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04화 (1,104/1,277)

##  1104화

밤하늘로 쏘아 올린 화약이 화려하게 터지고 난 뒤 수천 개의 불꽃으로 쏟아져 내렸다.

타티아나는 곡의 도입부를 연주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아노 위로 흩뿌려지는 소리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듯하다.

지금 루트거가 느끼는 소리의 불꽃을 그녀 역시 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이미 이곳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했다.

피아노가 내는 소리를 홀이 어떻게 받아 주는지 모두 파악하는 데엔 한 곡을 끝까지 칠 필요도 없었다. 30초 정도의 도입부면 충분했다.

‘마음에 든 것 같군…….’

타티아나의 옆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루트거는 그 모습을 보며 숨죽였다. 단정한 옆선은 마치 피아노의 유려한 곡선과도 닮아 있었다.

그다음 그녀가 보인 감정은 욕심이었다. 과연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듯 그녀는 피아노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춤추듯 다시 내려온 손이 건반에 닿더니 빠르게 타건하기 시작했다.

피아노의 한계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듯 양손으로 번갈아 그려 내는 음형은 무척이나 빨라서 마치 피아노가 아닌 벌의 날갯짓 소리처럼 들린다.

귓가를 간질이는 벌은 곧 비둘기가 되고 매가 되었다가 전부 불꽃으로 변화했다.

“하.”

자기도 모르게 깊은 숨을 토해 내며 루트거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불꽃놀이는 그 종류에 따라 형태도 다양하다.

물론 기술적인 한계가 있겠지만, 만약 음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 한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꽃으로 그린 벌과 비둘기 그리고 매가 밤하늘을 날았다.

그 이미지들은 소리가 잦아듬에 따라 서서히 어두워지나 싶더니 마지막으로 화려한 모습을 허공에 수놓고는 사라졌다.

환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기분이 드는 음향이었다.

타티아나는 이어 계속해서 피아노로 불꽃을 쏘아 올렸다.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려면 연습을 얼마나 해야 하지?’

루트거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어 오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이 정도로 깔끔하게 들리는 음악은 절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드뷔시의 프렐류드는 폭발과 흐드러지는 불꽃의 이미지를 그리는 표현력은 물론이고, 기술적으로도 정말 어려운 곡이었다.

두 개의 선율로 구성되는 음악들은 일반적으로 왼손과 오른손이 나누어 각각의 선율을 담당한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들은 양손을 독립적으로 쓸 수만 있다면 혼자서 여러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이 곡은 각 선율을 담당하는 손이 없었다.

넓게 퍼지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선율은 양손을 번갈아 이용해서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서 퍼뜨려야 하고, 그와 동시에 왼손이 주된 폭발을 맡았다가 어떨 땐 오른손이 맡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각 선율은 단 한 번도 이상하게 튀거나 위화감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각각의 손으로 편하게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건반을 타건할 때의 제어력이 얼마나 정교한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이다.

모든 손가락을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운용하며 머릿속 음악을 명확하게 옮길 수 있을 때 나타나는 음악이었다.

프로 피아니스트들도 약간만 컨디션이 안 좋으면 조금씩 뭉개지는 것이 들릴 때가 있는데, 갑자기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데도 타티아나에겐 전혀 그런 부분이 없었다.

‘직접 보니 정말 대단한데.’

타티아나가 드뷔시의 프렐류드를 택한 이유는 명백했다. 무대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아주 훌륭했다. 이 곡이 필요로 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은 곧 그녀가 피아노에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건반의 무게를 달리하며 정확하게 두 선율을 구분해 연주했고 트릴, 아르페지오, 글리산도, 옥타브 도약 등의 스킬 등도 빠르게 쏟아부으며 피아노의 한계점을 파악해 나갔다.

동시에 청중들에게 환상적인 음악을 선사한 것은 보너스였다.

이렇게 노련하고 대담하게 5분의 시간을 활용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타티아나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눈앞에 번쩍이던 불꽃놀이는 어느새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다음으로 그려지는 것은 호수에 비치는 불꽃의 모습이었다.

