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7화
아나스타샤는 이연주보다 한참이나 어린, 세연과 같은 나이의 피아니스트였다.
원래대로라면 마냥 귀엽게 보여야 할 나이. 하지만 이연주는 아나스타샤를 귀엽게 여기기 정말 어려웠다.
키도 이연주보다 크고 외모도 날카롭고…… 성격도 냉철하고 어른스럽다.
이연주는 아나스타샤와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약간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연주는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파티장에서 주고받은 SNS를 나중에 찾아보았을 때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친구가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진에 같이 찍혀 있는 건 거의 타티아나 아니면 발렌티나라는 이름의 다른 친구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혼자 풍경이나 사물을 찍어 놓은 사진들을 보면 약간이나마 그녀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사진 역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정말 많은 것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복잡한 애야.’
정말 화려하게 살 것만 같은데도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서 사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태도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이연주는 어쩐지 그녀가 조금 안타까웠다.
그래서 만약 가능하다면 그녀의 먼 친구나마 되어 주고 싶었다.
가까이 있는 타티아나가 재벌가의 딸이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 해 줄 수 있겠지만, 세상엔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아나스타샤는 쓸데없이 괜히 친해지려 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연주는 아나스타샤와 처음 만났을 때 바보 같은 외국인 두 명을 두고 그냥 신경 쓰지 않고 가 버릴 수도 있었던 그녀가 굳이 도움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쿨하고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따뜻하고 깊은 이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이야기해 보자.’
끝나고 차 한 잔 정도 하자고 할 순 있겠지.
물론 오늘을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나면 그다음엔 경쟁자겠지만…… 그래도 이연주는 그녀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기다리셨죠? 잠시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서류철을 들고 나타난 마르텐 엘슨은 이연주와 김진우의 앞에 각각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콩쿠르 참가자로서 등록에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전부 프랑스어로 되어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마르텐과 필리프가 같이 설명해 주어서 두 사람은 잘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등록 작업이 다 끝났을 때, 마침 아나스타샤도 모두 마쳤는지 자신의 담당 직원에게 서류를 전부 돌려주고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꼼꼼한 성격이었다.
잠시 후, 직원들이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걸 본 김진우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이야, 진짜 아날로그로 추첨하네.」
사실 모든 참가자 목록 같은 건 이미 전산화되어 있으니 컴퓨터를 돌려 순서를 정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직접 연주자들이 순서를 뽑게 하는 데에선 약간 상징적인 의미도 느껴졌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뽑고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오! 마지막 날이네요!}
아나스타샤 쪽에서 한 직원이 그녀가 뽑은 공을 보더니 말했다. 이연주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은 그대로 상자를 들고는 이연주와 김진우 앞에 내려놓았다. 이연주가 먼저 11-A-2라고 적혀 있는 공을 뽑았다.
{이게 어떤 의미인가요?}
{11일 오후 세션 두 번째이십니다.}
{아하.}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이었다. 마치 티켓을 사면 적혀 있는 것처럼.
11일이면 콩쿠르 둘째 날이다. 아예 일찍 연주하길 바랐던 이연주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서였다.
이어 김진우는 11-A-6의 공을 뽑았다.
「안에 공이 몇 개 없긴 했는데…… 11일 것만 남아 있었나?」
「그러게.」
김진우와 같은 오후 세션이라면 연주자 대기실까지 같이 있게 되는 상황이었다.
괜히 이연주는 인상을 쓰며 싫은 내색을 했고, 김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가 불만이야? 같은 세션인데 외국인들하고만 있는 것보다 그래도 내가 끼어 있는 게 낫지. 그리고 만약 긴장하면 내가 재미있게 풀어 주기도 할 텐데.」
「제발 그것만 하지 마…….」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이연주는 진심으로 질색했다.
김진우가 대기실에서 말로 정신 공격을 가한다면 정말 연주를 망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어쨌든 순서 추첨도 끝나자 옆에 서 있던 마르텐이 물었다.
{이제 스튜디오4를 확인하고 리허설을 하러 가실 차례인데…… 혹시 이즈마일로바 씨와 친하시다면 같이 가셔도 됩니다.}
{아, 정말요?}
{물론 이즈마일로바 씨의 동의가 있어야 하겠지만요. 잘 이야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마르텐은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 리허설이 본무대 전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니까요.}
무대를 확인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니 방해되는 일은 최대한 삼가야만 했다.
곧 경쟁자가 될 다른 피아니스트들을 청중석에 앉혀 놓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의식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일부러라도 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연습은 실전처럼. 항상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 말대로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리허설도 보고, 그 압박감을 피부로 본격적으로 느끼며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해 봐야 하는 일이다.
반대로 자신의 연주를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 들려주고 피드백을 받는 것 역시 어렵더라도 도움이 될 일이고.
물론 그렇게 하려면 서로 간의 신의와 선의가 있어야 하지만…… 일단 이연주는 지금 여기 있는 두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어만 보자.’
