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2화
콩쿠르 시작 전 일주일은 할 일이 많은 시기이다.
세계 각지에서 브뤼셀에 모이는 것부터 시작해 호스트 패밀리를 만나고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환영 파티에 참석하거나 실제 대회가 열릴 홀에 직접 가서 살핀 뒤 자신이 연주할 순번을 추첨하는 일 또한 콩쿠르 전에 해야 할 일정이었다.
{세연?}
{그냥 전화해 봤어. 오늘은 컨디션 어때?}
오전부터 세연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왔다.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전화를 하는 건 드문 일이기도 하고, 늘 밝은 그녀의 목소리가 축 처져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응? 아니! 전혀!}
내가 곧바로 묻자 세연은 당황했다. 그 목소리에서 난 더더욱 확신했다.
정말 안부가 궁금했거나 같이 차나 한잔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라면 어제 언질이라도 줬을 것이다.
지금 정말 급하게 내게 전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게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해결해 줄 의지와 여력이 있었다.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난 분명히 말했다.
{문제가 생겼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네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세연.}
난 삐뚜름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그 순간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던 그녀의 숨소리가 멎었다.
{전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응?}
{아마 세연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요. 그러니 일단 말씀해 주세요.}
약간 강압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정말 진심이었다.
혹시라도 세연이 음악적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무대에 오르는 데 차질이 생긴다면……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내 진득한 의지를 읽었는지 세연이 고민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난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고마워, 타티아나.}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니야. 이미 넌 완벽하게 내 문제를 해결해 줬어.}
{……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의아해하자 세연이 더더욱 맑게 웃었다.
{뭐냐면, 나 방금 홀에 갔다 왔거든? 오늘 내 순번 뽑고 등록하는 날이라고 해서.}
{순번이요? 아. 그래야 했었죠.}
{응. 그래서 추첨했는데 첫날 저녁 세션이 걸려서, 조금 긴장돼서 전화해 본 거야.}
73명이 6일 동안 진행하는 첫 라운드의 순서는 추첨으로 정하게 된다. 세연은 후순번을 원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말을 맺고도 무언가 더 이어지는 말이 없는가 싶어서 기다리던 난 뒤늦게 멍하니 말했다.
{어…… 그게 다인가요?}
{응.}
그녀는 해맑게 대답하더니 조금 더 목소리를 깔며 은근한 농담조로 물었다.
{혹시 네가 내 순번도 바꿔 줄 수 있어?}
그제야 난 상황을 잘못 짚었다는 걸 깨닫고는 의자에 거의 쓰러지듯 앉았다. 나야말로 나도 모르는 사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별일 아니니 다행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만약 세연이 마피아에게 쫓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와줄 수 있겠지만, 순번 문제라면 전혀 손쓸 길이 없다. 만에 하나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할 생각도 없고.
물론 세연도 그걸 안다. 그냥 푸념이나 하려고 전화한 것이겠지.
난 힘이 쭉 빠진 채로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건 직접 이겨 내셔야겠는걸요.}
{아! 진짜 어떡해! 제발 첫날만 아니길 빌었는데……. 신은 없는 게 분명해…….}
세연은 본격적으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전화 너머인데도 내게 달라붙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날 놀라게 한 책임을 어떻게 지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신이 없어도 내가 있어서 다행이란 말은 상당히 부담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세연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그녀는 웃으며 이어 감사를 표했다.
{내가 무슨 일인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도와주겠다고 해 줘서…… 고마워. 뭔가 마음이 편해졌어.}
{말뿐인데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디 쉽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감사 인사를 듣자니 조금 부끄럽다. 내가 아까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너무 다짜고짜 행동한 것 같기도 하고.
비슷하게 세연 역시 살짝 부끄러운지 얼른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래서 넌 언제 뽑으러 가? 이야기 없었어?}
{글쎄요……. 조만간 부르지 않을까 싶어요.}
{순서 뽑고 나면 꼭 전화해 줘.}
{후후, 그럴게요.}
전화를 끊고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연은 첫날 무대에 서는 건 싫다며 칭얼거렸지만, 괴물 같은 연주자들이 즐비한 이런 국제 콩쿠르에선 기다리면서 다른 참가자의 무대를 보지 않고 차라리 먼저 연주를 끝내 버리는 것이 유리할 때가 많다.
그러니 이겨 내야 할 건 결국 스스로 짊어진 긴장감뿐이다.
세연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난 그녀가 잘 해내리라 믿었다.
“……연습이나 하자.”
아나스타샤나 레티시아의 상황도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녀들 또한 어떤 순번에 걸리더라도 잘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템포로 연습을 하고 있는 내게 사무국의 루트거 칼스도르프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은 오후 3시 즈음이었다.
***
외출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이미 데보라 아주머니가 날 기다리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날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금방 준비했네?”
“예. 오늘은…… 행정 업무만 처리하고 잠깐만 있다 올 거니까요.”
“그럼 슬슬 가 볼까?”
루트거는 내가 오기만 하면 직접 안내와 통역을 맡아 줄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이동은 경호원들이 도와 줄 테고, 그러니 난 혼자 가도 전혀 상관없었다.
“사실 저만 가도 되는 건데…….”
내 중얼거림을 들은 데보라 아주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 집에 있는 연주자들을 그렇게 대우한 적이 없어. 같이 가서 도와주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란다.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렴.”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그러실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그렇게 난 데보라 아주머니와 함께 차량에 올라 목적지로 향했다.
“여기…….”
“거의 다 왔어.”
브뤼셀 중심부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 익셀ixelles은 거의 8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수도원과 교회, 학교, 박물관 등이 유명하며 지금은 많은 나라의 외교관들이 주로 머무는 장소였다.
“저기 보이니?”
“아, 보여요.”
플라지flagey 빌딩.
