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01화 (1,101/1,277)

##  1101화

우리 둘에게 맡겨진 씬의 촬영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기욤 감독은 촬영 팀을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갔고, 나와 알레한드로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사이 메시지 등이 온 건 없는지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있자 알레한드로가 슬쩍 이야기했다.

{나중에 그 녀석과 연락이 되면 내가 안부를 묻더라고 좀 전해 줘.}

{……에르네스트 말씀이신가요?}

{그래.}

너무 캐물어 보다가 절교당한 상태라고 했었지. 하지만 그래도 알레한드로는 에르네스트의 부상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으로 보였다. 그래서 난 조금 희망적인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전화도 안 되지만…… 나중에 전화하면 받아 주지 않을까요?}

{그냥 안 받는 게 아니라 아예 차단을 했더라니까?}

{아.}

{너무하지 않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알레한드로는 억울하다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난 솔직히 에르네스트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알레한드로가 정확히 뭘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간 시달려 보니 정말 만만찮았다.

에르네스트는 나보다 인내심이 강하지 못했다. 아마 가차 없이 차단했을 것 같다.

난 이곳에 없는 에르네스트의 편을 들며 이죽거렸다.

{말이 안 될 건 없지요.}

{와! 진짜 요즘 애들 무섭네, 무서워.}

야단스럽게 반응하던 알레한드로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고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예전엔 에르네스트 녀석도 내가 한마디 하면 집중해서 경청하곤 했었는데……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어.}

{…….}

또다시 불만 많은 할아버지처럼 혀를 차는 알레한드로를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내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귓등으로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벌컥 성을 냈다.

{뭘 그렇게 봐? 진짜로 그 녀석이 어릴 땐 내 말을 잘 들었었다니까?}

{…….}

{증거라도 보여 줘?}

통화 차단까지 당했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증거를 보여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난 아무 기대 없이 마음대로 하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알레한드로는 스마트폰을 켜곤 화면을 마구 터치하기 시작했다.

대체 뭘 찾는 건지 그는 한참 동안이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윽고 내게 화면에 띄운 것을 보여 주었다.

{이건…….}

그것은 한 사진이었다.

상당히 오래전에 찍은 것인지 화질이 별로 좋지 않다. 아마 예전 핸드폰으로 찍은 데이터를 옮겨 온 것 같았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갤러리를 뒤로 돌려 찾느라 오래 걸린 것이다.

그 사진엔 세 사람이 찍혀 있었는데, 가장 왼쪽의 남자는 알레한드로였다.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되 보이지만 얼굴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오른쪽의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고, 중요한 건 가운데에 있는 작은 남자아이였다.

{잠시만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알레한드로는 가져가서 보라는 듯 내게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난 화면 위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아이였지만 눈에 굉장히 익었다. 고집스럽게 치뜬 눈빛만 제외하면 또렷한 이목구비가 사샤와 정말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확신을 가진 채 고개를 들자 알레한드로가 미소를 지었다.

{이게 한 7년쯤 전인가? 내가 러시아에 있었을 때니까.}

{정말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군요.}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듣기야 저번에 파티장에서 들었지만, 말로만 듣는 것과 이렇게 사진으로 보는 건 완전히 다르다.

7년 전이라면 알레한드로가 스무 살이었을 때였다.

에르네스트는 열 살이었을 테고. 아마 그럼 음악원의 학생으로서 에르네스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뭔가 신기한 기분이 들어서 어린 에르네스트의 사진을 보다가 난 그 표정에서 묘하게 지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나 싶지만…… 이 어린애를 붙잡고 또 이상한 소리를 했던 걸까?

{이때도 억지로 사진 찍자고 하신 것 아닌가요?}

{그랬던가……? 몰라. 아무튼 녀석이 유명해질 거란 걸 직감했었거든. 무조건 사진을 찍어 놔야겠다 생각했지.}

알레한드로는 감식안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음악가라면 누구든 검증해 보려고 하는 기질이 있었다.

아마 에르네스트도 어릴 때 그에게 검증당했겠지.

그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켰기 때문에 알레한드로는 이렇게 사진을 찍고 가까워지고 난 다음에도 계속 에르네스트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파티장에서 나와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도 아마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내 실력은 음반을 통해 미리 알아봤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사진 오른쪽에 있는 분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옆의 여성분은 누구신가요?}

{내 와이프.}

{……예?}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얼떨떨하게 되묻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결혼했다니까 이상해?}

{깜짝 놀랐어요…….}

{베르체노바. 너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 가장 놀라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알레한드로는 아르헨티나에서 명성 있는 연주자고 겉모습에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아무래도 성격이…….

엄청나게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문득 저번에 파티장에서 게임할 때 집을 사느라 빚쟁이가 되었다고 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가정이 있기 때문에 집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진짜 선배이긴 하네.’