그 생각만으로 이연주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사무실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 추첨 결과는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럭저럭.}
{마지막 날을 원하지 않았던 거야?}
{딱히 순서가 중요한 건 아니었어.}
왠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지금 머리가 복잡한 상태인 것 같았다. 이연주는 괜히 예민한 사람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걱정 많은 이연주의 성격은 그냥 묻지 말고 각자 리허설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나스타샤가 이연주가 갈등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핸드폰을 덮으며 물었다.
{아무튼, 왜?}
되도록 편하게 해 주려는 마음씀씀이가 느껴진다. 단순한 제안 정도에 그녀가 화내거나 하진 않으리란 믿음을 가지며 이연주가 물었다.
{혹시 괜찮다면…… 리허설을 같이하면 안 될까?}
{같이?}
{혼자서 리허설하면 아무래도 피드백을 하기가 쉽지 않잖아? 그러니까 돌아가면서 리허설하고, 그사이 다른 사람은 청중석에서 봐 주는 거지.}
아나스타샤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벌써 안 내켜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말을 꺼냈으니 하던 말은 끝까지 해야 했다.
{저기 있는 진우가 보기엔 영 못 미더워 보이지만 그래도 피아노로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 애거든? 그리고 이상한 짓 할 애도 아니고.}
{이상한 짓?}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든지 말이야……. 왜 그런 것 있잖아.}
이연주는 지금 아나스타샤가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건지, 아니면 거절하게 만드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서로 신의가 없다면 음악을 듣고 평가하는 귀와 입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고, 차라리 그런 협동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과연 아나스타샤가 이연주와 김진우에게 그런 신의를 느끼고 있을지 이연주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어져서 이연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아직 콩쿠르는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난 우리가 그 정도 협동은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어때?}
이연주는 며칠 전 레티시아와 같은 연습실을 빌려 연습했었다.
단 2시간 정도 같이한 연습이었는데 그것이 이연주에겐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 리허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는 생각으로 이연주는 아나스타샤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긍정적인 답을 내어 주었다.
{괜찮아. 그럼 그렇게 하자.}
{정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싱긋 웃었다. 괜한 걱정 하지 말고 같이 잘해 보자는 뜻이 느껴져서 이연주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럼 진우한테 그렇게 이야기할게.}
{이미 이야기한 거 아니었어?}
{내 마음대로 너한테 먼저 물어본 거거든.}
이연주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서 김진우에게 말했다.
「진우야. 우리 셋이서 같이 리허설하자.」
「뭔 소리래?」
김진우는 당연히 리허설은 혼자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굉장히 당황해했지만, 이내 이연주의 말에 설득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연주의 연주 실력은 어느 정도 알지만 아나스타샤에 대해선 잘 모른다.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수준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의견을 맞춘 세 사람은 마르텐의 안내에 따라 스튜디오4로 향했다.
리허설 규칙으로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이었다.
{너무 짧지 않아요?}
{다른 연주자분들도 모두 시간을 지켜 주셨습니다.}
{준비한 레퍼토리가 좀 긴데…….}
이연주는 망연자실하여 중얼거렸다. 못해도 15분은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짧아도 너무 짧았다.
분명 이것도 일부러 말해 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자자한 악명이 벌써부터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르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세 분 중 먼저 올라가실 분은 누구십니까?}
하지만 곧바로 리허설을 시작하려는 그의 목소리를 아나스타샤가 가로막았다.
{그 전에 잠시만요.}
마르텐이 돌아보자 아나스타샤는 손을 뻗어 저 멀리 있는 무대 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카메라들은 지금 작동하고 있는 건가요?}
{예. 리허설하면서 방송 장비들도 함께 돌아가고 있죠.}
스튜디오4라는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홀엔 카메라와 조명이 정말 많이 매달려 있었다. 마르텐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비스듬한 각도, 그리고 건반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손만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습니다.}
정말 모든 각도에서 피아니스트를 촬영하여 방송하는 모양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동의하는 서류에 사인했기에 이연주는 이 사람들이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려 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의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요.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저희가 어떻게 찍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마르텐은 약간 난색을 표했지만 아나스타샤의 요구는 정당했다.
열 개도 넘는 카메라들의 중심에 앉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전 세계 사람들 앞에 일거수일투족이 찍혀 보여지는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자체로 중압감에 눌려 이상한 언행을 하게 될 정도다.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도 완벽한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피아니스트들은 많이 단련하고 경험을 쌓으며 강해지려고 애쓴다.
처음엔 그냥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짝 마를 정도로 긴장되지만, 점점 단련되면서 이런 상황도 견뎌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익숙해졌다고 해도 전 세계 앞에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확인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모든 피아니스트가 이런 것을 요구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거부할 수 있는 요구는 아니었다.
마르텐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기시는 분들께 가급적 협조하라는 말이 있었고, 음악만이 아니라 영상도 중요하죠. 그럼 따라오시죠.}
호스트 패밀리는 잠시 청중석에 앉아 기다리고, 피아니스트 세 사람만 마르텐을 따라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컨트롤 룸으로 향했다.