‘드뷔시의 곡들엔 이런 곡들이 많지…….’

한 테마를 클라이막스로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고 살짝 필터를 씌워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상파 작곡가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드뷔시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다.

호수 표면에 비치는 불꽃놀이는 흐릿하게 일렁거린다.

직접 닿으면 반드시 사라져 버릴 물과 불의 조화는 굉장히 불안정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쉼 없이 움직이는 손이 천천히 살랑거리며 물결을 만들었다.

마치 이곳 좀 보라는 듯 움직이던 손길은 서서히 다가오더니 이내 뒷머리를 지그시 누르기까지 했다.

지금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를 직접 보지 않고 수면을 내려다보는 건 또 색다른 묘미가 있었다.

격렬하고 폭발적이진 않지만 멍하니 빠져들 것만 같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큰 불꽃이 연달아 터졌다.

“……!”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무대를 통째로 폭발시킬 것처럼 터져 나오는 소리는 홀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리고 이어 모든 세상을 뒤덮는 듯한 양손 글리산도의 폭음.

이 엄청난 클라이막스에 루트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곳에서 피아노 한 대로 낼 수 있는 사운드의 한계를 안다. 거구의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격렬한 곡들을 치는 것을 몇 번 들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트거는 지금 그 한계를 다시 기억해 둬야만 했다.

타티아나가 폭발시킨 다섯 번의 소리는 어깨를 거의 강제로 경련하게 만들 정도로 크고 강렬했다.

지금껏 이 정도의 무게와 부피감은 전혀 느껴 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직접 보고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저 작은 체구로 가능한 사운드가 아니다. 세상엔 물리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물리학이 이런 현실을 허락할 리 없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지배하고 있는 이 공간에선 그 물리학조차 통하지 않는 듯했다.

상식이 모조리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루트거는 넋을 잃었다.

‘피아노 부서진 거 아니야?’

그런 염려가 들 정도로 타티아나의 음량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달래듯 어루만지면서 다친 곳이 없음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축제가 끝났음을 알리는 안내와 함께 타티아나는 연주를 마쳤다.

“브라바, 브라바!”

약속이라도 한 듯 좌석에 앉아 있던 모두가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타티아나는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가볍게 일어나더니 청중석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완벽해.’

타티아나가 사용한 시간은 정말 딱 5분 안쪽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 홀의 규모와 상태를 보고, 여러 가지 테크닉으로 피아노를 시험해 보고는 아주 작은 음부터 매우 큰 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낼 수 있는 모든 사운드를 확인했다.

드뷔시의 프렐류드라는 상상도 못 한 선곡으로 이렇게 완벽하게 해낼 줄은 몰랐다. 루트거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이 굉장한 순간을 공유한 청중들은 서로를 돌아보기도 하며 만족스러운 시선을 나누었다.

그렇게 타티아나가 돌아오면 어떻게 찬사를 퍼부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잠깐만, 베르체노바 양이 어디 가는 거지?』

『왜 저쪽으로?』

직원들이 의아한 듯 웅성거렸다.

타티아나가 무대에서 내려와 이쪽으로 오지 않고 휙 돌아서선 그대로 뒤쪽의 연주자 대기실 방향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너무 몰입한 나머지 리허설이 아니라 실제 무대라고 생각하고는 버릇대로 뒤편으로 퇴장하려는 건가?

하지만 직접 청중석을 보고 겨우 다섯 명밖에 없는 사람들을 확인한 그녀가 그렇게 착각할 것 같진 않았다.

『어…….』

하지만 단 한 사람도 무대 위의 타티아나에게 소리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리지 못했다.

모두가 엉거주춤 서서 머뭇거리는 사이, 타티아나는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기곤 연주자 대기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허…… 허허…….』

연주자가 사라지고 홀 안엔 넋을 잃고 선 다섯 명의 청중만 남았다.

무슨 마법에라도 당한 기분을 느끼며 루트거는 헛웃음을 흘렸다.

