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06화 (1,106/1,277)

##  1106화

목적지인 플라지 빌딩은 자동차로 30분 정도 걸렸다.

그동안 김진우는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같이 온 사람이 있는 이연주와 달리 혼자서 이곳에 온 김진우는 그간 한국말 한 번 할 틈도 없이 고생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냥 한국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이연주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기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도 우리나라 애들 엄청 많더라. 나랑 경민이랑…… 누나랑 지은 누나…… 총 몇 명이지?」

「14명. 안 찾아봤니?」

「리스트 대충 보긴 했는데 굳이 세어 보진 않았지.」

김진우는 굳이 그런 걸 찾아보고 있으면 힘이 빠진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연주로선 이해가 안 갔지만 김진우는 뭐든지 약간 대충대충 하는 성향이 있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면서 그런 성격이면 곤란한 일이 많을 텐데.

그런데도 김진우는 천재적인 테크닉과 특유의 낙천성으로 막상 무대 위에선 긴장도 안 하고 뭐든지 잘해서 평가가 꽤 좋았다.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항상 잘 웃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하는 건 좋긴 한데…….’

가끔 정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다는 걸 이연주는 그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 같을 때가 그랬다.

김진우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결승전에 죄다 한국인들만 올라가는 것 아냐?」

어이가 없는 희망 사항이었다. 이연주는 그게 말이 되냐고 한마디 쏘아붙일 힘조차 없었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 하지만 73명 중 마지막 파이널리스트는 12명밖에 안 된다. 거기에 한국인이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까?

이연주가 참가자들을 봤을 땐 대부분이 파이널리스트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자들뿐이었다.

물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근거 없는 추측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소리 하다가 제대로 되는 경우 한 번도 못 봤어.」

「그런가?」

「당연한 것 아니니?」

답답한 마음에 핀잔을 주자 김진우는 그냥 농담으로 해 본 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손등을 입 근처에 대곤 작게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하긴, 전통적으로 강한 유럽 애들은 여전히 강하더라. 나 며칠 전에 심심해서 여기 동네 연습실 갔다가 꼬맹이 한 명 만났거든? 근데 열두 살짜리가 라 캄파넬라를 치던데?」

「열두 살이?」

「기절했다니까 진짜로? 피아노 대결하다가 질 뻔했어.」

라 캄파넬라 정도의 난곡을 치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가 대결에서 질 뻔했다는 말 같은 걸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김진우의 매사 가벼운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겨운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연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진우가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요즘은 중국 애들도 장난 아니고…… 일본은 원래 잘했고…….」

본래 클래식 음악이 주류였던 유럽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던 것도 옛말이나 다름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수십 년 전부터 일본의 음악가들은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한국과 중국이 요즘은 그 뒤를 빠르게 뒤쫓고 있었다.

특히 기악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성과가 자주 올라오고 있다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세대가 변화하는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연주는 무게감을 느꼈다.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알게 모르게 그녀의 어깨 위에 있었다.

김진우 역시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다.

「뭐, 그래도 우리가 더 잘하지만.」

피식 웃으며 말하는 그 자신만만한 모습은 조금 부럽다. 근거 같은 건 필요 없다.

그저 믿고 나아가 성취했을 때 비로소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미리 이야기할 뿐이니까.

이연주는 김진우의 이런 부분은 배울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어쨌든 지금부턴 영어로 이야기하자.」

「어? 갑자기 왜?」

「우리끼리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는 거 실례야.」

이연주는 운전하시는 아저씨가 계속 뒷좌석 쪽에 눈치를 보낸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는데 두 명만 아는 언어로 계속 이야기하는 건 한 명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모두에게 통하는 언어가 있다면 되도록 그걸로 말하는 것이 좋다. 이연주는 그것을 국제적인 에티켓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관없지 않나…….」

김진우는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러면서도 이연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곧 경쾌한 영어로 운전석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저씨, 미안해요. 내가 며칠 만에 만난 한국 사람이라서.}

{하하하, 상관없으니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아뇨, 지금부턴 영어로 하려고요. 어…… 소개부터 하지?}

배턴을 넘겨받은 이연주는 뒤늦게 인사했다.

{이연주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벨기에에 온 걸 환영합니다. 난 필리프라고 불러 줘요.}

이렇게 인사를 하고 나니 확실히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

이연주는 이 애를 데리고 있으면서 혹시 힘든 점은 없냐고 물으며 필리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진우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더니 갑자기 낄낄거렸다.

{그래, 영어로 하는 것도 재밌겠네. 난 어쨌든 이득이니까.}

{왜?}

{반말해도 되잖아. 헤이.}

{죽고 싶어?}

한 살 차이면 별것 아니긴 하지만 이연주는 그와 친구를 먹으면 얼마나 더 피곤해질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때문에 그녀는 강압적으로 영어로도 존대하라고 요구했다. 영어는 공식적인 존대가 없긴 하지만 문장을 길고 예의 있게 말하면 그것이 곧 존대였다.

하지만 김진우는 자신 영어를 잘 못 하니까 많은 걸 바라지 말라며 이연주의 요구를 묵살했다.

잘 못 해서 못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와 도로 한국어로 하라고 할 수도 없다.

결국 이연주는 김진우가 ‘헤이 유!’라고 부르며 장난을 칠 때마다 이가 갈리는 기분을 느끼며 견뎌야만 했다.

