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05화 (1,105/1,277)

##  1105화

마누엘과 인사를 나누고 이어 스테이지 매니저에게도 이름을 묻고 악수를 건넸다. 그는 다비드 고베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다비드와 마누엘은 이 무대 세팅을 맡은 책임자였다. 일요일이면 시작될 콩쿠르 첫 라운드와 준결승전 모두 그들이 맡아 무대를 준비하게 된다.

난 오늘 같은 수준의 상태만 갖추어진다면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비드가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짤막한 통화 후 그는 날 힐끔 돌아보더니 말했다.

{관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베르체노바 씨와 이야기 중이냐고.}

{아, 허락을 받고 올 걸 그랬나 봐요.}

연주를 마치자마자 너무 무턱대고 뒤쪽 대기실로 들어와 버리긴 했다. 아마 홀 안의 사람들은 날 기다리고 있을 테지.

슬슬 돌아가야 할 분위기였다. 다비드 역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분 좋게 웃었다.

{허락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와 줘서 더 좋았습니다, 베르체노바 씨.}

{그랬나요?}

{하하…… 가끔 이런 분들이 있어서 저희도 열정적으로 무대에 집중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마누엘?}

마누엘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내가 준비한 음악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최선을 다하여 세팅한 무대를 연주자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물론 난 이미 연주로 하고자 하는 말과 표현은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렇게 직접 와서 전하는 것은 또 다른 분명한 의미가 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웃어 보이자 다비드가 나가는 문 쪽으로 손짓했다.

{아무튼 찾는 사람이 많은 것 같으니 이만 나가 보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무대와 음악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잠깐 인사만 나누고 나가려니 약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 보라는 듯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내가 돌아서 출구 쪽에 다다랐을 때, 다비드가 마지막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다음에 올라오셨을 때도 피아노와 무대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세팅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준비하시고…… 최고의 실력을 뽐내 주시길 바랍니다, 타티아나 씨.}

난 고개만 슬쩍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연주자의 뒤에서 있었을까. 내 인생의 몇 배는 될 시간을 음악계에서 활동하며 헌신한 사람들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존경과 신뢰를 그들에게 전했다.

{믿고 맡기겠습니다. 고베르, 하베르츠.}

음악계를 지탱해 온 단단한 두 그루의 거목은 내가 나갈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 오래되고 거대한 콘서트홀보다 더 믿음직스러웠다.

다시 무대 위로 나오자 눈앞이 어지러웠다. 너무 밝은 조명 탓이었다.

난 본능적으로 피아노를 찾아 그쪽으로 향하려다가 간신히 걸음을 제대로 가누었다.

지금 난 주어진 5분을 제대로 다 사용했다. 지금 다시 피아노로 무언가 하려고 들면 안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가장 좋다.

“…….”

무대 옆에 붙어서 피아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선 청중석 쪽으로 걸어 나왔다.

이렇게 피아노를 외면하고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이내 청중석 앞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니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데 다행히 내가 모든 것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루트거는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알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대기실에 누가 있었습니까?”

“예. 스테이지 매니저님과 조율사님이요.”

“인사라도 드리고 오신 모양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대기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냥 박수 소리가 들려서 가 봤을 뿐이에요.”

“예?”

루트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아무리 청중석 쪽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가 작아도 벽 너머 연주자 대기실에서의 소리까지 들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듯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했으니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난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대기실에서 박수를 보낼 청중분이라면 분명 이 홀의 관계자일 거라고 생각했죠. 거기에 조율사님도 계실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뵙고 싶던 분을 뵙게 되어서 기분 좋았어요.”

“뵙고 싶었다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트거를 보며 난 빙그레 웃어 보였다.

“리허설이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 말에 루트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인사를 했다는데 그가 무어라 할 권리는 없었다.

납득했다는 듯 루트거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그에게 부탁했다.

“옆의 분들에게도 전해 주시겠어요? 시간을 지체한 것에 대해서 사과드리겠다고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루트거는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해 옆에서 궁금해하는 다른 직원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살짝 뒤편에 있던 데보라 아주머니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셨다.

아주머니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내가 한 연주에 대해서도, 이후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녀가 전부 찬성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뿌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타티아나, 이건 원래 연습하던 곡이 아니지 않니?”

“그렇죠. 집에선 친 적 없어요.”

드뷔시의 프렐류드는 내 콩쿠르 레퍼토리 안에 없었다. 하지만 난 반드시 이 곡을 쳤어야만 했다.

“음향적 조건들을 알아보기에 가장 적절한 곡이라고 생각해서요.”

“보통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하던 곡을 해 보던데?”

“크게 상관은 없어요.”

레퍼토리를 짧게나마 연주해 보는 편이 더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5분 사이 모든 곡을 조금씩 쳐 보는 건 되레 나중에 헷갈릴 여지가 많았다.

그럴 바엔 나처럼 여러 방면을 시험할 수 있는 한 곡으로 균형을 잡고 확실하게 알아보는 편이 효율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대와 피아노가 내게 이 곡을 추천하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긴 참 어려운 이유네.’

아마 알레한드로 같은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인 아주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것이 분명하기에 난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내 선곡에 대해 더 묻지 않고 청중석 뒤쪽을 가리켰다.

