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3화
루트거가 날 스튜디오4로 안내했다. 그 뒤를 직원 두 명과 데보라 아주머니가 따랐다.
난 조용히 걸으면서 손가락을 까딱여 확인해 보았다.
‘컨디션은 좋아.’
무대에 서기 전에 제대로 무대의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다. 굉장히 중요한 기회이므로 집중해야 했다.
몸만 무대에 올라야 하는 피아노 연주자들이 다뤄야 할 악기는 피아노와 홀 두 가지였다.
피아노를 잘 다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홀 역시 잘 파악해야만 한다.
경험이 적은 연주자들은 홀의 울림을 간과하고 무대에 올랐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많다. 연습실에서 듣는 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연주자들은 홀의 울림이 어떤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터치와 페달링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했다.
평소 혼자서 연습했던 음악을 그대로 연주하면서도 정밀하게 몸을 컨트롤하여 조금씩 보정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 아프게 홀의 모든 것을 분석하려 들 필요는 없었다.
그저 앉아서 연주를 하다 보면 몸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숙달된 내 귀와 머리는 그런 것들을 거의 자동적으로 잡아낸다.
내 실력을 믿고 피아노 소리를 내 본 다음 무엇이 달라졌는지 판단하고, 처음 그렸던 청사진대로 다시 엇갈린 음들을 밀어 넣으면 된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어떤 곡으로 연습을 해 보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앉아 보면 알겠죠.”
“……생각하신 것이 없으십니까? 그럼 가기 전에 생각하실 시간을 조금 더 드릴까요?”
때문에 난 앉아서 무슨 소리를 낼지도 정해 놓지 않았다.
날 맞이할 홀과 피아노가 내게 적당한 곡을 요청하면 거기에 자연스럽게 응할 생각이었다.
완전하게 된 준비는 되레 불완전하게 보인다. 하지만 난 자신 있었다.
난 걱정스럽다는 듯 보는 루트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빨리 가고 싶네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런 불안은 내 말이 아니라 피아노로 증명할 일이었다.
스튜디오4에 다다르자 그 앞에 있던 직원 한 명이 우릴 보더니 말했다.
『□□□ □□□□□?』
『예. □□□□□.』
직원은 루트거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더니 시계를 확인하고 수첩에 무언가 적었다.
문을 열어 주는 사이 루트거가 말했다.
“주어진 시간은 5분입니다.”
“저기 계신 직원분이 시간을 재시는 건가요?”
“예. 아마 피아노 소리가 들린 지 5분이 넘으면 바로 중단시킬 겁니다.”
엄격한 규칙을 지닌 국제 콩쿠르들은 무대를 확인하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키도록 하고 있었다.
난 무언가 규칙이 가해진다는 것에 답답함보다는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규격화된 규칙 안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는 일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직원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섰고, 난 그 뒤를 따랐다.
‘화려하네.’
스튜디오4를 보고 처음 든 감상은 조형미에 대한 감탄이었다.
계단식 무대와 그 뒤를 장식하는 거대한 오르간이 마치 신전 같다. 그 위쪽으론 격벽이 설치되어 있는 천장과 음향 반사판들이 보였다.
천장 쪽에 굉장히 많이 달린 조명들과 카메라를 보면 이곳이 본래 방송국에서 쓰이던 스튜디오였다는 느낌이 들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좋은 홀이라는 게 벌써 체감되는데…….’
아직 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지금 홀 안을 가득 채운 공기의 무게와 냄새만 느껴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홀은 클래식 음악 연주에 굉장히 적합한 홀이다.
문을 여는 소리나 발자국 소리가 어떻게 튕겨 올라가 공기를 울리고 있는지,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피아노 소리를 뿌린다면 어떨지 흥분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무대 위 피아노가 보인다.
“여기가 바로…… 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바로 시작할게요.”
루트거가 무언가 이야기하려 했지만 난 지금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 홀이 내게 음악을 요구하고 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내 몸을 타고 오르는 소리는 홀의 목소리와 같다.
그 목소리에서 난 적합한 곡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가지의 곡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이 공간의 음향을 다양하게 확인해 볼 수 있는 피아노 독주곡.
그런 조건들을 두고 생각을 간추리자 곧 몇 가지 후보만 뇌리에 남았다.
“…….”
그 후보곡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나무로 된 무대를 밟는 내 발소리가 조금 바뀌었다. 조금 더 선명해진 그 소리는 무대 위에 놓여 있는 피아노의 존재감을 그리고 있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피아노를 보니 마음이 들뜬다. 그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과 카메라 렌즈들이 마치 눈동자처럼 이쪽을 향해 광채를 번뜩이고 있었다.
난 지금 서 있는 장소를 다시금 자각하고 보다 차분하게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익숙한 냄새가 점점 가까워진다.
피아노 옆에 선 나는 손을 뻗어 프레임을 만져 보았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 촉각까지 자극되어 날 연주자로서 일깨운다.
처음 보는 피아노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난 머릿속에 있는 후보곡들과 함께 피아노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이 아이와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일단 목소리를 들어 볼까?’
피아노 역시 내가 어떤 연주자인지 궁금하겠지.
5분이면 충분했다.
***
루트거 칼스도르프는 중간쯤에 있는 가장 좋은 좌석을 찾아가 앉았다.
곧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5분 리허설을 할 것이다. 사실 크게 기대할 건 없다.