피아노 연주자이자 음악가 그리고 사람으로서 여러 의미에서 알레한드로는 선배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 이상한 선배이긴 했지만.

{혹시 아이도 있는 건가요?}

{응. 이제 8개월.}

{역시…… 그래서 집을 사신 거군요.}

{어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번에 직접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랬었나.}

이 사람…… 대체 그때 와인을 얼마나 마셨던 거지?

힐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알레한드로는 멋쩍은 듯 눈을 돌리더니 급히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애 사진 보여 줄까? 진짜 귀여운데.}

난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돌려주었고, 알레한드로는 다시 사진들이 있는 갤러리 앱을 열어서 보여 주었다. 거기엔 정말 가족들과 찍은 사진들이 가득이었다.

신이 난 그의 얼굴에서 음악에 미친 사람의 광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따뜻한 미소만이 만면에 맺혀 있었다.

{이번에 입상해서 상금 타 가야지. 애 분윳값 대려면.}

{분유를 얼마나 사시려는 건가요…….}

{최고급으로 최대한.}

콩쿠르를 놓고 농담을 해도 경계심을 세우고 날 선 목소리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에겐 당연히 입상해야 할 이유가 있고, 나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새삼 어느 한 면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알레한드로 페테르손은 무례하고 대담하며 음악에 미쳐 있다.

스물일곱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꽉 막힌 고전주의자로서 이 세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주장을 할 정도로 황당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겐 서슴없이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이 통한다는 확신이 들면 모든 것을 오픈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음악조차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도구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난 알레한드로와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도 그런 단호한 마음을 공고히 하기는 어려웠다.

{알레한드로. 저도 당신이 꼭 이번 콩쿠르에서 입상하길 바랄게요.}

{이봐, 경쟁자가 그런 말을 하면 부정 타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받아치려던 알레한드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의아해하더니 내게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입상하길 바란다고요.}

{그 전에.}

{이름을 부르는 게 그렇게 해선 안 될 일인가요?}

{아니…… 상관은 없는데. 갑자기?}

그는 어안이 벙벙한 듯 물었다. 정말로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 이제 페테르손 씨를 세 명이나 알잖아요. 그러니 구분하려면 어쩔 수 없죠.}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어쨌든 내 의도를 전하는 데엔 별문제 없었다. 알레한드로는 여전히 얼떨떨해했지만 그래도 곧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난 그에게 요청했다.

{저 역시 타티아나라고 불러 주세요.}

알레한드로는 러시아어도 잘 하니까 호칭 문화도 잘 알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지금 영어로 대화한다고 하더라도 날 성으로만 부르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타티아나. 사실 성으로 부르는 게 되게 어색했었거든.}

{후후.}

난 밝은 미소와 함께 이번엔 내 쪽에서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을 콩쿠르에서 적어도 세 번 보실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각자 최선을 다해 보죠.}

알레한드로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악수를 받아 주었다. 이번엔 친애나 경의의 뜻이 아닌 정당한 경쟁자로서 투기를 주고받는 악수였다.

***

랑스가로 돌아온 나는 거의 기진맥진해졌다.

이동 시간과 촬영 시간 모두를 합치면 2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그사이에 겪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던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도발에 넘어가선 거의 싸움을 걸기까지…….

“약간 피곤하긴 한데…….”

처음에 신경을 너무 곤두세우고 있었던 데다가 나중엔 극단적인 음악관 이야기에 시달린 나머지 기를 다 빨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난 알레한드로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공유하고 화해할 수 있었고, 그가 여러 부분에서 선배라는 것을 인정했다.

덕분에 마지막엔 정말 분위기 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촬영에 협조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콩쿠르 무대에선 어떨지…… 기대되네.’

알레한드로는 당당하게 입상을 노린다고 할 실력을 충분히 갖춘 연주자였다.

거기에 노련함과 목적의식도 확실하니 분명 좋은 연주를 보여 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그 역시 내게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첫 무대가 열리기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

외출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난 스마트폰으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6일 동안 진행되는 1라운드 무대는 73명의 연주자가 한 번씩 올라 그중 3분의 2가 떨어지는 무대다.

결국 누군가는 떨어지겠지만, 그게 내가 되지 않으려면 정말 정신 차리고 첫 무대를 잘 치러야 했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피아노 연습을 시작할 생각으로 멍하니 누워 있는데, 갑자기 세연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너 저번에 그 사람이랑 오프닝 촬영했어!?]

난데없는 메시지였지만 뭘 묻는 건진 바로 알 수 있었다.

세연은 여전히 알레한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내가 중간에서 중재할 생각은 없지만 괜히 겁먹거나 하진 않도록 적당히 이야기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어떻게 들려줘야 할지 고민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눌러 문장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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