{생각보다 금방 왔네?}

{난 오래 걸린 것 같은데…….}

플라지 빌딩에 도착한 이연주는 벌써부터 피곤함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건물을 올려다보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방송국 건물이어서 콘서트홀 이름도 스튜디오4라고 불린다고 들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처럼 세계적 명성이 있는 콩쿠르가 왜 이곳에서 시작되는지 이연주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자, 올라갈까요?}

멍하니 서 있자 필리프가 먼저 앞장섰다. 정신을 차린 이연주는 급히 김진우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필리프는 이미 이곳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지 길을 따로 찾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콩쿠르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아 폰을 보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힐긋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 □□□. 반갑습니다. □□□? 영어?』

{영어로 부탁드려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더니 곧 유창한 영어로 설명했다.

{전 마르텐 엘슨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두 분이 같이 오신다고 듣고 시간을 맞춰 두었는데…… 앞서 오신 분이 한 분 더 계셔서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예, 뭐…….}

{그럼 이쪽으로.}

사무실은 상당히 넓었다. 직원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이연주는 약간 긴장을 느꼈다.

먼저 왔다 간 임세연의 말로는 이곳에서 순번을 추첨하고 무언가 등록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연주는 되도록 앞쪽 순번을 원했다. 괜히 일정이 길어지면 늘 무대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되어 버리는 약간의 징크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사무실 한편에 놓여 있는 소파로 안내받았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어!?}

얌전히 소파에 앉았던 이연주는 깜짝 놀라 도로 튕겨 일어났다.

앞쪽 테이블에서 서류를 들고 유심히 보고 있는 여자가 이곳 직원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아나스타샤는 서류에서 눈을 뗐다. 그런데 그녀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두 명의 사람도 함께 이연주를 돌아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반가워서 이름을 불렀는데 갑자기 세 명이 쳐다보니 숨이 턱 막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연주가 얼어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서류를 내려놓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옆의 두 사람에게 무언가 양해를 구하고는 소파 옆으로 다가왔다.

아나스타샤는 청바지에 셔츠 차림이었는데, 다른 액세서리 같은 것 없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돋보였다.

이연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 리허설하러 왔어?}

여전히 제대로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사근사근한 태도로 먼저 인사해 주었다. 파티장에서 친해진 덕분이었다.

간신히 긴장을 내려놓은 이연주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응, 너도?}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오전에 왔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 늦게 왔거든. 그랬더니 시간이 엉킨 것 같네. 미안해.}

{아니야, 상관없어.}

어차피 이것저것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건 예상한 바였다.

이연주는 그저 본격적으로 콩쿠르가 시작되기 전에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와 재회한 것이 반갑기만 했다.

그런데 자꾸 옆에서 김진우가 기웃거려서 방해되었다.

「누구야? 누구?」

「내 친구.」

그냥 짧게 잘라 말했는데 김진우는 소개시켜 달라는 눈빛으로 이연주를 졸랐다.

어차피 모른 척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연주는 한숨을 내쉬며 김진우를 소개했다.

{여기는 내 동생, 아니지…… 아는 피아니스트인 김진우라고 해.}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는 사람이라고 선을 그은 것에 대해선 신경도 안 쓰고 김진우는 기세 좋게 러시아어로 인사했다.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듣고 국적을 대충 유추한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김진우를 바라보더니 긴 이름을 밝혔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입니다.}

{러시아분이시죠? 그…… 혹시 모스크바에서 왔나요?}

{맞아요.}

{와, 제가 맞췄네요! 정말 멋진 도시더라고요.}

{가 본 적 있나요?}

{그건…….}

김진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냥 무작위로 떠오른 수도 이름을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말의 양심이 그의 입을 막고 있다는 것을 느낀 이연주는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가 본 적 없잖아. 왜 망설여.」

「가 본 척하면 안 돼? 이것도 다 친해지는 과정인데.」

「넌 친해지는 걸 거짓말부터 시작하니?」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 좋아할 여자는 아무도 없다.

이연주는 한심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런 사람을 소개시켜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처음부터 김진우는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친근하게 말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선을 딱 긋고 그를 대했다.

이연주는 하마터면 웃어 버릴 뻔했다.

아나스타샤는 한번 친해지고 나면 그다음엔 친절하지만, 처음엔 대놓고 선을 그으며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타입이었다.

긍정적인 김진우도 어정쩡해진 분위기에선 멋대로 굴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적당히 그를 마무리 짓고는 필리프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이연주에게 이따가 이야기하자고 전한 뒤 다시 자기 테이블로 돌아가선 서류 검토에 들어갔다.

할 일이 있으니 오래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 깔끔하게 인사만 딱 마치고 다시 서류를 잡은 아나스타샤를 보며 김진우는 약간 당황해했다.

「그런데…… 저 애,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맞지?」

「어리지. 좀 많이.」

「엉? 몇 살인데?」

「열일곱.」

그 말을 듣자마자 김진우는 경악했다. 아마 스물 언저리로 예상한 모양이다.

그는 자포자기한 듯 소파에 축 늘어졌다. 그러고는 아나스타샤가 차가운 태도를 보였던 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귀찮은 아저씨 보는 눈빛이더라. 젠장.」

「푸흐흐흐…….」

「왜 웃어?」

김진우는 벌컥 짜증을 냈지만 이연주는 더더욱 그를 놀리고자 크게 웃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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