.
‘역시 관리는 잘되어 있네.’
박물관의 홀이라고 해서 오래된 피아노가 있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적당한 연식을 지닌 스타인웨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피아노를 한 바퀴 도는 사이 주변이 조용해졌다.
카메라의 렌즈가 세 개나 이쪽을 향했다. 난 약간의 부담감을 느꼈으나 최대한 모든 집중력을 피아노에 쏟았다.
누가, 혹은 무엇이 날 보고 있든 상관없었다. 내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난 천천히 피아노 앞에 앉아 치맛자락을 정돈하고 의자 높이를 세팅했다.
“…….”
랑스가에선 특별한 선곡을 하긴 했지만 이곳에서도 선곡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참가자들의 연습 장면을 촬영하고자 하는 자리이니까. 사운드도 모두 지운다고 했고……
그러니 그냥 복잡하게 갈 것 없이 아침에 연습하던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 건반에 손가락을 얹으려던 찰나, 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설마 무대에 올릴 곡을 칠 건 아니지? 타티아나.}
{…….}
정확하게 그렇게 하려던 난 살짝 짜증스럽게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네 실력을 한번 제대로 보고 싶어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혹시 내가 알레한드로보다 앞서 연주하겠다고 나선 것 때문에 평가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건 정말 크나큰 착각이었다.
대화 속에서 오가던 신경전이 피아노를 앞에 두고도 이어지자 슬슬 기분이 언짢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