앞서 왔던 다른 연주자들도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냥 피아노와 홀을 점검하는 것에 그쳤으니까.
그러나 루트거는 묘한 기대감을 느꼈다. 거침없이 무대로 향한 타티아나가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여 줄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 뒤쪽에 있을게요.』
타티아나의 보호자로 따라온 데보라 랑스가 말했다. 루트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인데요?』
『알아요. 저도 여기 몇 번이나 와 봤어요.』
데보라는 이미 몇 번이나 연주자들을 케어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호스트 패밀리에도 등급이 있다면 그녀는 프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일 좋은 자리에선 당연히 잘 들리겠죠. 그러니까 뒤쪽에선 타티아나의 연주가 어떻게 들리는지도 확인하고 말해 줄 생각이에요.』
그 믿음은 기이할 정도로 강했다. 루트거로선 그녀를 막을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보라는 가볍게 웃더니 가장 뒷자리로 향했다.
타티아나가 정확하게 5분을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함께 들어온 직원들도 각각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타티아나는 무대를 확인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들을 보기도 하고, 사뿐한 발걸음으로 피아노를 한 바퀴 돌며 꼼꼼하게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가 무대 바닥을 딛는 또각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오다가 사라졌다.
루트거는 그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타티아나가 피아노와 동화된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정말 이렇게 바로?’
의자 높이를 맞추고 치맛자락을 정돈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긴장 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목적에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 오면서 어떤 곡을 연주할 거냐고 슬쩍 물어보았을 때 타티아나는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루트거는 그녀가 긴장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그냥 이 자리에서 요구되는 모든 곡을 연주할 자신이 있었을 뿐이다.
새하얀 손이 허공에 떴다. 조명이 닿아 밝게 빛나는 그 손은 검은 광택이 흐르는 피아노와 대비되었다.
곧 타티아나가 손을 내려 피아노에 붙였다. 피아노가 진동하며 소리를 뿜어내고 홀이 공명하며 그 소리를 증폭시켰다.
‘뭘 하는 거지?’
피아니스트들이 무대 상태를 확인하는 방식은 각각 다르지만 대부분이 가볍게 손을 푼다든지, 아니면 적당한 곡을 연주하곤 했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방식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천천히 건반을 하나 눌렀다. 그건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당장 루트거가 무대에 오르더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건반을 다섯 개쯤 눌렀을 때, 루트거는 무언가 서서히 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깐…….’
루트거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이 홀을 다녀간 수많은 피아니스트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와 홀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와선 어떻게든 이 공간에 끼워 맞춰 보려고 애를 쓴다.
홀이 미덥잖은 반응을 보이면 조금 당황하기도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달랐다.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을 거쳐 온 자존심 강한 피아노는 타티아나의 터치 몇 번에 얌전해졌다.
그리고 이 공간을 감싸고 오만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던 홀은 그녀를 시험하고 쩔쩔매게 하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금방 협조적으로 따라 주었다.
타티아나는 손가락 하나로 피아노를 지배하고, 홀을 굴복시키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공기가 그녀를 따른다.
당연히 사람 역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런 사운드를…….’
이게 열일곱 살짜리 소녀 피아니스트의 사운드라는 것을 루트거는 직접 느끼고도 믿을 수 없었다.
거의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 지경이라서 그는 옆을 돌아보았고,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직원을 보고는 웃기게도 안도할 수 있었다.
루트거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상하리만치 강한 건 바로 타티아나였다.
단지 건반을 몇 번 치는 것만으로 이곳의 주인이 된 타티아나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무자비한 폭군이 아니었다.
피아노와 홀의 소리를 경청하고 타당한 제안이 있다면 들어줄 줄 아는 유연함을 지닌 유능한 지배자였다.
흩어지는 잔향의 끝이 사라질 즈음, 확실하게 모든 것을 파악한 타티아나는 양손을 피아노에 얹었다.
‘지금 몇 초 지났지? 무슨 곡?’
어떻게든 타티아나가 할 행동을 유추하기 위해 루트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듯 타티아나는 바로 음을 쏟아 냈다.
무언가 데굴데굴 구르는 듯한 소리. 규칙적인 소리가 파형을 이룬다.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실험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구분하기 어렵다.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사이, 솟아오르던 소리가 팡 하고 터졌다. 그와 동시에 루트거의 머릿속에서도 한 음악의 제목이 불꽃처럼 터졌다.
‘드뷔시잖아?’
드뷔시의 프렐류드 북2. 12번째 곡인 불꽃놀이feux d'artifice.
정말 많이 들어 본 곡이지만 이 정도로 선명하게 불꽃이 터지는 이미지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불꽃을 담은 소리는 계속해서 위로 향하고 여기저기에서 팡팡 터지며 작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귀가 울리고 눈앞이 번쩍인다. 감각을 이상하게 만들 정도로 또렷한 불꽃에 넋을 놓은 사이, 음악이 조금 더 크고 가깝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큰 불꽃이 코앞에 있었다. 루트거는 저것이 터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큰 불꽃은 가장 높은 곳에서 터졌다. 이전처럼 한 번만 터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터지며 하늘을 수놓는다.
그 화려함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번쩍이며 하늘을 장식했던 불꽃이 다시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잠시 불꽃놀이가 멈췄다.
물론 본격적인 불꽃놀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