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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96화 (1,096/1,277)

##  1096화

어쩐지 자꾸 시험당하고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그게 단순히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고 있다는 내 의식이 빚어낸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로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날 알아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나 역시 다른 연주자들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서로 가까워지고 교류하는 건 기꺼운 일이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약간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제대로 할 테니까.}

난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쩌다 보니 알레한드로보다 앞서 피아노 앞에 앉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만약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만큼만 받을 생각이었다. 특별히 무언가 더 과시하고픈 생각도 없었고, 내가 본래 하려던 것을 보여 주려 했을 뿐이다.

물론 절대로 대충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피아노 연주자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도 예리하던 알레한드로의 눈빛은 지금 이 순간 보다 더 무섭게 빛났다.

{그야 제대로 하겠지. 여기까지 온 피아니스트들 중에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은 없어.}

당연하다는 듯 그리 말하는 알레한드로에게 난 다시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무슨 문제인가요?}

{네가 공들여 준비한 곡을 제대로 할 거란 건 너무 분명해서. 재미가 없단 거지.}

재미?

귀에 거슬리는 단어였다. 설마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그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건 없어?}

슬슬 참을성의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내가 당신의 재미나 돋우자고 이러고 있는 것 같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날 찍고 있는 카메라 렌즈가 세 개다.

만약 내가 막말을 내뱉는다고 하더라도 그걸 그대로 방송 등에 내보내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을 기록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진짜 기겁하게 해 줘?’

여러 고민이 들었다.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기술 중엔 연주자의 궤를 벗어난 것들도 있었다. 예컨대 피아노의 사운드를 왜곡시키거나 현을 끊어 고장 내는 것 등이다.

그런 걸 보여 주면 알레한드로가 조용해지리란 걸 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카메라에 잡히면 곤란하고, 무엇보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난 이제 그런 기술들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

조금 흥분했던 것 같다.

알레한드로가 대놓고 도발하는 중이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흥분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미숙하다는 방증이었다.

지금 그는 이미 날 콩쿠르 경쟁자로 보고선 끈질기게 신경전을 걸어 파악하고, 휘두르려 하고 있다.

거기에 넘어가선 안 된다. 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적어도 한마디는 해야겠다.

{무례하시네요, 페테르손 씨.}

{리퀘스트는 안 받는 타입인가?}

{아뇨? 누가 요청하더라도 잘 들어주는 편이에요.}

난 짜증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럴 땐 차라리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쪽이 조금 더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침착함을 잃지 않고 난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불쾌하네요.}

분명히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그가 내게 좋은 쪽으로 관심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슬슬 그만둬 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내가 정확하게 말했건만, 알레한드로는 침음을 삼키더니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음, 내가 수위 조절을 잘못했나…….}

꾹 눌러 두었던 화가 다시 끓는다.

내겐 그 말이 앞으로도 계속 수위 조절을 해 가면서 날 쿡쿡 찔러 보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하지?’

국제 콩쿠르에 마음 편하게 참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연주자 중엔 특이한 사람들도 많고, 무대 밖에서 신경전도 엄청나게 오가는 편이니까.

난 그런 것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말을 들어도 그냥 웃고 넘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지금 바보처럼 웃고 끝내면 정말 바보가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난 멈추지 않고 들이받아 버렸다.

{절 상대로 뭘 재 보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빙빙 돌려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원하신다면 더 확실한 방법으로 응해 드릴게요.}

{무슨 방법?}

{공식적인 경쟁의 장인 콩쿠르가 열리기 전에 사적으로 조건을 걸고 대결이라도 할까요?}

내 말에 모두들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나 싶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성인 연주자를 상대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나도 기준이 명확하게 있지 않았던 탓에 우왕좌왕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굳이 맞춰 주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한마디로 주도권을 가져온 나는 냉정하게 말을 맺었다.

{그런 리퀘스트라면 받겠어요. 최선을 다하여 상대해 드릴게요.}

{…….}

알레한드로는 말이 없었다.

열 살이나 어린 꼬맹이가 당돌하게 대결 운운한 것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나 싶었는데, 그의 눈빛을 보면 그보다 더 복잡한 여러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후회, 환희.

아무리 봐도 이상한 사람이다. 난 그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려 했다.

{여기 계신 청중들이 증인으로…….}

{잠깐, 잠깐만. 베르체노바 씨. 진정하세요.}

그런데 폭주하는 내 행동에 기욤 감독이 제동을 걸었다. 진정하라는 그 말에 긴장해 있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진다.

멍하니 돌아보자 기욤이 다가오면서 양손을 이리저리 저으며 거의 횡설수설 사과의 말을 건넸다.

{페테르손 씨가 실수를 크게 했네요. 기분이 상하신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말 화날 만하죠. 가뜩이나 바쁜 분을 모셔 놓고 이게 무슨 일인지……. 제 불찰이니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가 사과를 할 일은 아니었다.

