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0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원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숨기고 다가가기도 한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목적이 모두 다양했다.
사인이나 사진 등을 원하기도 하고, 베르체노프란 내 배경에 흥미를 보이기도 하며, 그냥 인간으로서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가들을 만나면 다른 모든 것들을 차치하고 내 음악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난 그런 사람들을 항상 신경 써서 대했다.
그 자리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노력해서 보여 주고, 혹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한다.
물론 그러면서도 난 항상 예의 바르게, 자제력을 잃지 않고 행동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치레도 다 필요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하고 있어.’
체면을 차리고 예의를 챙기다 보면 결국 할 수 있는 이야기에도 한계가 생긴다. 그건 당연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심화된 이야기를 해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발을 선에 걸치게 된다.
지금 그렇게 날 이끌어 낸 것이 바로 알레한드로였다.
그는 약간 경망스럽고 멋대로 구는 사람이라서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고픈 마음이 들진 않았지만, 적어도 음악에 대해서는 진심인 사람이었다.
물론 피아니스트 중 음악에 진심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의 진심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악에 미쳐서 약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눈이다.
그 눈빛에서 난 강력한 동질감을 느꼈다. 때문에 조금 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약간 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음악을 쥐고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건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피아노라도 있으면 여러 예시를 보여 주었을 텐데, 지금 다시 홀로 들어가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난 평소 생각하고 있던 음악 이론과 내 경험 등을 토대로 한 예시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내 표현이 조금 과격했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약간의 실험이자 도박에 가까웠던 내 이야기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깊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진동을 어디에서 가져왔나 했더니…… 그것도 다 연구의 결과였구만?}
{종종 그렇게 강제로 끄집어 낸 것들이 좋은 평가를 받더군요.}
{그건 그래. 사람들은 대체로 정제된 예술에 감동하지만, 날것에 열광하기도 하거든.}
알레한드로는 내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음악가가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나온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낮게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과 하긴 어렵지.}
{이해하시나요?}
{당연히 알지.}
알레한드로는 인상을 쓰더니 러시아에서 음악원에 다니던 시절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같은 수업을 듣던 친구와 음악관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가 결국 그 친구가 학을 떼고 도망가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난 그의 말을 알 것 같았다.
클래식 음악가들은 오래된 역사적 유산과 선배들의 레퍼런스, 선생님들의 가르침. 그 모든 것들 위에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대부분은 별문제 없이 견고한 자아를 지닌다.
그런데 가끔 나처럼 길을 헤맨다거나 너무 깊게 파고든 나머지 이상해진 사람들도 있다.
그런 자각이 있기 때문에 난 스스로를 내보일 때 정말 주의하는 편이다.
만약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공유한다면 모두를 걱정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난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
아이들과 음악적 교류도 많이 하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난 친구들 앞에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들을 많이 해 왔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하든 거리낄 것이 별로 없었다.
{이기적이어서 죄송해요.}
{뭘, 괜찮아.}
알레한드로는 내가 무슨 뜻으로 사과했는지 알면서도 깔끔하게 받아 주었다.
그 역시 내게 원하는 것이라곤 음악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우리 사이에서 대화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그는 나와 말이 통한다는 걸 확신했는지 테이블에 팔을 괴며 조금 더 시선을 가까이 했다.
{그런데 말이야, 껍데기에 갇혀서 죽는다는 건 무슨 뜻이야? 너 같은 사람도 벽에 막혔던 적이 있었어?}
다시 강한 흥미를 보이는 그에게 붙잡혀 난 다른 이야기도 해 주어야만 했다.
{혹시 바닷가재에 대해 아시나요?}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려야 정상이겠지만 그는 곧바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리액션을 보인다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난 늘 한계를 깨뜨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바닷가재의 생태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서 나 역시 여러 터닝 포인트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첫 음반을 녹음했을 때와 쇼팽 소나타를 연주했을 때, 난 확실하게 피아노 연주자로서 한계를 깨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었다.
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삶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일이다.