***

염두에 두고 있던 것들은 모두 확인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명성이 자자한 홀이니만큼 이 스튜디오4는 정말 훌륭한 홀이었다.

피아노는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무거웠지만 첫 음을 짚자마자 내가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

감을 잡자마자 난 피아노의 고삐를 낚아채며 뇌리에 있던 곡을 연주로 옮겼다.

선곡을 잘했다는 느낌이 든다.

드뷔시의 프렐류드 불꽃놀이는 빨랐다가 느렸다가, 작았다가 커졌다가 하는 다이나믹한 요소가 많은 곡이라서 이것저것 잘 알아볼 수 있었다.

흡족한 기분으로 연주를 마치자 박수가 쏟아졌다. 난 일어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

그런데 숙였던 고개를 들기 전, 난 박수 소리가 청중석에서만 들려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미하지만 무대 뒤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무대 뒤쪽엔 연주자 대기실이 있다. 아마 이곳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되어 있을 테고, 그렇다면 청중이 더 있다는 의미였다.

단순히 무대 세팅을 확인할 겸 연주했던 5분짜리 리허설이니까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내려오면 될 일이지만, 반대로 리허설이기 때문에 적당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뒤로 돌았다.

『!?』

『□□ □…….』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안에 있던 두 남자가 깜짝 놀란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살폈다.

한 분은 30대 중반 정도로 한눈에 봐도 이곳의 직원임을 알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60대 즈음 되어 보인다.

정장 차림이 무척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 □□□□?』

직원이 당황한 듯 다가오며 프랑스어로 물었다. 난 말이 통하든 않든 상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스테이지 매니저님 되시나요? 죄송해요. 제가 영어와 러시아어밖에 못 해서.}

{뭐, 그렇습니다.}

다행히 스테이지 매니저는 영어로 대답했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좋은 홀과 피아노네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왔어요.}

{그…… 고맙습니다.}

스테이지 매니저는 뒤늦게 침착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너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툭 하고 내게 물었다.

{맨 처음엔 피아노에 살짝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아마 이분도 관계자시겠지. 무엇보다 내가 피아노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점을 보면 확실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살짝 무거웠어요. 건반도, 음도.}

각 연주자마다 건반의 기준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이었다.

단순히 내가 힘이 약해서 그리 느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관계자분은 껄껄 웃었다.

{역시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더라니. 단 한 번 만에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는 피아니스트는 오랜만이군요. 젊은 친구라 그런가.}

난 이분의 정체를 알 것 같아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피아노를 조율해 주신 분인가요?}

{그렇소.}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조율사님은 대기실 안에 있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지. 베르체노바 양이 내가 조율한 피아노를 과연 어떻게 연주할지 궁금했거든.}

팔짱을 끼며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피아노는 마음에 들었소?}

{예, 무척이나.}

난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악수를 청했다.

{성함이?}

{마누엘 하베르츠.}

마누엘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 이름을 기억하면서 난 그가 조율한 피아노에 찬사를 보냈다.

{소리도 고르고 제가 전력을 다해도 잘 받아 주는 멋진 피아노였어요, 하베르츠 씨.}

{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난 살짝 질문을 덧붙였다.

{반대로 여쭈어도 될까요? 제 연주는 마음에 드셨나요?}

{감동적이었소.}

마누엘은 짧고 굵게 말했지만 그의 진심은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조율사가 바라는 소리를 제대로 이끌어 낸 것이다.

싱긋 미소를 짓자 그는 짓궂게 농담했다.

{거의 부숴 버리려고 하던데.}

{후후, 전 힘이 그렇게 세지 않아요.}

악수를 해 보니 알겠다는 듯 마누엘은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기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술을 지닌 피아니스트들이 못 하는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대단하군.}

어쩐지 해외에 나와 보니 이런 말을 자주 듣는 것 같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난 어리고 왜소하게만 보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인상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음악뿐이겠지.

난 기대해 달라는 의미로 다시 환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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