알레한드로가 날 건드렸고, 내가 정도 이상으로 폭발했을 뿐이니까. 그래도 기욤 감독은 모두 자기 잘못이라는 듯 진심으로 날 달래려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감독은 목소리를 서서히 낮추었다.

{지금 연주할 마음이 들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페테르손 씨가 한 말은 무시하고 하시려던 대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최대한 빨리 촬영을 마치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건 촬영 일이니까. 내가 못 하겠다고 뛰쳐나가 버리면 기욤은 곤란해지겠지.

하지만 나와 알레한드로의 나이를 합친 만큼 세상을 오래 살아 본 기욤 감독은 그런 이유만으로 날 진정시키고 붙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주자들 사이에 이런 신경전이나 도발은 흔한 일이다.

그는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 버리면 결국 당한 쪽만 손해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기분대로 풀어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현명하게 굴지 않으면 이후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만다.

그런 깊은 의도까지 이해한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멋대로 굴어서.}

{아닙니다. 하하, 그럴 수도 있죠.}

기욤은 마지막까지 프로답게 수습하고는 내가 진정한 듯 보이자 다시 돌아서서 목소리를 키웠다.

{자, 그럼 촬영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페테르손 씨는 목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입 다물란 말을 기술적으로 전한 기욤은 주변 정리가 된 것을 확인하고는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꾸 알은체를 하며 선을 넘던 알레한드로는 결국 내 신경을 거슬렀다. 거기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적당히 기욤 감독이 내 실수를 수습해 주었으니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하면 될 일이지만…… 마지막에 본 알레한드로의 표정이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냥 무시해 버리고 싶다가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난 왜 냉정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걸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결국 피아노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난 방법을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

***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거의 무명인 시절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계기는 원래 눈여겨봤던 피아니스트인 에르네스트가 그녀를 높이 사는 말을 몇 번 했기 때문이었지만, 연주하는 영상을 보고 나서는 도저히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의 타티아나는 활동적이지도 않고 소극적인 성격에 가깝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 움직일 때의 그녀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카리스마와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그렇게 멀리서 타티아나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알레한드로는 언젠가 분명 그녀와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이 찾아오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꽃 같군.’

단 한 마디로 타티아나라는 사람을 평가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냉정하고 차갑게 보인다. 단정한 외모는 마치 얼음처럼 매끄러웠고, 그 언행에도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태도는 분명 바람직한 부분이겠지만,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필요 이상으로 선을 긋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면엔 절대로 그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타티아나 본인이 자각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만 꺼내면 그녀는 눈빛부터 달리한다.

그리고 선을 넘어 다가오려 하는 부분이 있었다.

직접 타티아나와 만나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들을 느낀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본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일부러 괴팍하게 굴기도 했다.

역시나 타티아나가 진심으로 분노를 드러낸 지점은 음악에 대해 참견했을 때였다.

‘무섭네…….’

귀기 서린 눈빛이 일렁이는 것을 마주한 알레한드로는 간담이 다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생각 이상으로 호전적인 면이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줄 알지만, 필요하다면 마다하지 않는 과감함도 지니고 있다.

에르네스트가 큰코다치고 잡혀 사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벗어나 보려고 뭔가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문제는 벗어나려 하는 에르네스트에게 타티아나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마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다는 느낌이 든다.

‘아.’

알레한드로는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레이저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다른 사람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타티아나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이렇게 될 것 같긴 했는데, 어떻게 달래지?’

이미 저번에 파티장에서 봤을 때부터 타티아나가 만만찮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화를 내면 정말 무서울 것이란 것도.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대결하자고 할 줄이야……. 만약 그랬다가 패배를 인정하게 될 상황에 몰리기라도 한다면 타티아나는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큰 창피를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위험은 당연히 감수한다는 듯 도전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런 타티아나의 모습은 세상에 흔치 않은 순수한 음악가로서의 정신을 형상화해 놓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놀랐지…….’

본래 과거 음악가들 사이에서 기악 대결이란 정말 경력과 명예를 건 진지한 결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당대 음악 애호가들은 귀족들이 많았고, 그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나면 결과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대결한 후 평생 그를 피해다녔던 다니엘 스타이벨트나 프란츠 리스트와 대결했던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져 올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은 콩쿠르 외의 대결 같은 건 장난처럼 여겨지는 시대이다. 공신력 없는 대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이 종종 놀이로 할 뿐, 진지하게 다른 연주자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러한 시대의 느슨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는 그야말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알레한드로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거의 둘 중 하나는 끝장을 보자는 광기 어린 눈빛이다. 그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일단 연주가 끝나고 나면 제대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를 너무 심하게 대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았다.

정말로 대결을 원한다면 받아 주고 싶었다.

물론 누군가가 창피당할 일 없도록 잘 수습하는 것도 알레한드로의 몫이겠지만, 그는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

지금은 화가 나 있을 타티아나의 연주를 그냥 듣는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알레한드로는 그녀가 준비한 독주곡 중 하나를 연주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행동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

타티아나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건반을 누르며 동시에 입을 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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