익셀 연못과 외젠 플라지eugene flagey 광장이 있는 익셀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곡선미가 살아 있는 외형과 길게 배치된 유리창들이 건물을 한층 더 옆으로 길게 보이게 하고, 탑처럼 크게 서 있는 구조물은 마치 배의 선교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건물 자체가 약간 유람선같이 생긴 것 같았다.
언뜻 봐선 도저히 콘서트홀로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바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준결승까지 치러지는 곳이었다.
“저기가 원래는 라디오 방송사 건물이었거든.”
아주머니는 플라지 빌딩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플라지 빌딩은 1900년대 초에 익셀의 시장이었던 외젠 플라지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빌딩이었다.
쭉 라디오 방송사의 건물로 쓰이다가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방송사가 나가고 다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건물 설계가 일반적인 오피스보다는 문화 산업에 적절하게 되어 있어서 관련 기업이나 문화 단체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플라지 빌딩은 조금씩 브뤼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라디오 방송국 건물이 아닌 곳으로 바뀌어 가다가 2002년이 되어선 제대로 된 문화 커뮤니티 센터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옛날의 모습이 남아 있단다. 대표적인 부분이 콘서트홀이지.”
플라지 빌딩이 본래 방송국 건물로 쓰였을 땐 총 다섯 개의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두 개의 스튜디오가 클래식 연주에 적합하게 설계된 스튜디오였고, 때문에 지금 문화 센터로 바뀐 다음에도 그 스튜디오가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전용 콘서트를 위한 홀들이 그랜드 홀 같은 적당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플라지 빌딩의 콘서트홀은 아직도 스튜디오1, 스튜디오4로 특이하게 불렸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첫 라운드와 준결승이 열리는 곳은 스튜디오4. 732석 규모의 중규모 홀이었다.
“다른 큰 홀에서 하면 좀 좋아? 그럼 티켓도 더 팔 수 있을 텐데.”
“아하하……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데보라 아주머니는 티켓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며 살짝 불만을 표하셨다.
하지만 홀의 가치는 좌석 수로 결정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향적인 요건이었다.
가장 멀리 있는 좌석까지 꼼꼼하게 음이 전달되는지, 벽이 음을 방해하진 않는지, 공기를 흔드는 진동이 적당한 길이로 유지되는지. 그 모든 것이 홀의 가치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지 빌딩의 스튜디오4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음향 시설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여전히 활발하게 사용 중이며 브뤼셀 필하모닉의 본거지이기도 하니까. 전 세계에서 올 연주자들을 위한 콩쿠르 측의 깐깐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녀올게요, 소로킨.”
가볍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건물로 들어가기도 전에 난 루트거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안녕하세요, 칼스도르프 씨.”
시간에 맞춰 기다리기까지 한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척 고마웠다.
루트거는 데보라 아주머니와 프랑스어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내 관리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는데, 무슨 뜻인지는 당연히 모르니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데보라 아주머니가 말해 주었다.
“같이 안내해 주겠다고 하시네. 그럼 들어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두 사람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겉에서 보기에도 유람선처럼 깔끔한 건물이었는데, 내부도 굉장히 산뜻했다. 2000년에 다다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고 하던데 그 덕분인 것 같았다.
루트거는 우리를 2층의 콩쿠르 사무국으로 안내했다. 아마 콩쿠르가 열리는 동안 빌린 임시 사무실인 것 같다. 몇몇 직원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 그럼 일단 이쪽에서 서류 작업을 몇 가지 하시죠.”
처음 오는 곳이라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난 루트거를 따라갔다.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그가 서류철을 가지고 와선 내 앞에 펼쳐 놓았다. 그런데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모든 참가국의 언어로 서류를 만들어 놓을 순 없으니 프랑스어를 기본으로 한 모양이다.
과거 19세기 즈음 유럽에서 쓰인 국제 계약서 양식이 거의 프랑스어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서류들을 보고 옆에서 데보라 아주머니가 번역을 해 주셨다.
“보자…… 이건 첫 라운드 등록과 홀 사용에 관련한 서류네. 연주 촬영에 대한 동의 같은 것도…….”
전부 무대에 서기 위한 서류들이었다.
혼자 왔다고 하더라도 루트거에게 설명을 듣고 사인했겠지만, 데보라 아주머니가 다시 확인해 주시니 조금 더 안심되는 부분이 있었다.
모든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나자 그다음으로 직원 두 분이 상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상자 위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난 보자마자 이 상자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뽑으면 되나요?”
“예.”
무대에 설 순서를 뽑을 차례다.
연주자에 따라 콩쿠르에서 선호하는 순번이 있기 마련이지만, 난 사실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상자 안에 손을 넣으니 작은 공들이 느껴졌다. 난 가장 처음 잡힌 것을 그냥 잡아 꺼냈다.
“15-E-7?”
“마지막 날인 15일의 마지막 순서군요. 하하하.”
『□ □□□□!』
{이런 행운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도 깜짝 놀라며 박수를 쳤다.
딱히 행운 같진 않았지만, 73명 중 마지막 순서라는 건 굉장히 신기하긴 했다. 루트거는 정말이냐며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는 서류에 내 순서를 기입했다.
난 그의 모습을 보다가 무의식중에 물었다.
“저기, 칼스도르프 씨.”
“예?”
“혹시 다른 참가자와 순서를 바꿔 줄 수도 있나요?”
그는 정말 희한한 요구를 다 듣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안 됩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전 잘만 하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가장 주목받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난 너무나 사적인 이유를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루트거는 그 이상 묻지 않고 피식 웃더니 서류철을 다시 정리해 들고 일어섰다.
“자, 그러면…… 홀을 확인하러 갈까요? 어떻습니까?”
그의 제안은 내가 제일 기대하고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