내가 약간 두서없이 이야기해도 알레한드로는 귀를 기울이며 들었고, 정확하게 당시 내 상황을 이해한 듯 공감해 주었다.
{그럴 땐 과감해질 필요가 있긴 하지. 그래,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리고 내면의 진정한 자신을 일깨우는 일 말이야.}
알레한드로는 음악가로서의 내실이 워낙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툭 내뱉는 짧은 말에도 상당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같은 길을 밟아 보지 않고선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음악가로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욤 감독이 이끄는 촬영 팀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들은 소리 없이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감독은 촬영에 대한 설명을 하지도 않았고, 마치 미리 기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아무 말 없이 카메라와 장비들을 세팅하기만 했다.
난 그것이 그냥 이 장면을 자연스레 찍기 위함이란 것을 이해하고는 카메라 쪽을 보지 않고 알레한드로와 대화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몇 분쯤 지났을까. 대화 주제가 살짝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우리에게 준 것들을 봐. 전부 진짜들이라고. 진짜 악기와 진짜 음악. 그런데 요즘 음악가들은 대체 뭘 하고 있지?}
{어…… 어?}
“그저 그럴싸한 것들을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냔 말이야.”
갑자기 흥분한 그는 영어와 러시아어를 마구 섞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요지는 단순했다. 작금의 전자 음악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시장도 크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현대의 팝을 그렇게 깎아내리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알레한드로의 말은 50년 전에도 하기 어려운 주장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불평에 가까운 주장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난 이미 멋대로 한 전적이 있기에 그의 말을 적당히 받아 주어야만 했다.
{예술은 항상 형태가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지금 그래서 이게 정상적이란 거야!?}
그런데 내 말이 알레한드로를 더 자극한 모양이다. 그는 더더욱 열변을 토했다.
{가짜를 합성하고, 그저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들을 대체 어떻게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어.}
{아, 예…….}
{음악가라면 이런 부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해. 참고로 요즘 상황이 얼마나 웃기게 돌아가냐면…….}
{그렇겠네요…….}
영혼 없이 어정쩡하게 대답해도 알레한드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확실히 알레한드로는 음악에 미쳐 있었고, 고전 음악을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비슷한 부류였지만, 예술은 변화하며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알레한드로는 많이 극단적이었다.
나도 나름 극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심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수십 년 전에 있었을 법한 괴팍한 고전주의자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음악가로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좋지만 이건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서로 말이 통한다고 생각해서 멋대로 군 죗값을 이렇게 치르는구나 싶다.
기욤 감독은 이 격렬한 분위기를 촬영하기 딱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난 제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빌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한드로가 흥분을 가라앉힌 건 다시 르네상스가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을 한 직후였다.
{크흠, 흠.}
혼자 말을 너무 많이 했는지 알레한드로는 기침을 했고, 촬영 팀의 스태프 한 분이 물병을 가져다줬다.
알레한드로는 그 물병을 한 번에 거의 절반 가까이 마셔 버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광기에 차 있던 눈빛이 조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이제야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을 눈치챈 듯했다.
{내가 말이 많았나?}
{조금요.}
{미안. 너무 꼰대같이 쓸데없는 소릴 많이 했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뭔데?}
계속 참고 있던 난 결국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어요.}
{어, 충격적이네. 혹시 그럼 몇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음…… 일흔일곱 살요?}
{푸하하하하.}
나이에 반세기를 얹어서 부르자 알레한드로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마치 스스로도 인정한다는 것 같았다.
인정하지 말고 고쳐 주었으면 한다. 세상에 화가 나 있는 괴팍한 할아버지 같았으니까.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 내가 힘없이 바라보자 그는 다시 껄껄 웃더니 휙 하고 카메라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독님,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기욤 감독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실 아까 마무리지어도 되는 것이었는데, 두 분이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조금 재미있더군요.}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네.}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난 진심으로 감독이 미웠다.
알레한드로는 정말 만족했는지 기지개를 쭉 켜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쯤 하고 그럼 놓아줘야겠네. 놀아 줘서 고마웠어.}
{저도……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난 알레한드로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레티시아가 왜 그를 질색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