“난 일부러 가장 뒤쪽에 있었거든?”

“봤어요. 후후.”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아주머니는 한층 더 상기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네 피아노 소리는 뒤에서 들어도 또렷하게 잘 들리더라. 정말 좋았어.”

“일부러 뒤에서도 봐 주시고…… 감사해요.”

“별거 아니었는데 뭘. 그리고 이번엔 뒤쪽이 가장 경치가 좋았던 것 아닌가 싶어.”

무언가 표현하려는 듯 아주머니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어떻게든 감상을 내게 전해 주시려는 것 같은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주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해선 물어보셨다.

“뭔가 멀찍이서 소리가 들려오니까 더더욱 전체적인 이미지가 잘 잡히더라고. 내가 곡 제목은 잘 모르겠는데…… 불꽃놀이 같던데, 혹시 맞니?”

“예! 맞아요. 드뷔시의 불꽃놀이에요.”

“어쩜 그렇게 잘 치니?”

표제 음악은 주제가 명확해서 제목을 보고 음악의 이미지를 연상해 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음악을 듣고 제목을 맞추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주머니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에 대해 무척이나 기뻐하시면서도 내가 그렇게 명징한 이미지를 피아노로 연주해 냈다는 것에 대해 감탄과 뿌듯함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가장 뒤편에 앉아 계셨던 아주머니에게 제대로 음악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본무대에서도 오늘만큼만 하면 될 거야.’

내 모든 능력이 최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느낀다.

객관적으로 보아 기술과 음악성 모든 것에 큰 문제가 없었고, 주관적으로도 이것이 현재 최선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컨디션 난조만 없다면 본 무대에서도 분명 잘할 수 있으리라.

자신감을 가지며 난 조금 더 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

이연주는 콩쿠르 측의 부름을 받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콘서트홀에 가서 이것저것 접수하고 리허설도 해야 하니 마냥 편한 옷차림으로 갈 순 없어서 준비할 것이 꽤 많았다.

옷을 입고 화장을 고치는 동안 집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이연주는 충전기에 꽂아 두었던 스마트폰을 빼선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원래는 호스트 패밀리의 아주머니가 이연주를 콘서트홀인 플라지 빌딩에 데려다주고 등록에 관련한 통역 같은 것도 도와줄 예정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런 건 호스트 패밀리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전에 학교에 가 있던 아이가 열이 나는 바람에 지금 병원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맡은 연주자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 이연주는 충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잔뼈 굵은 연주자로서 이미 몇 번이나 국제 콩쿠르 출전한 경험이 있다.

스물여섯 살쯤 되면 해외에서 혼자서 택시를 타고 움직이며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이 울었다. 그녀를 부르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나 거의 다 왔어.]

이연주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항상 느끼지만 땅이 넓은 해외에서 이런 주택가를 보면 정원을 예쁘게 가꾸는 집이 많았다.

한국 도심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정원을 구경하며 이연주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기다렸을 때, 도로 쪽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여기야!」

조수석에서 내리며 손을 흔드는 남자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김진우. 이연주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선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이연주는 어쩐지 키만 훌쩍 큰 그를 볼 때마다 애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진우는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잘 지냈어? 연주 누나. 오랜만이네?」

「그러게. 넌 잘 지냈어?」

「나야 뭐, 보다시피.」

김진우는 양팔을 펼쳐 보였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이게 정신머리가 있는 사람의 행색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이연주는 짜증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차분하게 물었다.

「진우야, 너 그러고 콘서트홀 갈 거니?」

「뭐 어때?」

「리허설 있다는 말 못 들었어?」

「리허설이잖아?」

「……너, 내 옆에 오지 마. 혼자 다닐 테니까.」

진짜 창피해서 같이 다닐 수가 없다.

이연주는 그를 무시하고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김진우가 머무는 호스트 패밀리의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김진우의 복장에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때려서라도 좀 고쳐 주길 바라는 건 너무한 기대인가?

대체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이연주는 한숨을 쉬며 인상을 썼다. 김진우가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니, 옷 같은 거 신경 쓸 틈이 있으면 피아노에 조금이라도 더 집중해야지! 안 그래?」

「말은 참 잘하네. 환영 파티도 피아노 연습하려고 안 온 거니?」

「그게…….」

어물쩍 대충 넘어가려는 낌새를 느끼자마자 이연주는 바로 날카롭게 힐난했다.

「경민이한테 들었어. 너 전날 술 먹고 술병 나는 바람에 그날 꼼짝도 못 했다고.」

「아, 씨. 뭐 그런 걸 다 이야기한대?」

「놀러 왔어? 응?」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 두 사람은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이곳 벨기에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겨우 한 살 많다고 이러쿵저러쿵 참견이라니……. 하지만 이연주는 다시는 이 녀석에게 신경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미안함 정도는 느끼는지, 김진우는 능구렁이처럼 뒷좌석 문을 열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일단 타. 늦겠다, 누나.」

「에휴…….」

어디서 본 건 있는 것 같은데, 저런 차림으로 그래 봐야 어이없을 뿐이다.

이연주는 제발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길 빌며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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